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0화 믿고 있었다고(1) >
“일어날 수 있을 거야.”
‘무조건 일어나야지.’
-버텨! 새끼들아! 위치 사수해!
상황은 최악이라고 할 만했다. 누가 보기에도 인류에게 희망은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다.
-일어나라! 알타누스의 영웅이여! 그리하면 내가 네게 미래를 선물할 것이다!
완전히 포위된 형국에서 천천히 좁혀오는 천사들과 그들에게 저항하고 있는 인류는 눈물이 다 나올 정도로 숭고하지 않은가.
영웅의 귀환으로 이것보다 적절한 타이밍이 있을 리가 없다. 계기도 있었고 준비도 충분했다. 불안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바 불안요소는 무슨 불안요소야. 안 일어나면 끝이야.’
퀘스트를 계속해서 보내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알프스가 와주지 않았다면 김현성에게 퀘스트를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놈은 분명히 목소리에 반응하고 있다. 계속해서 요동치는 마력이 그 증거였다. 분명히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영차, 영차를 외치고 싶었지만 그런 농담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스스로가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일어나지 않으면 끝이다. 내 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던져본 주사위였다.
‘아냐. 그런 가정은 하지 말자. 분명히 일어날 테니까.’
깨어날 것이다. 미래는 변하지 않았다. 카스가노 유노는 아직도 미래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같은 그림을 보고 있었고 그것은 즉 김현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이라는 걸 의미한다.
김현성은 다시 부활해 이기영의 배때기에 칼을 쑤셔 박을 거고 종국에는 엔딩에 함께 남을 거다.
‘가자. 현성아. 가자! 제발. 제발.’
지금 일어나야 돼.
병력들이 점점 뒤섞이고 있다. 마법사들은 마력이 떨어져 가고 있고 사제들의 신성력이 남아 있지 않다.
병사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이 보인다. 더 이상 희망은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이곳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자들의 마지막 저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알프스가 메시지를 밀어 넣으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던 바로 그때였다.
‘저거.’
어떤 기적 같은 임팩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늘에서 회색빛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녀석을 중심으로 뭔가 다른 효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고요하다.
방금 전까지 시끄러웠던 전장이 무척 고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기가 가라앉고 김현성을 중심으로 한 안개가 옅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 아….
가장 먼저 이상을 느낀 것은 김현성의 옆에 자리해 있었던 파란길드의 신입 길드원.
-아….
김현성의 몸이 꿈틀거리는 걸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멈칫 날개를 털어내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오랜 시간 동면해 있었던 짐승처럼 검은색 형태의 영웅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인다.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비상식적인 광경처럼 보인다. 절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모습이었다.
심지어 지금도 움직이고 있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보여지는 광경이 비상식적이다.
‘정말로 살아났어?’
믿고 있었다고. 젠장.
고래고래 일어나라 소리를 질렀던 주위 역시 조용해지기는 마찬가지.
방패로 쏟아지는 공격을 막고 있는 이도,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 보내고 있었던 궁수도, 캐스팅을 외우고 있었던 마법사도, 하나둘 뒤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두 상위에 자리를 잡은 모험가들이다. 뭔가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인지하지 못할 리가 없다.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무언가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 걸 바라보고 있다.
대열을 유지하고 있던 병사 하나가 눈을 비비며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진짜로… 진짜로 되살아났어.
-정말로 되살아났다고… 하… 하핫.
-길, 길드… 마스터?
-노을빛의 검사다. 노을빛의 검사가 부활했어. 믿고 있었다고 젠장!
‘뭘 믿어. 이 새끼들아.’
분명히 절망으로 물들어가던 얼굴을 하고 있던 놈이 그 명대사를 외치는 것을 보니 당황스럽다.
하지만 나 역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야말로 김현성을 믿고 있었다. 이대로 뒈지지 않을 거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길드마스터….
김현성은 주변을 둘러본다. 아주 작은 고갯짓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이내 그가 시선을 멈춘 곳은 알프스 쪽. 아직 가면이 부서진 것은 아니다.
알프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환희를 느꼈던 것도 잠시뿐이지 않을까.
어마어마한 악의와 타락한 마력, 상위에 랭크된 모험가조차 꺼리는 기운을 가장 가까이서 받아냈으니 저절로 몸이 떨리는 것이 분명하리라.
하지만 그것 역시 곧 사라지기 시작한다. 김현성은 알프스에게 적의를 보내지 않고 있다.
-…….
녀석은 몸을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다소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
-우….
그리고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직 이성이 없는 건가?’
아니, 완전히 이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현성은 주변의 인간들에게 적의를 보내지 않고 있다. 최소한 피아 구분은 할 수 있는 상태까지 간 것이 틀림없다.
뭐가 김현성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미… 미래.
어눌한 발음, 완전히 갈라진 목소리, 무슨 뜻인지 알고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녀석은 똑똑히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래 현성아. 시바. 그거야. 미래. 미래라고.’
-미래.
‘미래로 가자. 미래로 가는 거야. 알프스야 뭐하니 한마디 거들어야지.’
-네… 네. 길드마스터. 나아갈 수 있어요.
-미래… 미… 미래.
-네. 흐윽… 네. 미래예요. 미래요.
-미래….
김현성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도 입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도미니온스 귀환해. 병력을 뒤로 물린다.”
조혜진과 몸을 부딪치고 있는 도미니온스에게는 메시지를 보내놓자. 외신 측의 입장에서는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게 최선이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중한 날개를 펼쳐 순식간에 쏘아져 나간다.
손톱을 한 번 휘두르자 인류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의 몸이 찢겨 나간다.
-…….
소리 없는 절규를 내보내며 계속해서 하얀색 날개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몸을 찢어발기고 있다.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고 숭고한 순간이어야 했다. 하지만 김현성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조금 비참하게 보이기도 했다.
물론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의 눈에는 김현성이 어딘가의 신으로 보일 것이다.
형태가 어떻든, 뿜어내는 기운이 어떻든 간에, 녀석은 영웅이었으니까. 주관적인 렌즈를 빼고 보면 녀석의 등장은 충분히 히어로다웠다.
-저게….
-믿겨지지 않는군. 다 쓸어버려라. 그래. 하핫.
-노을빛의 검사.
-정말로 부활했어. 정말로… 부활한 거야. 하하하하핫! 살았어! 시발 살았다고!
-아직… 아직 희망이 있는 건가. 베니고어 님께서는 아직 우리를 버리시지 않은 건가.
-명예추기경님의 예언 그대로다. 신의 아들의 말대로야.
순수한 무력에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는 이들도, 이상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이들도, 당장은 김현성에게 환호를 보낸다.
죽음에서 돌아온 영웅을 축복하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다. 관계자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다. 갑작스럽게 싸울 상대를 잃은 조혜진은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길드마스터?
김현성이 되살아났다는 걸 느끼기라도 한 건지 허겁지겁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한참을 달리다 이내 격전을 벌이고 있는 김현성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몸을 움직인다.
-길드마스터. 흐윽… 길드마스터.
‘그래, 혜진아. 네가 고생이 많다.’
조혜진은 저 광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기쁠 것이다. 상태가 어찌 됐든 간에 김현성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하나, 그 사실 하나가 지금의 상황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형. 해낸 것 같아요.
열심히 임무를 완수해 준 우리 조연 라파엘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지만 부정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네가 컸지. 진짜.’
김현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퍼즐이었다. 라파엘을 육체를 끊임없이 재생시켰던 회색빛이 김현성의 몸에도 유효하다.
아마 라파엘이 아니었다면 정신이 깨어난다고 하더라고 몸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쟤한테는 나중에 상여금이라도 두둑이 챙겨줘야지.
박연주나, 최영기 같은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저 적들이 실시간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전투가 마무리되는 것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사들은 병력을 뒤로 물리고 있었고 안개가 걷힌다. 천천히 걷히는 안개 사이로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은 빛이 쏟아져 내려온다.
자연이 만든 빛은 가장 타락한 영웅의 모습을 비춘다. 전투를 끝내고 홀로 폐허가 된 공간에 올라 뭔지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타락한 영웅의 모습을 비춘다.
그 모습은 슬퍼 보이기도 했지만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해 보여 나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볼만하네요.”
“왔어?”
“아까 전부터 와 있었어요. 귀환 명령 듣고 바로 움직였죠. 왜요? 내가 너무 빨리 왔나? 조금 더 감상하고 싶어요?”
“아니야.”
“근데… 이거 뭐라고 보고해야 되나?”
“뭐 따로 보고할 내용이 있어? 이건 우리가 낸 사고가 아니라 세라핌이 낸 사고야. 타락한 영웅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건 그 새끼인데 우리가 뭐 책임질 일이 있어? 오히려 좋은 기회지. 물어뜯을 수 있는 거리를 마련한 거니까. 압박하는 건 우리 포지션이지 걔 포지션이 아니야.”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나저나 인간은 신기하다니까. 저렇게 환호를 보낼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혹시라도 김현성이 자기들을 공격하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조금이나마 정신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저쪽의 병력도 반 이상은 사라졌을 거예요. 아니, 정신이 남아 있다고 하기에도 뭣 한가? 지금 저걸 움직이는 건 분노와 적의 같거든.”
“뭐든 상관없어 움직이게 되면 그걸로 땡큐지 뭐. 되돌리는 거야 천천히 생각하면 돼. 오히려 커다란 성과라니까.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퍼즐이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어련하시겠어요? 그래서 그런지 진짜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네요.”
“누구. 나?”
“그럼 누구겠어요? 하긴 나라도 기분 좋겠네. 상장 폐지된 줄 알았던 게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으니 얼마나 기분 좋겠어? 정신 나간 얼굴 하고 있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
“어떻게. 그때는 진짜 대륙이고 나발이고 전부 다 끝내고 손절 하려고 했었던 거 맞아요? 오빠도 참 웃기 다니까.”
“…….”
“어때요? 내가 오길 잘했지? 만약에 안 왔으면 조금 달라졌을까?”
“뭐… 그거야 나도 모르지. 뭐 일어나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그래? 다른 이야기 좀 해봐. 우리 혜진이는 조금 괜찮아 보여?”
“글쎄요.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나도 모르게 꽉 안아주고 싶었다니까. 그냥 눈 한 번 감고 메시지라도 한번 날려 봐요. 아니면 내가 한번 해볼까?”
“안 그래도 의심받을 만한 상황인데, 어떻게 그렇게 해.”
“그건 그렇기는 한데… 에이… 이건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네요. 아무튼 돌아가죠. 너무 늦으면 또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
“…….”
“…….”
“그보다 누나….”
“왜요?”
“계속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뭔데요?”
“그 몸은 어때?”
눈앞에 있는 도미니온스가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끝내주네요.”
정말로 쓰레기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