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6화 실험(2) >
‘별로 효과가 있는 것 같지가 않은데.’
“데이터 쪼가리이지만 흥미롭기는 흥미로워요. 욕망을 거세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거죠. 이렇게 부작용이 일어나는 걸 보면… 세부 수치를 조정해도 결국에는 똑같네요. 이건 어쩔 수 없나 봐요.”
“음….”
“삼 개월 정도는 억누를 수 있지만 특정 인물들은 발정기, 아. 발정기라고 하면 안 되는구나. 인간이 짐승도 아닌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조금 더 고급스러울까요. 사랑의 날로 명명할까요?”
“들어맞는 단어는 천천히 생각해 보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무튼 이 주간이 오면 공격성을 띄는 인물들이 생긴다는 게 문제예요. 성향에 따라 갈리는 것도 흥미롭고요. 평소에 욕구가 잘려 나가다 보니 사랑의 날이 찾아와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효과를 덜 받거나 완전히 잃어버리는 사람들, 반대로 폭발하듯 터져서 공격성까지 드러내는 인물들, 전자는 오빠고 후자는 차희라 더미라고 보면 되겠네요.”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 있기도 하다.
이기영 더미가 자고 있는 방을 몇 번이나 들락거린 정하얀과 일당들만 봐도 이 일이 얼마나 큰 부작용을 야기시키는지에 대해 예상해 볼 수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어느 정도 시스템이 돌아가기는 해요. 양쪽 다 공격성을 띄고 있거나 욕구를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문제겠지만, 어찌 됐건 비율이 맞아 떨어지기는 하니까요.”
“꽤 진지하네. 누나는.”
“언제 이런 걸 또 해보겠어요? 재미있잖아요. 실험 같은 거. 조금 게임 같기도 하지 않아요? 어차피 해야 되는 일이 기도 하고… 이런 실험을 해봤다는 것만으로도 플러스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걸요. 물론 발표할 수 없는 내용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건 못 보여줘요. 우리 일이 실패할 거라고 말해주는 거나 다름없는데.”
“당연히 은폐시켜야지. 너무 좋은 것만 보여주면 안 되니까. 적당히 부작용 몇 가지 보여주면 돼. 약한 거 있잖아. 막 감금시키고 이런 거 말고… 그냥 고개를 끄덕일 만한 부작용 같은 거 우리 능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다 싶은 거. 그런 거 위주로 선별해서 보여주자.”
“성향이 갈라진다는 것도 발표하면 좋겠네요. 비둘기들도 흥미로워 할 것 같아요. 우리가 찾지 못한 답이 있을 수도 있고요. 사실 이걸 가지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지만… 아! 그리고 김현성 더미랑 조혜진 더미랑은 아직도 진전 없어요. 데이트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이쪽에서 도움을 줬는데도 불구하고요. 단순한 프로그램 덩어리인데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재미있네요.”
“누나 그거 현실이 아니야. 뭐 그런 거에 큰 의미를 두고 그래. 안 그래도 김현성 더미는 오류가 생긴 거 같기는 하더라고. 사교성 수치가 조금 상향조정되기도 했고 약간은 다르다니까. 그리고 왜 그런 실험을 해.”
“누가 이게 현실이 아닌 걸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장난 좀 쳐본 거죠. 그리고 이게 데이터 쪼가리이기는 한데 이게 생각보다 리얼하다니까요. 소름 돋는 거 하나 말해줘요?”
“뭔데?”
“이기영 더미는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요. 어쩌면 자신이 더미라는 것도 눈치챘을지도 몰라요.”
“뭐?”
시바, 소름 끼쳐. 뭐야.
“시발, 소름 끼치는데.”
“저도 얼마나 소름 끼쳤는지 몰라요. 편지까지 남겼다니까요.”
“뭔데?”
이지혜가 살짝 허공을 터치하자 더미가 작성한 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으아. 시바, 소름 끼쳐.’
“저 새끼 데이터 삭제해. 누나.”
-존경하는 초월자시여. 저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 누나. 진심 소름 끼쳐, 이 새끼. 뭐야.”
“이미 저건 처분했어요. 그러니까 저게… 345번째였네요. 제가 보고서 보낸 거 아직 안 읽어 봤어요?”
“아직….”
“정확히 몇 회차였더라. 382번째 회 차였나. 그때도 한 번 눈치챈 것 같더라고요. 극단적으로 일을 진행시켰을 때의 데이터가 필요해서… 솔직히 제가 생각하기에도 오류가 조금 많기는 했어요. 세세하게 조정하지도 못하기도 했고… 환경 변화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여기 있는 더미들도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당연히 382번째 회차도 들켰죠. 이기영 더미가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서 그냥 무시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된 줄 알아요?”
“어떻게 됐는데.”
“얘가 반란을 일으킨 거 있죠. 시스템에 저항해야 한다고 사람들 선동하고 지랄병 났었어요. 진짜로 깜짝 놀랐다니까요. 하루아침에 신전이 불바다 되고 이래도 나오지 않을 거라고 강짜 부리면서 협박하는데 환장할 노릇이죠. 황당해서 지켜보다가 곧바로 리셋했어요.”
“소름 끼치네. 진짜.”
“저도 소름 끼쳤다니까요. 혹시 우리도 이런 상황은 아닐까. 하고 걱정도 된 거 있죠. 아무튼 그거 보고서는 읽고 곧바로 처분하세요. 어차피 프레젠테이션용으로 내놓을 수도 없는 데이터니까.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안 그래도 삭제하려고 했어. 다른 특이 사항은 없어? 아, 애들은 좀 어때.”
“더미요?”
“아니, 실제 애들.”
“매뉴얼대로 진행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전쟁 준비도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조금 희망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예전보다는 나아요. 김현성은 아직 그대로 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더라고요. 일단 비둘기 측에서 군대를 보내지 않으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거겠죠.”
정확히는 막고 있다고 말하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말 그대로 전쟁은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아마 인류 측에서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갑작스레 비둘기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틀어박혔으니 얘네들도 충분히 의아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병력을 끌고 가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
케루빔이야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세라핌이 그걸 막고 있으니 뜻대로 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애초에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할 정도로 내부가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매번 토론과 토의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종종 몸싸움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원로 비둘기들이 푸드덕 거리며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은 꽤 현실감이 넘쳤을 정도.
파벌은 완벽히 갈라졌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비둘기들마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힘들겠지.”
“정말로 위기라고 생각했으면 이런 식으로 파벌이 나누어지지도 않았을 거예요. 당장 발등에 불이 안 떨어졌으니 여유롭게 가도 상관없다고 느끼고 있는 거겠죠. 그만큼 인류가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나요?”
“뭐 그렇겠지. 아마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누나.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우리가 더미들을 바라보고 있는 심정으로 인간들을 보고 있을 텐데… 누나도 이 더미들이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잖아.”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케루빔은 차희라한테 쥐어 터졌잖아요.”
“그래서 과장해서 말한 거라고 했잖아. 기본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게 먹힌 거야. 인간보다 위에 있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이 개자식들이 신인류 어쩌고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 수 있었던 거라고.”
“그건 동의해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오빠 말대로라면 쓰로누스와 케루빔이 그나마 인간을 동등하게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게 되는 거네요. 참 아이러니하다. 그치?”
“걔네도 사실 똑같은 놈들이지 뭐. 누가 더 나쁘냐고 묻는다면 신인류 계획에 손을 들어준 멍청이들이 적폐기는 하지. 그러니까 신나게 뽑아 먹어도 돼. 발표 자료 준비됐지?”
“네. 마무리 작업으로 편집 좀 하면 될 것 같아요. 세라핌이 처음에 와서 보고 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시간 참 빠르다니까.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이게 싫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고요.”
“먼저 나가서 셋팅 좀 하고 있을게.”
“네. 발표 잘해요.”
곧바로 밖으로 움직이자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할 무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재미있겠네.’
사실 별로 보여줄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이런 실험을 진행 중이고 차도가 있다는 것 정도만 발표하면 끝이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투자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원로 비둘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처음 봤을 때는 약간 괄시하는 듯한 얼굴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표정도 없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보내오는 모습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세라핌 역시 미리 자리해 있다. 케루빔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녀석 쪽 진영에 있는 비둘기들은 자리에 앉아 있다.
‘자존심이 상한 거겠지.’
당연히 초대장은 보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몸을 끌고 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무언의 시위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쟤는 왜 왔어?’
쓰로누스도 눈치를 보며 자리를 잡는다. 잠깐 동안 어수선한 장내에 이야기를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린다. 심지어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충돌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두 파벌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어떻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는가.
사실 의도하기도 했다.
그래야 더 임팩트가 있잖어.
‘시간 됐네.’
순식간에 조명이 꺼진다.
장내가 다시 한번 소란스러워 지고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이 들어와 나를 비췄다.
굳이 약을 팔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제품이 확실하면 구태여 이빨을 털 필요도 없다.
이상한 서론으로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곧바로 보여주는 게 확실하다.
박수를 한 번 치자 곧바로 눈앞에 축소된 대륙의 환경이 시야에 비친다.
‘타이밍 좋았어. 누나.’
며칠 전 세라핌에게만 보여줬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단순히 환경만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더미들이 움직이며 생활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누구는 모험을 떠나고 있었고 누구는 일상을 즐기고 있다. 각자 다른 행동 방식으로 움직이며 각기 다른 모습으로 대륙에서의 삶을 보내고 있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나타난 신기술에 회장이 완전히 침묵에 휩싸여 버렸다.
신문물을 처음 접한 이들처럼 입을 벌리고 이걸 바라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케루빔 진영 쪽에서도 동요하는 분위기.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수를 한 번 더 치자 전혀 다른 도시가 보인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숲, 그 안에 있는 마을과 던전, 거대한 산과 바다, 호수의 신전, 또 다른 거대한 도시와 그 안을 꽉 채운 더미들.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광활한 환경에서 500만 개의 인격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이들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게….”
당연히 세 사장님은 흡족해하는 분위기다. 본인이 투자한 온전한 결과물이 세상에 나타나는 순간이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대륙의 축소판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과언이 아닌 시스템입니다. 단순히 명령대로 움직이는 인형들이 아닌,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더미들입니다. 오백만 가지 성향과 행동 패턴. 네. 여러분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무려 오백만 가지입니다. 말 그대로 저와 도미니온스, 그리고 세라핌 님은 작은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이게….”
“미쳤군. 아니, 대단하다고 표현해야 하는 건가.”
‘대단한 거지. 새끼야.’
“말도 안 돼….”
‘말이 왜 안 돼? 데이터만 확보되면 가능해.’
“모든 것은 테스트를 위해서였습니다. 네. 신인류 계획의 첫걸음, 단순히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신인류 계획을 좀 더 확실하게 구체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위험성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앞으로의 계획을 미리 시험하기 위해 우리는 작은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맞습니다. 네. 이 계획에 반대하시는 분들의 말씀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 계획은 위험성을 띄고 있고 완전하지 않습니다. 어떤 역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이 작은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이들을 보십시오.”
대륙이 황폐화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비명을 지르는 더미들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의 모습도 눈에 보인다.
찬란했던 빛에 휩싸여 있던 도시들은 어두워지고 문명과 멀어진다. 아무것도 없었던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대륙의 모습에 안타까운지 몇몇 비둘기들의 탄식 소리마저 들려온다.
“이것이 여러분이 원하는 결과입니까.”
“…….”
“진정 이 결과물이 여러분이 원하는 결과물입니까.”
“…….”
“아무리 숭고한 일이라고 한들, 잘못된 방법으로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숭고한 뜻을 더욱더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우리는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저와 의견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는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들의 고통과 대륙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는 겁니다.”
“…….”
“결과에서 비롯된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과정에서 비롯된 고통에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숲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면 나무의 아픔에도 공감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가진 걸 걸고 그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지만 여러분 역시 그들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대륙을 넘어 전 차원에 우리들을 창조한 신인류가 살아가는 가능성이 우리의 눈앞에, 열려 있습니다.”
“…….”
“바른 이론, 그 이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혁신 기술, 함께해 주시는 여러분이 계신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능력한 신들과 불쌍한 인류를 잡고 뒤흔드는 악마들을 몰아낸 이후, 우리가 신세계의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인류의 새로운 창조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여러분!”
“…….”
“투자하십시오! 미래에! 희망에! 새로운 인류에! 우리가 그려나갈 행복한 미래에! 투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