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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21화 (712/1,590)

< 721화 믿고 있었다고(2) >

‘누나도 참 누나야.’

단언컨대 가장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라 말 할 만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도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지혜는 내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었다.

적어도 튜토리얼에서 나와 파란길드로 향할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마음의 눈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나와는 다르게 이지혜는 정말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로 2회 차를 시작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그때는 몰랐었지.’

지루한 표현이지만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는 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리라.

그 말 그대로, 이지혜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걸 전부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원래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몇 가지 숨기는 게 있기는 했지만 누나 같은 경우에는 정도가 조금 더 심했다.

주사위를 함부로 던지지 않은 것만 봐도 쉽게 유추할 수 있지 않은가. 이유 역시 뻔하다.

지혜 누나가 자신의 능력을 전부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아마….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으니까.’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리라.

지금이야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수도 없이 많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계속해서 부풀리고 덩치를 키우는 나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 그녀가 가면의 구세주와 함께 인류를 구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던 시점이었다.

아니, 태초부터 가면의 구세주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저 표정은 아주 많이 쓰레기 같았지만….

‘저 정도는 해줬으니까 가면의 영웅이라고 할 만하지 않았겠어?’

이지혜가 없었다면 손과 발이 잘린 느낌이었으리라.

“뭐예요? 왜 사람을 그렇게 봐요? 이제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감이 잡혀요?”

“원래 누나는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이야기하고 그래? 우리 영혼의 단짝이잖아. 소울메이트고 혼이 이어진 파트너잖어. 원래 나한테는 누나밖에 없었다니까.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듣기 좋은 아부 해주는 건 고맙기는 한데 별로 와닿지가 않네요. 표정이 정말 쓰레기 같아 보이거든요. 뭐 빼먹을 거 없나 머리 굴리고 있는 얼굴이라고요. 뭐 그래도 나쁘지는 않네요.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고….”

“그렇지.”

“이래서 능력이 있어야 한다니까.”

“그나저나 누나. 그거 괜찮은 거긴 해? 도미니온스는? 아직 남아 있는 거 아니야?”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거의 죽여 놨어요. 아, 진짜로 죽여 놨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최근에는 조금 얌전해지고 있다니까요. 슬슬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순종적으로 변하고 있으면서도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기는 한데… 그게 관심 좀 가져달라는 거 같기도 하고 뭐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얘도 의외로 귀엽다니까.”

“…….”

“자세히 알고 싶어요?”

“아니… 굳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로노베를 이용해 꿈속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이지혜와 로노베가 함께 도미니온스의 머리로 들어와 있다는 결과였으니까.

둘이 도미니온스를 압박하고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것이 아닌가.

심지어 도미니온스가 순종적으로 변하고 있단다. 굳이 다른 코멘트가 필요할 리가 없다.

‘수완도 좋아요.’

누나의 말처럼 누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김현성이 깨어날 거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 확신에 무게를 싣기 힘든 상황이 아니었던가.

로노베는 김현성이 아직 육체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메시지를 보내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나를 대신해 카스가노 유노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아군이 생겨났다는 것이 아닐까.

쓰로누스가 내게 지지를 보내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녀석 하나로는 약한 감이 있었으니까.

아니, 솔직히 이 무능한 새끼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차라리 없는 게 더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최악이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지혜 누나 덕분에 작업을 치는 것이 수월해졌다는 것은 굳이 언급한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방향에서 의심을 받고 있는 만큼 그녀의 지지에는 힘이 실린다.

“그래서… 계속 계획대로 진행하는 거 맞죠?”

“물론. 왜?”

“아니, 빨리 내 몸으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그렇죠. 연수한테 부탁하고 오기는 했는데 직접 하지 않으면 성에 안 차요. 관리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손톱이라도 바꾸고 올걸. 엄청 촌스러운 파란색으로 칠한 거 있죠? 제기랄 맞아요. 그 보노보노 색깔이요. 얘가 나를 엿 먹이려고 하는 게 분명하다니까. 짜증 나 정말.”

“어차피 누나 자고 있잖아.”

“인간 이지혜가 어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줄 알아요? 오빠같이 태생적으로 피부 탱탱하고 반들반들한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끊임없는 관리와 작은 관심이 지금의 이지혜를 만든 거라고요. 진짜 짜증 나네. 자기는 먹어도 살 안 찐다는 개소리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거 알죠? 그렇게 바쁜 상황에서도 관리는 매일매일 했었는데… 엄청 신경 쓰인다고요. 진짜.”

“…….”

“이번 일만 끝나면 진짜 몇 달은….”

“…….”

“…….”

“병력 수습 됐네. 돌아가자. 누나. 저쪽도 거의 수습 된 것 같고.”

“그렇네요. 김현성은 일단….”

“응. 저대로 놔둘 거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말을 돌리자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시야에 비쳤다.

본인 말을 끊은게 마음에 들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녀 역시 슬슬 물러설 타이밍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

살짝 눈을 돌리자 돌리자 김현성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병력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투는 마무리 지어졌고 김현성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모인 병력들은 그런 김현성을 조심스레 응시하는 도중, 일단 적의는 보이고 있지 않으니 조금 멀리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 와중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조혜진도 시야에 비친다.

라파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무슨 말을 주고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재 김현성의 상태가 어떤지, 정말로 건강한 것이 맞는지, 그리고 되돌아올 수 있는지.

조금 초조해 보이기는 했지만 불안감보다는 기쁨이 더욱더 크다는 게 느껴진다.

일단 되살아났다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방법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는 게 분명하리라. 이제 인류는 새로운 숙제를 떠안았다.

살리는 것에 성공했으니 다음 퀘스트는 뻔하지 않은가.

노을빛의 검사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린다.

아마 최우선 사항으로 생각되지 않을까. 나는 녀석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현시점에서 배때기 엔딩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것들이 확실히 보이지 않는 만큼 최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둬야 했다.

“조금 씁쓸하기는 해요?”

“조금은. 걱정되기도 하고 그러네. 다들 잘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뭐 혜진이가 알아서 해주겠지. 매뉴얼은 놓고 왔으니까. 하는 거 보니까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무 부담 주는 것도 안 좋은 것 같지만… 사랑하는 내 님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진짜 좋아하는 것 같네요. 가망이 없는지도 모르고.”

“가망이 왜 없어?”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쟤네는 가망 없다니까. 이지후, 이기연이나 잊지 마요. 절대로 저 둘이 이어질 일 없어.”

“누나야말로 잊지 마. 누가 이기는지 보자고.”

“기대되네요.”

“나도 마찬가지야.”

쓸데없는 농담 따먹기를 지속할 정도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기는 했지만 일단은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곧바로 날개를 펼치자 어색하게나마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지혜, 아니, 도미니온스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씩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니 슬슬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사대천사들에게 도미니온스가 이지혜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것이 첫 번째였으니 저렇게 감정을 잡을 만도 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이지혜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낄 법도 한데 이지혜는 긴장한 구석도 없다.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은 모습에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겁니다. 이기영 님.”

“네. 도미니온스 님.”

북쪽으로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자 거대한 신전이 시야에 비친다.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처음 보는 양식의 건축물이다.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보면 훌륭해 보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어차피 부서질 신전인데 뭐.’

어차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건축물이다. 조금 더 앞으로 몸을 옮기자 익숙한 인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쪽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무능력 비둘기, 쓰로누스. 당연하지만 무사히 귀환해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 개새끼 진짜.’

내가 밖으로 나가는 걸 반대하는 데 한 표를 던진 새끼. 아니나 다를까 허겁지겁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물론 놈이 내 안부를 묻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났으니까.

천천히 신전에 착륙한 도미니온스는 쓰로누스가 내게 다가오기 전에 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별일은 없….”

“타락한 검이 되살아났습니다.”

“뭐?”

“타락한 검이 되살아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회의를 소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쓰로누스.”

“도미니온스. 그게….”

“두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쓰로누스. 타락한 검이 되살아났다고.”

‘지혜 누나. 메소드 연기. 시바.’

“세라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죠. 여기서 압박해야죠. 그 새끼 잘못이죠?’

“한번 알아보겠다.”

‘그 와중에 이 무능력한 새끼는 세라핌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네. 넌, 시바, 할 줄 아는 게 뭐야?’

“죄의 심판을 타락한 검에게 사용한 것이 확실합니까?”

“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의 죽음을 직접 확인해 본 것이 맞습니까?”

“그건….”

“쓰로누스.”

“…….”

“당신이 확인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

“세라핌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어떻게…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고는 한들, 타락한 검의 영혼이 육신을 떠난 것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다니요. 만약 오늘 정찰을 나가보지 않았다면 그가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

“내 실수다. 도미니온스.”

“당신을 문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문제를 제공한 것은 세라핌입니다. 세라핌의 오만함이 문제를 일으킬 줄 알고 있었어요.”

‘다시 한번 그렇죠? 그 새끼 잘못이죠.’

“도미니온스 나는….”

“당신의 변명이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일은 일어났고 이제는 수습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지혜 누나 잘한다. 시바. 장하다. 이지혜. 비둘기들을 박살 내버리렴.’

“인류와의 전쟁이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을 거라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었는데….”

“…….”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노선을 확실하게 정해야 해요. 이대로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나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법을 찾을 것인지 말입니다. 급한 일입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쓰로누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 새끼가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미니온스가 살짝 몸을 움직이자 이쪽에 말을 걸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그러니까… 무슨 일은 없었느….”

“그럼 갑시다. 도미니온스 님.”

“네. 이기영 님.”

눈도 마주치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맞다.

“없었느냐….”

빛기영 가라사대 무능력한 새끼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셨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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