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9화 의심과 확신(3) >
‘꿩 먹고 알 먹고.’
여러모로 이득이 되는 장사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이쪽에 붙으려 한 배신자들을 처리했으니 인류 측에도 이익이고, 천사 측에 붙어 있는 악마 놈의 이중생활을 고발할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이익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원로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얘도 배팅했었지.’
그것도 꽤 많이 투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애초 이 비둘기들은 안정적으로 신성을 공급받을 수 없는 입장이다.
베니고어나 엘룬 쓰레기 같은 이들을 대륙에 취업해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 직장인에 비유한다면 이들은 따로 일터가 정해져 있지 않은 비둘기들로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비렁뱅이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자산으로만 삶을 영위한다는 거다.
어딘가에 수급처가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상황이 꼬일 대로 꼬일 상황인데.
누가,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지도 않다. 저 원로 비둘기의 표정에 깃들어 있는 것은 어떻게 이번 일을 해결해야 하는가다.
일을 망친 원인에 대해서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지 않은가.
“이, 이 일을…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뭘 어떻게 해. 뻔하잖아.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이걸 어떻게 수습하겠어? 일단은 버텨야지. 안 그래?’
“무언가 다른 방도가 있는지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애초에…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다른 명령이 내려오기는 한 겁니까?”
“지금은 정보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현, 현재 전선에서 계속해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인간들이 전선을 옮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아군 진영을 압박하고… 심지어 신전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응 빠르네.’
이를테면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암묵적으로 휴전상태에 돌입했던 양측 진영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 조금 지친 것 같은데 너희들은 어때? 아, 너희들도 그래? 그럼 조금만 더 쉬자. 우리 굳이 말 안 해도 알잖아.
내부 정리할 것도 필요하고 너무 갑작스럽게 커다란 전투가 일어나는 바람에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다고. 서로 구역만 침범하지 말자 이거야.
이런 배경에서 먼저 뒤통수를 친 쪽이 화친을 주장했던 천사들 쪽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피해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고 해도 일단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인류 측에서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거다.
김현성이 있는 지역은 완전히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영웅이 되살아난 것은 팩트였고 빛의 진영은 한 번 더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정하얀도 마력의 회복을 끝내지 않았을까.
우리 회색빛의 용사는 자신을 증명해야 할 테니 몸이 달아올라 있을 테고, 차희라는 이미 옛날 옛적에 일어나 싸울 준비를 끝내 놓았을 것이다.
우리 혜진이도 착실히 매뉴얼대로 움직이고 있다. 전선을 위로 올리고 압박하는 것.
물론 전진기지에 기반을 둔 만큼, 저들의 예상처럼 비둘기들의 심장부까지 다가오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땅따먹기를 하고 싶다는 의지는 내보였다는 것은 충격적으로 다가올 거다.
‘드래곤들은 합류하기로 한 건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은 높다. 일부 병력이라고 한들, 알을 깨고 나왔다는 것 자체가 제공권에 대한 대비가 있다는 거니까.
정리하자면 비둘기 측에서 한 방 먹인 게 꼭 천사들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
아마 김현성이 움직인다면 조금 더 일이 재미있어질 것이다. 알프스가 수정된 매뉴얼을 전했다면 조만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타… 타락한 검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 움직일 때 됐지.’
이성이 붙어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이 역시 아군 측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다.
사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비둘기 측에서도 커다란 문제로 다가오는 상황은 아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걸 해오면 된다. 쉬운 일이다. 가지고 있는 걸 포기하고 다시 한번 이전의 일을 되풀이 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그게 아니지 않은가.
“다시 돌아가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대책회의를….”
“안 그래도 이미 모여 있습니다. 이기영 님. 일단… 일단 모시겠습니다.”
‘그래, 그럼 더 편해지지.’
발걸음을 옮기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성난 목소리 들이 들려온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다시 전쟁이라니요! 도대체 어째서!”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랍니까. 지금 말이나 됩니까! 어디서 허가가 떨어진 겁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걸 어떻게 수습하느냐가 문제예요.”
“일단 병력을 보냅시다. 인간이 이 신성한 신전에 발을 들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병력을 보내다니요!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병력을 보낸단 말입니까! 다시 싸우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고 오해가 있었다는 걸 전해야지요!”
“본래부터 인간은 우리를 적대하고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입니다.”
“신인류 계획이 코앞에 있는데 쓸데없는 전쟁놀이로 예산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 묶인 신성을 생각해 봅시다. 조금 더 이성적으로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다지 이성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대공황을 맞은 첫날 금융시장에 나와 있는 개미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모두 손에 봉투 같은 걸 꽉 쥔 모습은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가 아닌가.
불안감으로 맛탱이가 간 것 같은 눈을 보여주는 이들의 모습도 보이는 걸 보면 보통 힘이 드는 상황이 아닌 모양이다.
‘아주 개판이야. 진짜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어요.’
살짝 인기척을 드러내자 역시나 이쪽으로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지혜 누나도 걱정스러운 표정 연기로 사태의 심각함을 표현하는 중. 자신을 절제한 연기력이 눈에 띈다.
표정을 최대한 숨기려고 하지만 당혹스러움은 감출 수 없는 디테일함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그 탄성에 무언가 불안감을 느낀 것일까. 나를 바라보는 원로 비둘기들의 표정이 조금 더 어둡게 변하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모두들 진정하십시오.”
“아.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소식은 전해 들으셨습니까.”
“이기영 님!”
일단은 숨을 한 번 고르자.
“들으셨습니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잇는 게 중요했다.
“네. 전해 들었습니다. 인간들이 신전을 향해 병력을 끌고 들어오고 있다는 것도, 또 타락한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말입니다.”
“이… 이 일을.”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계획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병력을 보내 전선을 유지하고 다시 한번 자리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걸로 그들이 진정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 전투를 벌이는 것은 저희 계획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네, 말씀하시죠.”
“지금이라도 예산을 축소시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미 예산은 한계까지 축소시킨 상황입니다. 여러분들이 투자해 주신 신성은 계속해서 작은 대륙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만 번의 시뮬레이션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대륙을 유지하고 있는 시스템에 접근하기 위해서 필요한 신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히 말해 축소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작업 중인 신성을 회수할 수는 있지만 지금 회수한다면 손해가 클 겁니다.”
“어느… 정도로 손해가.”
“이미 신성의 삼 분의 일가량이… 아니, 그 이상이 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뺄 수 있어?’
딱히 말로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손해가 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망하는 거야.’
떡락하는 거라고.
“계획에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실험도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번 일만 해결하면 됩니다. 네. 딱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되는 겁니다.”
솔직히 창업자가 저 문장을 입에 담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끝장났다는 걸 의미하지만 뭐 그런 게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쟤네들은 믿고 싶은 걸 믿을 것이다.
이번만 버티고 버티면 언젠가는 떡상 할 거라는 믿음, 잠깐 위기가 오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버티는 자가 승리할 거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저들을 움직일 것이다.
“투자한 신성을 회수하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 돌려드리겠습니다. 물론 계약서상에 명시된 것처럼 원금을 그대로 돌려드리지 못하겠지만….”
“…….”
“…….”
“불안하실 겁니다. 네. 불안해하시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모두가 똘똘 뭉친다면 그 어떤 위기인들 해결하지 못하겠습니까. 저희 쪽에서 미처 상정하지 못한 일이 터진 것뿐입니다. 네. 갑자기 말입니다.”
“…….”
“…….”
“이번 실수는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손해가 있겠지만 그것만 감수한다면 충분히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시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대비해야 하는 일입니다. 어째서, 누가 병력이 움직였습니까?”
“현재 파악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렇군요. 아마…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
“작전 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물론 이 자리에서 쉽게 말씀드릴 수 있는 사안은 아닙니다만 신인류 계획이 성사되는 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네. 확실할 겁니다. 이런 타이밍에 일을 저질렀다는 건 확실히….”
“이상하다?”
“네, 이상하지요. 마치 일을 망치려고 작정하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불쌍한 인간들이 우리에게 손을 내민 사실 자체가 본래 극비였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일의 진행 상황은 알고 계시기는 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은 저와 도미니온스, 세라핌, 그리고 케루빔 님뿐이었지요.”
“…….”
“이렇게까지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라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내부에서 나간 병력은 없다.”
하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고개를 돌리자 애써 침착한 척하는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띈다. 그리고 녀석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파란색 머리도 말이다.
‘매번 주인공처럼 등장하시네.’
당연하지만 표정이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일이 조금 꼬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내부에서 나간 병력이 없다는 걸 확인한 것을 보니 본인 나름대로 조사를 마친 것 같았다.
아마 지금쯤 본인이 거미줄에 발을 들여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않을까.
“신전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력이 아니라 외부에서 전선을 유지하던 병력이 일으킨 사고일 겁니다. 계획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작전 세력이 존재한다고요. 병력을 운용했다는 증거는 이미 한참 전에 인멸했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추측이군.”
‘생각보다 조심스럽네.’
발언에 조심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이 거미줄이 본인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당연히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녀석은 지금 정보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어째서 갑작스레 천사들이 인간들을 공격했는지, 내가 가진 다른 패가 무엇인지, 정확히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또 그를 위해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경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단순한 추측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인류 계획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 케루빔 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기억에는 분명 케루빔 님도 반대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
“설마요. 설마….”
“…….”
“그럴 리가 없을 겁니다. 그렇지요?”
녀석이 나를 보고 구역질 나는 인간이라 칭했으니 최대한 구역질 나는 표정을 선보이는 게 맞다.
비웃음을 섞은 미소를 보내고 눈을 작게 떠 녀석을 바라본다. 최대한 때리고 싶은 얼굴로 보여주는 것이 맞다.
나는 이럴 때가 통쾌하더라.
“인간과의 전쟁을 원하고 계시는 겁니까?”
“…….”
“설마 했지만 정말로 있었나 봅니다. 죄 없는 인간들을 죽여 자신의 배 속을 채우고 싶어 하는 이들이, 이 신성한 신전 안에, 천사의 탈을 쓴 채로… 쥐새끼인 양 숨어 있었나 봅니다.”
“…….”
“비극이로군요. 참 비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