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알프스(4) >
‘제기랄….’
언제나 전투는 갑작스럽다.
‘들어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갑작스럽게 일이 터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퇴각 명령은 없는 건가?’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물론 이 장소를 사수하려고 하는 이유 정도는 알고 있다.
“노을빛의 검사.”
악마에 의해 타락해 숨이 끊어진 영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말 그대로 숨이 끊어진 영웅의 시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다시 한번 싸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헛웃음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술적 가치가 없는 지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병력을 뒤로 물린다면 충분히 전선을 유지할 수 있다.
굳이 이 장소에서 적들과 부딪쳐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손해가 막심하지 않을까. 대륙의 기준으로 네임드라고 판단하고 있는 상위 모험가들 다수를 잃을 수는 없지 않은가.
노을빛의 검사는….
“살아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잖아.”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자욱한 안개를 뚫고 들어오는 썩은 냄새 때문에 제대로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어떻게 영웅이 되살아날 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가 있겠는가.
지휘부에게 항상 지지를 보내고 있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이 판단이 맞는 건지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지휘부에서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닐까. 이기영 대륙 보호 관리 위원장을 잃은 현재의 머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몸을 빼라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본격적인 전투를 위한 명령이 떨어진다.
“제기랄 안개 때문에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
“싸우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싸운다.”
“본대 쪽으로 이동하는 거요?”
“아니. 우리 파티는 본대와 합류하지 않는다.”
“뒈지기 딱 좋네. 칼 밥 먹고 사는 입장에서 언제든지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어서지도 못하는 시체를 지키기 위해 죽는 건 사양이었다고. 대장.”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명령이 떨어지면 수행하는 것. 그게 우리 임무다. 다른 말은 필요 없어.”
“지금의 지휘부를 믿을 수 있다고?”
“…….”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하는 소리라고. 회색빛의 용사와 검은백조 길드 마스터, 그리고 파란 길드마스터 대리도 있지. 내로라하는 대륙의 네임드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이런 곳에서 개죽음당할 사람들이 아니야.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믿는 수밖에 없다.”
“누구를.”
“명예추기경.”
“…….”
“…….”
“회색빛의 용사가 명예추기경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었다. 간부들은 알고 있는 이야기야.”
“…….”
“그게 정말이요?”
“그래. 그러니 믿고 싸운다. 그분을 믿지 않으면 더 이상 대륙에 희망 따위는 없어.”
“…….”
“파티원들은 전투 준비. 진입한다.”
만약 정말로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이건 할 수밖에 없잖아.’
명예추기경의 말이라면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말이 거짓일 가능성도 있다. 어째서 지휘부에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인지 이해가 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륙의 성자, 베니고어의 아들, 빛의 수호자,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목소리를 믿는 것이다.
괜스레 투구를 매만지며 방패를 고쳐 잡았을 때였다.
“전투준비!”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
“화살!”
“쏘지 마! 쏘지 마! 아군이다. 아군이야!”
“멈춰! 제기랄!”
안개를 뚫고 나온 인형은 작은 키의 여자였다. 본적이 있다.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알프스?”
파란길드에 가입한 신입 길드원.
성검 후보자로 이름을 알린 모험가였고 테이머라는 직업을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본인이 테이머라는 것을 증명하듯 옆에 강아지와 함께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파란 길드라고는 해도 신입은 신입, 갑작스러운 전투에 겁을 집어먹고 전장에서 이탈했을 가능성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겁을 집어먹은 얼굴은 아니다. 얼굴에 공포심은 없다.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당신은….”
“도와주세요.”
“네?”
“길드마스터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해요. 도와주세요.”
“지금 무슨….”
“자세히 말씀드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요. 하지만 지금 가야 해요.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대장?”
“…….”
“부탁드려요.”
“대장?”
“임무를 변경한다. 지금부터 파란길드의 신입을 포인트로 데려간다. 최대한 빠르게.”
“그래도 되는 거… 젠장. 갑시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이유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충분하군.”
누구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장을 비롯한 파티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 역시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눈동자에 확신이 보였던 탓이다.
“움직인다.”
안개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렵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전장이라 난관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길은 제가 안내할게요.”
뛰어나가는 강아지를 보고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파란 길드는 파란 길드라는 건가?’
잠깐이나마 그녀를 애송이로 판단했다는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검을 들고 뛰쳐나가는 모습에 망설임은 없었다.
강아지를 따라간다는 게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눈앞에 있는 신입은 포인트까지 닿을 장소를 확실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전투는 많아야 두 번이에요.”
“확인했다. 전투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30초 뒤에요. 앞쪽에서 접근하고 있어요.”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도대체 파란 길드에서는 신입 길드원을 어떻게 교육시키는 거지?’
엄밀히 말해 노련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강해.’
단순히 무력의 의미가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강하고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제대로 알고 있다.
보통의 뉴비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누구나 그렇다. 자신 역시 그랬다.
뉴비들은 흥분하거나 긴장하거나 둘 중 하나다. 전투에 취해 제대로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여유 같은 건 없다.
혹은 너무 떨어 1인분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현재의 길드들이 경력 있는 신입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러한 이유가 아니었던가.
최소 10번 이상의 원정을 마쳐야 비로소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파티에 녹아들 수 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애송이는….
‘정말 애송이가 맞는 건가?’
침착하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고 있고, 본인의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미 파티와 완전히 녹아들고 있다.
적들만 살피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파티를 둘러보고 있다. 현재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기회가 나면 곧바로 검을 뽑고 달려들어 가고 방해가 될 것 같으면 움직임을 보조한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왕!”
사제를 방불케 하는 버프. 더 민첩해지고 더 강해진다.
“조심!”
“고… 고맙다.”
“아니에요. 다음은 피해 갈게요. 왼쪽으로 돌아갈게요.”
“파란의 신입을 중심으로.”
“확인했습니다. 대장.”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고 있으니 파티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점점 목표와 근접하고 있다는 것.
난전이 된 전장에서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방팔방에서 굉음과 폭음이 들려오는 와중에도 이상하리만큼 이 파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방패 들어욧!”
“방패! 방패!”
거대한 빛이 떨어지면 곧바로 모여 방진을 구성하고.
“전진! 전진! 얼마 안 남았어요! 전진! 움직여요!”
“알겠다.”
“앞에 셋 있어요! 전투….”
“2번대가 마크한다. 1번대는 계속 전진해!”
“확인!”
“살아남아라! 새끼들아!”
“뭔 난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잘 다녀와라! 새끼들아!”
파티를 분리해 나아가기도 한다. 상위 모험가에 이름표를 올린 이후로 숨이 찬다고 느낀 적은 많지 않았지만 체력적으로도 점점 한계에 다다른 시점.
“으아아아아!”
“전진! 전진! 움직여! 시발! 움직여! 멈추지 마! 멈추지 말고 움직여!”
“대장! 지원 요청은 하고 있어?”
“붉은 용병이 길을 열어줄 거다. 애송이?”
“왕!”
“확인됐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곧바로 달려나가는 파란길드 신입의 두 손에는 희미한 빛이 서려 있다.
저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들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붉은 용병 길드가 열어준 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쓰러진 영웅이다.
“방패 들어! 버텨! 버틴다! 무조건 버텨!”
“물러서지 마! 새끼들아! 버텨!”
“아아아아아아아악!”
“위치 사수해! 위치 사수해!”
계속해서 떨어지는 이질적인 빛을 방패로 받아내는 와중에도 시선은 후방에 고정된다.
안개가 점점 걷히며 현재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에 보인다.
노을빛의 영웅을 중심으로 완전히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이거 전부 다 뒈지는 건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새끼야! 버텨! 일어날 거다! 일어날 거야!”
‘일어나?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파란 길드의 신입이 노을빛의 검사에게 손을 가져다 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일… 일….”
“…….”
“일어나라!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버텨! 새끼들아! 뒤쪽 신경 쓰지 말고 버티라고!”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뒤에서 지금….”
“신경 쓰지 말고 버티라고! 저쪽에는 못 닿게 해! 마법사들은 방어 마법 계속 유지해! 새끼들아! 유지해!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유지해! 새끼들아!”
‘제기랄 진짜 다 죽는 건가?’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파란 길드의 신입이 갑자기 무슨 주문을 외우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저게 일어나지 않으면 여기 있는 이들은 몰살이다. 전멸이다. 대륙의 희망은 없어질 거다.
“일어나! 제기랄! 일어나! 노을빛의 검사!”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게… 흐윽… 네게 미래를 선물할지니!”
“일어나아!!”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일어나거라! 알타누스으… 흐윽… 영웅이여!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일어나거라! 영웅이여! 그리하면… 그리하면 그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제기랄… 제길!”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일어나 네 미래를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라! 일어나라!!”
반응이 없다. 파란길드의 애송이가 계속해서 희미한 빛을 노을빛의 검사에게 전달하며 절규하듯 외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이제 끝인가?’
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다.
* * *
“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