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5화 실험(1) >
물론 간단히 걸려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작업 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본인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판단할수록 이런 종류의 덫에 걸릴 여지가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은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기 사례를 매체나 이야기를 통해 접해도 본인들은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 세상을 둘러보라, 피해자들 어디에나 존재한다.
많은 피해자가 이성적이지 못하거나 멍청해서 거미줄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남의 등쳐먹고 살아가는 사기꾼들도 사기를 당하는 세상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사회 경험이 낭낭한 베테랑들 역시 쥐도 새도 모르게 뒤통수에 구멍이 뚫린다.
물론 우리 회귀자처럼 선천적으로 뒤통수가 먹음직스러운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경우가 더 흔하지 않은 경우다.
대부분은 조심스러워 한다. 본인이 가진 무언가를 내밀 때는 짐승들조차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세라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간의 작업을 통해 이 이론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가진 걸 내놓는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래서 필요한 게 바로….
‘적정선이라는 거지.’
적정선이 중요했다. 부담이 되지 않는 금액, 내놓아도 타격이 들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
물론 점차적으로 늘려나가는 게 맞겠지만 나와 누나가 책정한 가격은 세라핌에게 부담되는 금액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언제든 여유롭게 굴릴 수 있는 유동 자금, 딱 그 정도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자산을 악착같이 쌓아 올리신 세라핌에게는 투자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신성이었다.
버리는 셈 치고 던져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특히나 이쪽이 자신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느낌을 받는다면 더욱더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인류 부모 열차에 제때 탑승하지 못해 중간에 팽 당하지 않을까 싶은 불안감.
아마 녀석의 입장에서는 이게 가장 크게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비둘기들과는 다르게 세라핌은 자기주도적인 성격이었으니까.
나와 지혜 누나 정도라고는 볼 수 없지만 녀석도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나와 닮은 느낌이지 뭐.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는 모습까지 비슷하다. 만약 내가 녀석의 입장이었다면….
‘기획서를 한 번 더 읽어보겠지.’
주사위를 던지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필요할 때 던지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이게 주사위를 던질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게 먼저다.
예상했던 대로 아무 말 없이 다시 한번 기획서를 꼼꼼히 훑어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기획서에서 문제를 찾을 순 없을 것이다. 애초에 위험성이 있다는 건 녀석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그걸 제외하면 특별히 모난 부분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생긴다면….
‘다시 한번 더 묻겠네.’
“테스트 서버는 정확히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거지?”
“보고 계신 그대로입니다. 작은 세상을 먼저 프로그래밍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거대한 맵 안에 말입니다.”
여기서는 가지고 있던 걸 한 번 꺼낼 필요가 있다.
도미니온스가 살짝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맵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크기는 작지만 마치 대륙의 축소판과도 같다. 하늘 위에서 작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작은 집들과 자연환경들도 눈에 보인다.
실제로 만들었냐고? 당연히 실제로 만든 결과물이지.
의심이 많은 놈은 결과물로 직접 보여줘야 고개를 끄덕이는 법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무척 놀란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됐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프로그램들이 살아갈 환경을 마련한 지는 꽤 됐습니다. 대륙의 중요 도시와 필수 환경 정도만 축소해 디자인했으니 아마 오류가 크지는 않을 겁니다. 세세한 오류 정도는 있을 수 있겠지만 곧바로 수정할 수 있을 정도고요.”
“흥미롭군. 인간의 축소판들이 이 작은 대륙에서 생활한다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흉내를 내는 프로그램이며 더미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개성은 어떻게 부여할 생각이지? 만들어진 더미가 실제 인간처럼 생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기껏해야 흉내내기밖에 되지 않을 거야. 별 의미 없는 행동일 수도 있다고.”
“쌓아놓은 데이터가 있습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나?”
“지금 당장 말씀드리기에는 조금 곤란합니다.”
“도미니온스는 알고 있….”
“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지고 있다.
거짓은 없다. 정말로 나는 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실제로 이 의미 없는 실험을 진행할 생각이다. 그래야 녀석이 주사위를 던질 테니까.
“합류해야 알려줄 수 있다는 건가?”
“크게 관심을 가지실 정도는 아닙니다. 사실 숨길 사안도 아니니 말씀드려도 상관없지만… 저는 대륙 대부분의 인간들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살아 있는 생명처럼 움직일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지만 적어도 비슷하게 행동할 겁니다.”
“으음….”
“500만 명입니다.”
“뭐?”
“500만 개의 프로그램이 각자 다른 행동을 할 겁니다. 같은 행동이나 복사 붙여넣기 따위도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네. 각기 다른 500만 개의 개성과 성향이 있는 겁니다.”
“아무리 더미라고 한들, 그 정도나….”
“가능한지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예산에 적혀 있는 신성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실험이 가능한 겁니다. 세라핌. 만약 이기영 님이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는 실제로 세상을 창조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대륙의 복제판에 가깝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을 겁니다.”
“…….”
‘이 정도나 했는데 안 넘어와?’
모든 게 실재하고 있었고, 거짓말도 없다. 물론 중간에 계획을 뒤집지도 않을 것이다. 이 실험은 계속 진행될 거고 신인류 만들기도 예정대로 진행될 거다. 녀석이 만약 투자를 한다면 말이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는 녀석의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나도 함께하지.”
“…….”
“…….”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세라핌.”
“아니, 나도 함께 하고 싶어. 기존 예산의 두 배를 투자하겠어.”
“세라핌 님. 정말입니까?”
“그래.”
‘아이고 우리 세 사장님 배포도 크십니다. 진짜.’
“세라핌,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도미니온스. 좋은 일은 함께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 지금 당장 전달해 주도록 하지.”
‘화끈하기도 하셔라. 감사히 받겠습니다요. 세 사장님.’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도….”
“계약서까지 작성하도록 하는게 좋겠어.”
도미니온스가 굳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멘트를 조금씩 투척하자 조금 더 애가 탔는지 곧바로 일을 진행시키려고 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결과물은 언제 볼 수 있지?”
“5일이면 충분할 겁니다.”
“빠르군.”
“그만큼 시간이 촉박하니까요. 당연하지만 쓰로누스 님과 케루빔 님에게는 비밀입니다. 아마 계속해서 저희를 견제하려고 하실 겁니다. 세라핌 님께서도 두 분을 견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원로들에게도 힘을 조금 실어주시고요.”
“물론이야.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결과물은 확실히 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는 건가?”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만 나가도록 할게. 네 말대로 원로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을 설득해야 하니… 오랜만에 바빠지겠어.”
“세라핌 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고맙다, 새끼야.’
“그래.”
‘진짜로 고맙다. 이 새끼야.’
물론 아직까지는 부담되는 신성은 아니겠지만 본래 시작이 반이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바깥으로 향하는 녀석의 모습은 가관.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도미니온스, 아니, 이지혜가 입을 열어왔다.
“예산의 두 배면… 생각보다 많이 땡겨 오지는 못했네요. 예산을 조금 더 잡을 걸 그랬나 봐요.”
“아니야. 이 정도가 딱 좋은 것 같아. 누나. 만약 조금 더 높게 불렀으면 훨씬 더 경계했을걸. 그리고 목적은 다른 데 있을 수도 있고….”
“아아. 데이터?”
“응. 맞아.”
“확실히 구미가 당길 만도 하죠. 만약 일이 실패해도… 원천기술만 건져도 이익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저도 똑같이 생각했을 거예요. 일이 잘 풀릴 확률도 높고, 정말로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더미들을 500만 개나 뽑아낼 수 있다면 다른 실험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본인은 사용할 수 없겠지만… 애초에 베니고어넷 운영자 시스템에 접근해서 데이터 뽑아낼 수 있는 건 오빠랑 우리 막아들 둘뿐이잖아요?”
“뭐 그렇지?”
“나도 권한 주면 안 되려나.”
“주고 싶어도 못 줘. 박물관 관리자 타이틀이 있어야 되는 거라. 아무튼 재미있기는 재미있네. 그럼 곧바로 실험 시작해야지. 누나. 우리 투자자님이 결과물을 원하시는데 열심히 실험해 봐야 하지 않겠어?”
“이미 실험해 봤잖아요.”
“다른 실험 말이야.”
이지혜가 허공을 두드리자 축소된 맵 안에 손톱만 한 크기의 인간들이 빛과 함께 생겨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기본적으로 더미이기는 하지만 베니고어넷에 저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라 꽤 리얼하다.
베니고어넷 사용자나 기존 대륙에 있는 이들의 복사판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마치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스마트폰을 확대하는 듯한 모션으로 손가락을 펼치자 한 풍경이 확대된 채로 눈에 들어왔다.
파란 길드의 모습이었다. 때마침 식사시간인지 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모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잘거리는 모양새가 꽤 즐거워 보인다.
박덕구, 안기모, 김예리, 박기리 삼 남매는 그중에서도 가장 신났는지 박수까지 치고 있었고 정하얀은 여전히 이쪽 옆에 딱 붙어 있다.
선희영과 엘레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알프스는 자신의 강아지를 안아 들고 있다. 김창렬과 유아영, 한소라도 자리해 있는 모습, 빠져 있는 사람은 없다.
조혜진의 모습도 눈에 띈다. 딱 각진 자세로 앉아 불편한 자세로 식사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조혜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김현성도 있다.
녀석은 분위기를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바람 따라가는 듯이 잘 어울리고 있다.
‘이거 오류인가?’
조금 더 어색한 모습을 보여줄 줄 알았는데 저건 또 의외다. 아무래도 김현성의 사교 수치가 상향조정이 되었나 보다.
“파란길드로 돌아가고 싶어요?”
“왜, 감상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조금 그렇게 보이기는 해요. 나도 우리 길드 보고 있었거든. 이제는 집 같은 곳이잖아요. 그럴 만도 하죠. 이 삶에 완전히 정착했으니까.”
“나도 비슷해, 누나. 애타게 그립지는 않은데 생각이 나기도 하고.”
“그런데 이거 진짜 어렵네요. 신인류 한번 만들어 볼까 싶기도 했지만 실험으로도 어렵다니까요. 이거 결과물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일단은 이 정도로도 충분해. 다음 모임까지는 더미를 만들었다는 것만 공개하고 조금 더 땡겨오지. 뭐. 천천히 조절하면 된다니까.”
이기영 더미가 그리폰을 타고 붉은 용병길드로 향하는 것이 보인다.
옆에서는 이지혜가 뭔가를 툭툭 두드리는 모습, 아마 성향이 어떻게 변할지 시험하고 있는 거겠지. 저번에도 똑같은 걸 했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다.
붉은용병 길드에 들어간 이기영 더미가 필사적으로 길드를 빠져나가려 문을 두들기는 모습, 하지만 차희라 더미에게 머리를 잡혀 끌려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신인류는 개뿔.’
이건 어차피 떡락할 주식이었다.
“참혹한 광경이네요. 진짜로 죽겠는데요? 아.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요. 세부조정한 게 효과가 있기는 있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