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0화 시나리오(1) >
아주 약간의 민망함이 머릿속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부끄러움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거운 진실이었고 슬픈 이야기였다.
조금 태세전환이 거칠지 않았나 싶기도 했지만 누가 감히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가면의 영웅, 가면의 구세주가 어떤 심정으로 1회 차를 보냈을지에 대해 떠올리자, 거대한 숙연함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런 거였구나.’
‘이렇게까지 대륙을 망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고 생각했다.
괴로웠겠지만 2회 차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인간 몇몇의 죽음이 위에 있는 신들에게 무겁게 다가올 리가 없지 않은가. 위에 있는 녀석들 역시 이 대륙은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만들어야 했다는 거다.
인간들만 이기적이고 실리를 챙기는 것이 아니다. 위에 있는 녀석들 역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는다.
어디 그것뿐이랴. 정말로 그것이 합리적인 것인지에 대한 회의를 거치고 결제를 받기도 한다.
절대로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로 자생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대륙에 안기는 것.
1회 차의 나는 그게 바로 회귀의 조건이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보다시피 가면의 구원자는 훌륭히 임무를 완수했다.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대륙에 남겼고 자신 역시 거대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상하다 싶었어.’
내 상식으로 그 정도의 사이코패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현성에게 녀석의 악행을 들었을 때 얼마나 경악했던가. 정말로 그 정도까지 했을까 하는 의문도 계속해서 들었지만 이제야 그 퍼즐이 풀린 기분이었다.
‘무슨 전염병을 일으키고… 나 참… 인간을 역병 폭탄으로 사용해? 와… 좋아서 그런 미친 짓을 하는 미친놈이 이 세상에 어디 있었겠어.’
좋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
가면의 영웅, 1회 차의 이기영은 모든 걸 설계했다. 물론 모든 과정을 예상하지는 못했겠지만 커다란 그림은 내가 그려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는 생각도 든다. 이를테면….
“김현성의 가방.”
튜토리얼에서 김현성이 발견했다던 영웅 등급의 아이템, 라무스 터커의 연금학개론.
‘이것도 이상하지.’
정말로 튜토리얼 던전에서 발견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혹은 김현성이 회귀하기 직전에 챙겼던 물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수많은 아이템을 두고 굳이 연금술사 전용 아이템을 챙겨올 이유가 어디 있었을까.
노을 진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게 나와 김현성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김현성이 가방을 챙기도록 의도한 걸지도 모른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베일에 감춰져 있지만 당시 대륙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영 설득력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시스템은 완전히 망가졌었다.
생명체를 하나도 남지 않았고 아이템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현성이 신화급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함께 회귀를 선택할 물건으로 본인의 장비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2회 차로 가져올 수 있는 장비가 그것밖에 없었던 거야.’
왜?
가면의 구세주가 남겨놓은 아이템이었으니까. 1회 차에 너무나도 커다란 죄를 저지른 1기영은 흑마법사를 선택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하지도 않은 수많은 죄악을 함께 한 직업이다. 다시 한번 그 직업을 선택하고 싶을 리가 없다. 마음의 눈이 있으니 무조건 김현성을 따라갈 거라고 예상했을 거고 녀석의 예상을 들어맞았다.
결과적으로 2기영은 연금술사를 선택했다. 모든 게 계산대로였을 거다.
그것 외에도 뿌려놓은 것이 너무 많아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날 정도.
가면의 영웅은 본인의 자아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나를 응원하고 인도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보이는 1회 차의 기억들이 확실한 증거였다. 녀석은 1기영과 2기영이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녀석은 내게 다음을 넘겼고.
내가 이후의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이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라고 한들, 온전히 믿음을 준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어떤 생각으로 녀석이 내게 뒤를 맡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유지. 잘 받았다.”
나는 녀석의 유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륙을 구하고 싶다는 그의 진심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뭘 해야 할지도 알 것 같았고 어떤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지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회 차와 2회 차 모두 목적은 같다.
‘우리 현성이의 성장.’
그게 쟁점이다. 어쩌면 김현성이 이기영을 찌르게 되는 스토리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가장 소중한 친구를 죽이면 새로운 눈깔을 얻는 어딘가의 만화 같은 각성은 아니겠지만 김현성의 내면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영웅의 내면의 변화는 성장을 불러오는 것이 상식 아닌가.
현재 김현성의 상태로는 절대로 외신을 물리칠 수 없다. 당장 쓰로누스 하나에 힘들어하고 있는데 그 이상에 닿을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김현성은 새로운 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더 성장시켜야 돼. 더. 더 강해져야 돼.’
어떻게?
1회 차에 이미 시나리오를 만들어 놨었다는 걸 알고 있다. 누구를 이용해야 할지 무척 뻔하지 않은가.
“알콜 중독 비둘기.”
1회 차의 이기영은 녀석을 이용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녀석이 깔아놓은 또 하나의 안배가 바로 쓰로누스다.
‘저 비둘기는 나를 못 죽여.’
녀석에게 이쪽의 이름을 알려준 것부터가 이용하라고 던져놓은 것이 맞다.
이를테면 갑작스레 공짜 말이 생긴 상황이다. 체스를 두고 있는 도중, 누군가가 쓰라고 퀸을 하나 더 던져준 것이나 진배없다. 혹시나 내가 눈치채지 못할까 친절하게 1회 차를 통해 알려주기까지 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 비둘기는….
4성 김현성을 5성 김현성으로 각성시키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바뀌기 전의 시나리오가 어떤 거였을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이건 이용하는 것이 맞다.
열심히 맞고 있는 김현성을 바라보기가 굉장히 가슴이 아프다.
‘시바 우리 현성이 좀 그만 때려라 이 악마 새끼야.’
대륙의 영웅의 귀한 몸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진짜.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제길….
-말하지 않았나. 너는 약해졌다.
-그럴 리가 없어.
-…….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약해졌을 리가 없어. 나는… 나는 더 강해졌다.
-…….
-나는 더 강해졌어! 지켜야 하는 것을 위해. 나는 더 강해지는 것을 선택했고 그렇게 이 힘을 얻었다 나는 강해져야 해. 더. 더 강해져야 해. 더. 더. 더. 그래야 지킬 수 있어. 그래야….
-무엇을.
-네가 알 필요는 없다. 쓰로누스. 중요한 것은 내가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뿐이야. 나는 항상 서 있어야 한다. 그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해. 더 이상… 더 이상 짐이 될 수는 없어. 그래.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할 수 있다.
‘우리 현성이 멘탈 나갔다.’
이쯤 되면 굳이 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다. 더 냉정해야 할 사람이 냉정을 잃었다.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도대체 무엇이 녀석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김현성이 쓰로누스라는 벽을 넘지 못하는 건 이미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
‘나가야 되나?’
새로운 자극을 줘야 하나. 조금 더 궁지에 몰리면 새로운 힘을 깨닫게 될까?
어쩌면 지금이 김현성이 나를 찌르는 타이밍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완전히 타이밍이 다르다.
내가 봤던 풍경과 유사한 점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지금은 현성이의 텐션을 한 번 더 끌어올려야 하는 시점이다.
‘지혜 누나도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고….’
점차적으로 전장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상황실을 잠깐 비우는 게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망원경으로 전장을 내려다보고 퀘스트로 지시를 내릴 수 있으니 크게 의미는 없다.
소외된 구역의 몇몇 인간들이 혼란을 겪을 수도 있겠지만 녀석들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김현성이다.
‘이건 가야 돼.’
김현성은 한 번 더 계단을 올라설 수 있다. 조금 더 강해질 수 있다.
마침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으니 날아간다면 충분히 닿을 수 있다. 문을 박차고 나가니 거대한 폭음과 함성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명예추기경님. 여기는 위험합니다. 상황실 안으로….”
“방어선은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버티는 것에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시간이 길어진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 이거지? 이미 알고 있어.’
“잠깐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최대한 현 상태 그대로 전장을 유지합니다.”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커다란 날개를 편 나를 바라보는 야전지휘관 1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망원경으로 보이는 김현성은 여전히 밀리고 있는 모습, 발악을 하듯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쓰로누스는 너무나도 쉽게 김현성의 압박을 벗겨내고 있었다.
‘시간의 맞출 수 있나?’
빛의 날개를 움직이자 어설프게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제기랄… 제기랄!!
-추하군.
-제길!
-…….
-죽어! 죽으라고!
-…….
-절대로 질 수 없어. 절대로.
이렇게까지 무력한 김현성의 모습을 보는 건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까지 밀리나? 이게 말이 돼?’
차라리 루시퍼의 힘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제대로 싸울 수 있지 않았을까.
쓰로누스가 이야기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저 힘에 의지하고 있는 거야.’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다.
김현성 본인이 가지고 있는 힘보다 받은 힘에 더 의지하고 있는 모습,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진작에 멘탈 클리닉을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이겨야 한다고, 질 수 없다고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저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현성이가 희라 누나 성격에 반만 닮았어도….’
하지만 이건 김현성을 비난할 수도 없다. 기영 쌤 역시 잘못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저 강해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그렇게 진행시켰으니 이런 일이 한 번은 있을 만했다.
2회 차 김현성의 성장 과정을 생각해보면 녀석의 자신감이 사라질 만도 하다.
애초부터 의욕이 없어 보이기도 한 것은 물론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지도 잃어버린 것 같다.
노을로 합의를 보기는 했지만 김현성이 싸워야 할 이유를 심어주기에는 미적지근한 감이 있다.
김현성의 마음 한편에서는 함께 노을을 바라보는 것보다 이기영이 온전한 모습 그대로 있어 주는 걸 더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계속된 실패에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 영웅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초라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의 정하얀처럼, 김현성은 눈에 눈물을 머금으며 자기 좋을 대로 검은색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겨우 저것뿐이다. 맞을 리도 없고 견제가 될 리가 없다.
-이거라면… 이 힘이라면….
자세를 잡는 것을 보니 노을빛의 검을 사용하려고 하는 모양, 점점 붉어지는 검신이 보이기는 했지만….
영웅이 자랑하는 노을빛의 검은 녀석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쓰로누스 역시 검을 휘두른다. 밤하늘에 별 무리가 쏟아지는 듯한 검에 김현성의 가슴에서 피가 울컥울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김현성은 쓰러져 있고 쓰로누스는 다시 검을 휘두른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내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자를 보내주십시오.”
시간에 맞게 도착했다. 나는 과장되게 팔과 날개를 뻗으며 쓰러져 있는 김현성과 쓰로누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빛으로 형상화된 날개 덕분인지 내 몸이 빛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
“…….”
“저를 죽이고 이자를 보내주십시오.”
알콜 중독 비둘기가 나를 죽일 리가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희생적인 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