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718화 (709/1,590)

< 718화 알프스(3) >

성검의 선택을 받은 회색빛의 용사.

‘라파엘.’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자신 역시 성검의 선택을 받기 위해 열심히 뛰어오지 않았던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지만 막연한 질투심과 동경을 가지게 하는 이름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성검을 처음 잡았을 때의 그 감각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을 파고드는 거대한 악의와 어둠, 빛이니 어둠이니 그런 것을 잘 구분할 수 없을 때였지만 구더기가 피부를 뚫고 들어와 내장을 헤집는 것 같은 감각은….

‘다시는 느끼기 싫은 감각이야.’

그 말 그대로였다.

자신은 견뎌내지 못한 시련을 견뎌낸 용사에게 어떻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방에 들어오기 직전에 열렸던 창문, 먼저 와 있던 손님이 누구였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구태여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가 먼저 다녀간 것이 아닐까. 지금 향하고 있는 곳에 틀림없이 회색빛의 용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제대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것 같은 파티원들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이쪽 역시 긴장되기는 마찬가지, 현재 이곳이 위험지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폐허가 된 지역이기도 했고 이미 심하게 오염된 지역이기도 했다.

정화가 되지 않은 타락한 땅처럼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악취 때문에 눈을 찌푸리게 된다.

성검의 시련을 받았을 때 느낀 적이 있었던 감각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분노와 후회, 절망과 두려움,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얼룩진 어둠.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자리한 장소의 느낌이 그랬다.

최대한 소음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괜스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길드마스터가… 살아 계시는 건가요?”

“사실….”

“네.”

“몸의 기능은 완전히 정지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완전히 멈춰 있어서… 의학적으로는 완전히 사망한 상태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럼….”

“하지만 몸에 마력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아시다시피 죽은 사람의 몸에는….”

“아! 마력이 흐를 수 없죠.”

“저희가 처음 길드 마스터를 발견했을 당시에는 한 줌의 마력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약 세 시간 뒤에는… 마력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호흡이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요. 지금 이 땅이 오염된 것은….”

“길드마스터 안에 있는 마력 때문이군요.”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그녀로서도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력이 흐르고 있다고 말을 해오기는 했지만 그 힘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확히 규모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의 한 도시를 뒤덮고도 남을 범위가 썩어가고 있다.

환경이 변해버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길드마스터가 타락한 상태로 숨을 거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살아계신 게 맞는 걸까?’

만약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이전의 길드 마스터일까? 이미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은 아닐까.

아니, 정말로 길드 마스터가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손을 뻗는 게 이로운 행동일까.

어째서 이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니고어 교단을 비롯한 교단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잠자코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악마를 되살리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어.’

물론 쓸데없는 걱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짐승의 형상을 한 것의 모습을 두 눈에 담은 순간, 앞 전에 했던 생각을 돌이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형태였다. 어릴 때 묘사로 접해왔던 악마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거대한 뿔은 흉측하고 불길했고, 등 뒤에 있는 날개는 기묘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이전에 봐왔던 길드마스터의 모습은 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겉모습보다도 더 눈에 띄는 것은 길드마스터의 몸에 새겨진 상처.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고 숨을 참게 될 정도의 악취, 이미 저 신체는 썩어가고 있었다.

그게 눈으로도 보인다. 움직일 수 있을지 의심이 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모습이다.

온몸에 검이 박힌 자국들로 가득했고, 이상하게 뒤틀린 모습은 죽음의 과정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살아날 수 있는 거야?’

주변은 굳어 있는 혈액으로 가득하다.

손을 대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미 몸이 완전히 굳어 있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참상을 목도했기 때문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어째서.

어째서 조혜진 님께서 함께 가자고 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걸….’

이런 걸 어떻게 볼 수 있겠어.

이런 참상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 모습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할 수 있을까.

살짝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니 뭐라 형용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는 조혜진 님이 시야에 비친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 같다. 살짝 손을 잡으니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처음 봤을 때는 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네. 많이 좋아졌어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용사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성검, 그리고 금발의 머리. 베니고어 님께 선택을 받은 회색빛의 용사.

라파엘이었다.

“오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조혜진 님. 아, 이쪽은… 그러니까. 알프스 님이시죠?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이에요. 라파엘 님. 깨어나신 걸 알았다면 인사라도 드리러 갔을 텐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도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이곳으로 향했던 터라… 형이 저를 찾는 목소리를 들었거든요.”

“형이요?”

“네. 파란 부길드마스터님이라고 하면….”

“아.”

“갑작스럽게 메시지를 받았어요. 이 사람을 살려달라고, 너라면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메시지요.”

“그건….”

“어떻습니까? 라파엘 님. 그 뒤로는….”

“그 뒤로는 다른 메시지를 받진 못했어요. 깨어난 직후에 단 한 번이었고요. 어떻게 움직이는 게 좋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답은 받지 못했지만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물론 제가 지금 옳은 일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주어진 일이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길드마스터의 상태는….”

“보시는 그대로예요. 회색빛이 보내는 신성력에 상처가 메워지고 있어요. 일반적인 신성력처럼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아 다행이지만….”

“그거라도 된다면 다행입니다.”

“네, 다행이죠….”

회색빛의 용사 외에도 다른 이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저 사람이 아마… 사냥개 이주혁. 신성력으로 주변에 세이프티 존을 만들어 놓은 이가….

‘기적의 사제 마리엔.’

그 외에도 익숙한 얼굴들이 몇몇 있다. 성검용사 파티라고 불렸던 이들이다. 모두가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길드에 자주 얼굴을 비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붉은 용병의 최영기… 그리고….

‘검은백조 길드 마스터?’

조혜진 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가 극도로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박연주 님과 성검용사 파티, 붉은용병의 최영기를 비롯한 강자들 모두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다.

눈앞에 있는 길드 마스터 때문이 아니다. 언제든지 적들이 쳐들어올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얼마나 걸었지?’

정확히 여기가 어디지.

언제든지 적이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다. 안개로 뒤덮여 있지만 이곳에 성벽은 없다. 마법과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세이프티 존은 적들의 공격을 막아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지 않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이 이곳에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거구나.’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 때문인지 괜스레 손아귀가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도 괜스레 불길하게 느껴진다.

“끼잉.”

흰둥이가 낑낑거리며 멀리 떨어진 곳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흰둥이의 시선을 따라가자….

“어….”

가면을 쓴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어?”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다. 정말로 내가 본 게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잘못 본 게 아닐까? 잠깐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그곳을 바라봤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뿌연 안개뿐이다.

‘잘못 본 건가?’

그래도 한번 조사를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

어째서 빤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끼잉….”

가까운 곳에 있는 모험가에게 막 입을 떼려고 하던 찰나였다.

“전투 준비!”

“…….”

“전 부대원은 전투 준비한다!”

“왕! 왕!”

“흰둥아!”

어디에선가 폭음이 들려온 것.

“마법사들은 준비한 마법 캐스팅해!”

“위치가 발각됐다. 지원 요청. 적의 숫자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음.”

“매뉴얼대로 움직인다.”

공기가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여기저기서 마법사들이 주문을 영창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주변이 무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자신 역시 다급하게 허리에 달린 검을 뽑게 된다.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 하나가 안개를 뚫고 창을 뻗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피할 수 있어.’

긴장감에 몸이 살짝 굳었지만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왕!”

하는 소리가 들리자 몸에 활력이 돋는 것이 느껴진다. 움직임은 더 빨라졌고 힘은 더 강해졌다. 검을 정확히 심장으로 뻗었지만 턱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붙잡힌다.

“아!”

잠깐 당황했을 때 이쪽을 구해준 것은 안개를 뚫고 들어온 한 자루의 창. 정확히 천사의 목을 꿰뚫은 창날이 눈에 보였다.

“안전한 곳으로.”

“아… 아니요. 저도 싸울 수 있어요.”

“…….”

“싸울 수 있어요.”

“…….”

“그럼 곧바로 부대에 합류….”

“네.”

다시 한번 안개 속으로 몸을 던지는 조혜진 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갈색의 머리를 길게 땋은 천사에게 창을 뻗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콰아아아아아앙!!

“흰둥아! 가자!”

“왕!”

어떤 식으로 전투를 풀어나가야 할지는 알고 있다. 수많은 훈련을 거쳤으니까.

매뉴얼도 머릿속에 있다. 이로운 효과를 파티원들에게 끊기지 않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

흰둥이가 주는 버프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넓은 곳으로 움직여야 한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차단되어 있으니까.’

피아 구분이 힘들고 정확한 위치도 찾기 어렵다. 아군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적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흰둥이라면 구별할 수 있어.’

냄새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라면 효과가 없겠지만 이런 중소규모에 게릴라 전투에서는 자신의 능력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흰둥이 역시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뛰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주변의 지형을 기억해야 한다. 나중에 전부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니까.

거침없이 달려나가던 흰둥이가 움직임을 멈춘 것은 바로 그때.

“왕!”

“여기는 어디야? 도, 도착했어?”

“왕! 왕!”

눈앞에 보인 것은 가면을 쓴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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