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709화 (700/1,590)

< 709화 소울 메이트(8) >

‘생각해 볼 게 많기는 해.’

그 말 그대로였다. 어째서 갑작스레 1회 차를 보게 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문제였다.

그동안은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이 블러핑을 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미 나는 그것에 관해 알고 있지 않은가.

‘김현성이 이기영을 찌르는 것.’

전에도 한 차례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게 승리할 수 있는 퍼즐이었다. 루시퍼와의 내기였고, 우리가 이 전쟁을 가질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대충은 마무리가 지어졌다고 판단했지만 아직도 내가 외면하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에 세웠던 가설들을 모두 무위로 돌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 더 깊게 파고들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

가면쓰레기의 영혼이 이기영의 영혼을 침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대해 잠깐 고민해 봤지만….

‘위화감은 없고….’

위화감이 없으니 구태여 막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애초 막고 싶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분명히 도움을 주는 부분도 있었으니까.

일단은 내가 봤던 것들부터 정리하는 것이 먼저. 지금까지 세워놨던 가설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가설이 생겨났으니 태세전환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 적이 아니었던 건가?’

가장 충격적인 것은 가면쓰레기가 김현성을 적대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 어떤 것보다도 이 사실이 가장 흥미롭다.

김현성과 1회 차의 가면쓰레기는 정적이라고 생각했었다.

1회 차의 역사는 김현성과 가면쓰레기의 대립이 주요 주제였다.

둘은 어느 시점부터 서로를 증오할 정도로 적대시했고 여러 차례의 전쟁을 겪었다.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고 결과적으로 대륙이 완전히 멸망할 정도로 상황이 꼬여 버렸다.

김현성은 세상을 구해야 하는 용사였고 가면쓰레기는 그의 대적자였다.

흔한 이야기다. 용사와 마왕 같은 포지션이었으며 라이벌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적의로 꽉 찬 관계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가면쓰레기 진청은 도저히 구제할 방법이 없는 사이코패스였다고.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도대체 뭐지?

‘내가 선택한 건 여기 있는 이 자야. 훌륭히 자신의 과업을 달성하고 지쳐 쓰러져 버린 영웅 말이야. 이겨내지 못한 자. 희생을 등에 업은 자. 깨달은 자. 실패한 영웅 김현성. 크으… 좋은 울림이야. 그렇지 않아? 실패한 영웅 김현성! 모든 짐을 짊어진 영웅 김현성. 세상을 바꾸는 건 너희 비둘기들이 아니라 이거야. 여기 있는 이자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이곳을 구원할 거다.’

도대체 뭐야.

마치 본인이 김현성을 애지중지 키운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김현성과 적대한 모든 행동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애초에 내가 가정했던 모든 경우의 수를 한꺼번에 부숴 버리는 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저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가면쓰레기의 생각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단순히 알콜 중독 비둘기를 기만하기 위한 대사일 수도 있고 아무 의미 없이 지껄인 대사일 수도 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가면쓰레기는….

“가면쓰레기는 김현성을 죽인 적이 없었어.”

그의 역사를 계속해서 살펴봤지만 녀석은 김현성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김현성에게 다른 해를 끼친 적이 없다.

심지어 세계가 멸망한 이후에도 김현성이 계속해서 살아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의 가설에 힘을 실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알타누스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지만 이쯤 되면 다른 가능성도 존재한다. 처음부터 가면쓰레기가 김현성을 남겨두려고 했을 경우다.

“미친 거 아닌가. 시바.”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이 많다. 처음부터 가면쓰레기가 김현성을 원망하지 않았었다면?

물론 그간의 일을 생각했다면 그가 김현성을 원망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김현성을 이해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복수에서 다른 노선으로 목적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을 계속 적대했던 것은….

‘김현성이 강해지기를 바라서였다고?’

머리를 뒤흔든 뒤 망원경으로 김현성을 바라보니 알콜 중독 경험치 비둘기와 얽혀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1회 차에 있었던 싸움보다 더 격렬한 싸움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도중.

솔직히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김현성.

-…….

콰아아아아아아앙!!

이미 저 둘이 있는 지역은 다른 전장와 공간이 분리되어 버린 지 오래다.

주변에 거대한 보호막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저들의 싸움에서 비롯한 여파에 다른 이들이 휘말리지 않게 하려는 최소한의 장치였다.

물론 저런 게 의미가 있을 리 만무했다. 보호막은 순식간에 터져 나가고 심지어 성벽까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아이… 시바. 이거 무너지면 안 되는 데.’

김현성이 검을 휘두른 직후였다. 검에 담긴 검은색의 마력이 순식간에 성벽을 휘감았고 콰앙 소리와 벽면 한쪽이 완전히 터져 나갔다.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힘을 조절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둘의 싸움은 1회 차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위에서, 바닥에서,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며 검을 부딪친다. 둘의 모습이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있다는 게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필사적으로 자신의 친우를 찾는 알콜 중독 비둘기와는 다르게 김현성은 흥분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흥분 안 하는 게 이상한 건가.’

분위기에 취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의 모습에 취해 있을 수도 있지.

녀석을 겨우 상대했던 예전의 김현성과는 다르다. 현재의 김현성은 놈을 압도하고 있었다.

부족했던 마력은 늘어났고 없던 날개도 생겨났다. 육체적으로도 몇 단계나 더 성장했다. 모든 게 열세에 있었던 예전과는 확실히 차이점이 있다는 거다.

점점 더 눈이 붉어지는 듯한 모습에 응원을 보내기는 했지만… 솔직히 저 알콜 중독 비둘기가 만만치 않다.

마치 서로의 포지션이 1회 차와 뒤바뀐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알콜 중독 비둘기는 마치 1회 차의 김현성처럼 싸우고 있었다. 모든 부분이 열세에 있지만 김현성의 힘을 적절히 이용하며 운영하는 싸움을 가져가고 있었다.

분명히 김현성이 밀어붙이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이상하게 김현성이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가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한참이나 몸을 부딪치던 녀석들이 가까운 거리를 두고 검을 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약해졌군.

-아니, 나는 강해졌다. 쓰로누스.

-너는 약해졌어.

-네 목이 잘려 나갈 때도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지 지켜봐 주지.

‘현성이 시바 어디서 그렇게 험한 말을 배웠어.’

-힘에 취해 이성을 잃은 건가. 그 힘은 너를 갈아먹을 것이다. 김현성.

-나는 언제나 이성적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야.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항상 인지하고 있다.

-추하군.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는 알고 있나?

-추한 모습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아니야. 현성아 너 안 추해. 추하지는 않아. 간지 나는데 왜 그래. 누가 검은 날개를 보고 추하다고 그래?’

-추해 보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게 더러운 악마에게 몸을 판 자의 말로다. 김현성. 네 모습을 내려다봐라. 그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네가 빛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너는 빛나지 않아. 별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아니, 이런 대화를 한다는 것도 우습다고 느껴질 정도야. 아주 조금이나마 네게 기대를 걸었지만 이제 네게 궁금한 것은 없다. 네 역할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이야기하는 것뿐이야.

-…….

-지시는 필요 없다. 세라핌. 이 자는 나를 이길 수 없어. 나 혼자 되찾겠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네 모습으로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게 설득력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멍청해지기까지 했군. 넌 지금 그 힘에 취해 있어.

-…….

입술을 꽉 깨무는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얼굴이다. 그렇게 잠깐 멈췄던 싸움이 다시 한번 시작됐다.

질 리가 없다는 표정의 김현성, 그리고 천천히 검을 쥔 쓰로누스.

전투의 향방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딱 이 시점부터였다.

‘이 약물중독 비둘기 새끼.’

“왜 이렇게 센 거야. 뭐 한 거야 도대체.”

쓰로누스가 가지고 있는 힘은 케루빔과 도미니온스보다 약하다고 여겨졌지만, 녀석은 그 둘보다 강하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그게 아니라면 현재의 모습이 설명될 리가 없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부터 김현성은 초조해하고 있다.

녀석의 어쭙잖은 심리전에 말린 것이 아니다. 방금 전에 나눴던 대화 그대로였다. 싸움은 스펙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듯 김현성을 유린하고 있었다.

김현성이 도노반을 상대로 싸워 이겼을 때를 보는 것 같다. 힘만 센 멍청이의 포지션에 있는 게 김현성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제길.

-아둔한 인간.

-제길!!

‘분명히 더 유리했을 텐데….’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듯한 느낌.

‘미성숙해.’

김현성은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불안정해.”

1회 차를 겪고 남들이 일들을 겪었지만 녀석은 여전히 미성숙하고 불안정하다.

‘그렇기 때문이었나.’

“그렇기 때문이었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든 게 이해가 된다.

“이래서였다고.”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다시 하나로 모이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가설을 하나 세워보자.

1회 차 가면쓰레기의 목적이 진정한 세계의 구원에 있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녀석은 1회 차가 실패할 것이라는 걸 이미 예전에 깨닫고 있었고 남모르게 2회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것을 보면 그렇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너무 많아 당황스러울 정도가 아닌가.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가면쓰레기는 대륙을 멸망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이게 맞아.”

외신의 대적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김현성을 적임자로 선택했다면 어떨까.

가면쓰레기가 진심으로 김현성을 적대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물론이거니와 방금 본 생소한 장면에 대한 개연성이 채워진다.

“어째서 김현성이었던 거지?”

김현성은 완벽한 영웅은 아니었지만 인류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으니까.

내가 생각하면서도 내가 다 소름이 돋는다. 가면쓰레기가 애초부터 악인이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진실에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녀석은 빌런이 아니다. 대륙을 위해… 스스로 악인이기를 자처했다. 모든 것을 떠안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준비했다.

만약 이 가설이 진실이라면 녀석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을까.

모든 이들이 자신을 욕하고 미워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본인이 인류의 적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도 선택할 수 없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길을 향해 한 발자국을 더 내딛는 행동은 얼마나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할까.

녀석은 가면쓰레기가 아니라 대륙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영웅이다.

이제는 가면쓰레기라고 부를 수도 없다. 계속해서 이전에 봤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고맙다. 알타누스.’

스스로 괴로움을 등에 짊어진 자.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누나.’

대륙을 구하기 위해 악인이기를 자처한 자.

‘여기 있는 이자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이곳을 구원할 거다.‘

대의를 위해 스스로 얼굴을 가린 자.

가면의 영웅.

“나였어….”

진청이 아니었다.

녀석이 그럴 리가 없다.

진청 같은 쓰레기가 짐을 짊어진 영웅일 리가 없지 않은가.

“나였다고….”

내가 바로 1회 차 가면의 영웅이었다.

“시발 내가… 내가 가면의 영웅이었다고….”

상상도 못 한 정체.

그 거대한 반전의 앞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가면의 영웅. 이기영?”

그 가면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슬픔을 숨기기 위해 존재했던 물건이었을 것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