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1화 시나리오(2) >
‘잠깐. 근데 이 새끼 내 얼굴 모르잖아.’
등장은 화려했고 연출도 나쁘지 않았다.
‘이름표라도 붙이고 왔어야 했나?’
빛의 깃털을 떨어뜨리며 천천히 둘 사이를 가로막은 모습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너무나도 성스럽다.
내가 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 봐도 신성한 기운이 흘러넘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툭 치면 곧바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은 여리여리한 육신이 새하얀 빛에 감싸여 있으니,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을 것이다.
표정은 최대한 피해자처럼.
일단은 무조건 불쌍해 보이는 게 정답이다.
아니, 너무 약하게만 보이면 안 되지. 대륙의 영웅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듯, 나는 절대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듯한 강렬한 눈빛도 함께 전해야 한다.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전형적인 희생자의 모습이었다. 앞서 말했듯, 문제는 쓰로누스가 내 얼굴을 모르고 있다는 것 하나였다. 기왕이면 김현성이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기영 씨!’
라고 한마디만 해줘도 살짝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거 이 타이밍에 추하게 자기소개라도 해야 되나?’
쓰러져 있는 김현성은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
입을 뗄 정신이 없어 보일뿐더러 완벽하게 깨진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버버거리며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 다른 반응이 없다.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는 아주 약간의 시간이 더 걸리지 않을까.
‘시바, 곧바로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안 찌를 거지? 우리 딱 봐도 동족처럼 생겼잖아. 종류가 조금 다르기는 한데 너도 날개 있고 나도 날개 있으니까 우리 동료잖아. 그렇지? 나 죽이는 거 아니지?’
검을 들어 올리려는 리액션이 보이면 일단 무조건 자기소개부터 하자.
아주 잠깐이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 이름을 부르는 김현성의 목소리가 아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쓰로누스였다.
“…….”
“…….”
“이… 기영?”
‘이 새끼 어떻게 알았지?’
“이… 이기영?”
‘기가 막히네. 진짜.’
“네가….”
‘…….’
“네가 이기영이구나. 네가… 네가 이기영이었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알콜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마치 알콜 중독자가 오랜만에 술을 바라봤을 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고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다.
“추한 모습이 아니지 않느냐.”
금단현상이라도 찾아온 것인지 몸도 떨리고 있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죽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고결한 모습이다.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얼굴이야.”
그렇게 평가해 주니 고맙기는 하다. 이기영이 조명발은 조금 받으니까.
“타락한 자들 사이에서도 빛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본질은… 본질은 바꿀 수 없었던 거야.”
조금 기뻐 보인다.
“세라핌. 이 모습을 보고 있나? 그자야. 내 이야기가 맞았다. 이 인간의 모습을 봐. 이 자는 빛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오히려 그 여리고 작은 빛을 가슴 속에서 계속해서 키워오고 있었다. 하… 하하…. 이렇게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어떻게 그 상황에서도 본인의 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울 수 있었을까.”
비록 베니고어가 내린 힘이겠지만 빛의 날개라는 건 녀석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양.
확실히 이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됐구나. 드디어. 네 말대로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네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말이다.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되뇌고 있었던 말은 많다만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친우, 내 이해자. 너를 구하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있다. 자, 내 손을 잡거라. 인간, 아니, 이기영. 네 뒤에 있는 악마는 네 적이다. 네가 목숨을 걸 정도로 가치 있는 자가 아니야. 그자를 죽이고 너를 해방시키겠다.”
‘아니, 시바. 너 내 말 못 들었어? 현성이 죽이지 말라고 이 새끼야.’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보자. 혹시나 이 새끼가 나를 피해 김현성을 찌를 수도 있으니 몸으로 막을 준비를 하자.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이후에는 곧바로 김현성에게 몸을 가까이 붙이기 시작했다.
나를 찌르지 않고서는 김현성을 공격할 수 없을 거라는 걸 확실히 말해두자.
절대로 내 신념을 꺾을 수는 없다는 듯, 절대로 빛은 꺼지지 않는다고 외치자.
‘시바 멋있다. 진짜 내가 다 내 모습에 취하겠다. 진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
“너무 걱정하지 마라. 어렵겠지만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사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이 더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세라핌도 케루빔도 도미니온스도 너를 기다리고 있고 결국에는 환영할 거다.”
‘이 새끼 너무 친한 척하는 데… 현성아 전부 듣고 있는 건 아니지?’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정신이 없는 것 같다. 아마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 않을까.
숨을 헐떡이면서도 내 소매를 꽉 붙잡고 있는 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입술을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을 보니 내가 왔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뭘 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해석해 보면 아마….
도망쳐.
‘형 도망 안 친다. 현성아.’
소중한 대륙의 영웅을 두고 꼴사납게 도망칠 리가 없지 않은가.
“네가 지키려고 하는 자의 모습을 다시 한번 내려다….”
“이미 보고 있습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의 모습이다. 그는 기만자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위험해.”
“위험하지 않습니다.”
“더러운 모습….”
“더럽지 않아요. 절대로 더러운 모습이 아닙니다.”
‘현성아. 시바. 듣고 있지? 형 목소리 들리고 있지? 듣고 있는 거지?’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이야기해 주자.
“더러운 모습이 아니에요.”
3번 이야기했다. 입 모양도 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배려까지 해줬으니 듣지 못할 리가 없다.
“어째서 당신이 저를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겉모습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 어딜 시바. 누가 김현성을 추하다고 욕할 수 있겠어?’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했고 소중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잃었어야 했다. 원치 않은 회귀를 해야 했고 혼자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가면의 구세주만큼 녀석도, 김현성도 괴로웠을 것이다.
커다란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부담감, 운명에 거스를 수 없다는 압박감, 다시 한번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모여서 만든 결정체가 바로 둠현성이다.
실제로 김현성의 겉모습이 빛과 조금 멀어졌다고 한들 영웅 김현성은 변하지 않는다.
“악마의 탈을 쓴 것은 당신들입니다. 저는 이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어요.”
‘현성아. 형이 말하는 거 들었지? 나중에 찌를 때 안 아프게 찔러줘야 된다. 살살 찔러줘야 되는 거야.’
별것 아닌 발언이었지만 욜라 감동적인 발언이었다. 김현성의 입장에서 이 말이 얼마나 달달하게 들릴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건 진짜 장담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고, 본인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있었던 타이밍, 형제 같은 사람이 너는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큼 안심되는 말이 어디 있을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아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김현성이 내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얼굴은 예상했던 그대로.
‘야… 시바 너 왜 울어.’
아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참신한 반응이었다.
‘너 왜 울어.’
그렇게나 위안이 됐을까.
제대로 말도 내뱉지 못하는 상태로 쓰러져 있는 와중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스스로 닦을 수도 없는 것을 보니 내부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은 모양. 루시퍼의 힘을 있는 대로 사용했으니 내부가 엉망일 가능성도 있다.
한 번 몸 상태를 체크해 보고 싶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다.
그 와중에 전방에 위치한 쓰로누스는 복잡한 표정이다.
“네가…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조금이라도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다면 아마 곧 공감할 수 있을 거다.”
“…….”
“너는 지금 그 기만자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모두를 속이는 악인이야. 네 말대로 그의 본 모습이 저게 아니라 한들, 그는 이미 빛을 등진 사람이다. 믿을 수 있는 이가 아니야. 어서… 비키….”
‘아니, 시바. 나 절대 안 비켜. 차라리 죽여. 죽일 수 있으면 시바 죽여봐. 아니, 그전에 현성이 일어날 거야.’
붙잡고 있는 소매에 힘이 실리는 것이 느껴진다. 녀석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김현성의 몸은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일어나려고 하는 거야.’
루시퍼의 힘을 벗겨내고 진정한 자신의 힘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4성 김현성이 5성 김현성으로 진화할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내면의 자신과 대화를 한 번 나눴을 테니 이제 몸을 일으킬 타이밍인 건가.
초심으로 돌아가 김현성 본연의 모습을 찾는 걸까?
‘더 강해질 수 있는 거지? 시바, 현성아. 빨리 일어나. 형 무릎 아파.’
날개가 꿈틀거리고 있다. 고통을 딛고 일어나는 영웅의 모습에 기대감이 생긴 것은 당연지사.
조금 더 빨리 일어나라고 닦달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지금의 포지션을 유지하는 게 최우선이다. 김현성한테 용기나 줘야지.
“할 수 있을 거예요.”
‘현성아.’
“언제나처럼 이겨내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형도 눈물 한 발 장전했다.’
“계속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형 죽음 각오했잖아. 죽음 각오한 거 보이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해요.”
‘형 진짜 죽기 전에 일어나라. 일어나서 각성해야지.’
“현성 씨는 잘 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남은 이들을 잘 부탁합니다.”
쓰로누스는 나를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일단 녀석이 나를 죽이는 걸 기정사실로 만들어 보자.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 비둘기의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올 리가 없지 않은가.
쓰로누스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인다. 김현성이 몸을 일으킬 거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용서하거라.”
김현성의 앞을 막고 있는 나를 제압하는 것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것 같다.
잠깐 동안은 시간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녀석은 너무나도 쉽게 내 손을 잡아 들어 올린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젠틀한 움직임이었지만, 일단은 아픈 척 비명을 내질러 보자.
“아아아아아악!”
‘현성아. 이제. 시바 형 죽는다. 지금 보고 있지? 이 새끼가 형 죽이려고 그래. 시바. 빨리 일어나.’
“흐으윽….”
‘비둘기가 사람 잡는다. 형 이제 간다. 진짜 죽이려는 것 같아. 방금 팔 부러질 뻔했어. 안 일어나고 뭐 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까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르면서 김현성을 바라보자 충혈된 눈과 입술을 깨물고 있는 입이 보인다.
안 그래도 붉은 눈이 더 붉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 새끼 일어나겠는데?’
“흐으윽… 제발….”
‘일어나, 시바. 각성해. 시바.’
“…놔.”
‘각성! 그리고 각성! 또 각성!’
“그… 그 손 놔!!”
몸을 일으킨 것은 우리 자랑스러운 회귀자. 곧바로 쓰로누스의 안면에 주먹을 내지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방금과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과 마력.
‘각성한 거야….’
5성을 찍은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이겨낸 거라고!’
문제가 있다면….
‘뭐야… 시바 머리에 뿔은 왜 돋아났어? 아니… 뭐야. 피부는 왜 그래. 아니… 아니, 팔은 또 왜 저래… 왜… 얼굴은… 왜 그래….’
전혀 다른 쪽으로의 각성이라는 것.
‘으아아….’
김현성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