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1화 방주 (1) >
문제는 시간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소비되는 신성이 어느 정도일 것 같아?”
비둘기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아준 신성은 초 단위로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있다.
더미 대륙에 계속해서 투자되고 있는 비용과 기존 대륙의 시스템을 뚫기 위한 비용, 심지어 전쟁을 지속시키는 것에서도 신성을 필요로 한다.
모인 신성의 삼 분의 일이 사용되고 있다는 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신성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소모되고 있었다.
실실 웃고 있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혹시나 내 생각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내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저 얼굴을 보니 그런 걱정은 서랍 안으로 집어넣어도 될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안심되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인류 측이 얻게 되는 이득도 상당하겠네요. 계속되는 전투마다 소소한 이득을 가져가고 있으니까요.”
“케루빔이 여기에 묶여 있으니까.”
“세라핌도 묶여 있지만 네임드 개체들이 묶여 있다는 사실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보급과 비용이겠네요. 오빠 말이 맞아요. 이건 제대로 들어맞았어요. 케루빔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았다고 해도 무리가 없겠는데요. 기간은 어느 정도로 생각해요?”
“글쎄. 길게 뻐기면 반 개월은 뻐기고 싶은데… 일주일 정도면 눈치채지 않을까. 조금 더 늦을 수도 있고… 지금은 바쁜 상황이니까.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겠지. 아마 한 참 신날 타이밍일 거야. 본인이 상황을 뒤집었다고 판단하고 있을 테니까. 역으로 함정을 파놓은 게 제대로 들어 먹혔고 조금만 버티면 눈에 거슬리는 놈 하나를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뭐.”
“그러니까요.”
“누나도 알고 나도 알잖아. 눈앞에 다친 사냥감이 있는데 어떻게 이빨을 들이밀지 않을 수가 있겠어.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주면 얘 입장에서는 더 애가 타지 않을까 싶은데…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니까. 최대 기간으로 잡으면 두 달 정도는 더 해먹을 수 있겠네.”
“어떻게 조금 더 해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요? 아니면.”
“아니야, 누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너무 티 나게 움직이면 괜한 의심 사기 딱 좋다니까. 지금 이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야. 더미 월드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고 신성도 던져주고 있고 아군 진영도 매뉴얼대로 움직여 주고 있고.”
“그게 가장 크죠?”
“물론.”
외부에서도 이쪽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고 있다면 이득은 극대화 된다.
‘크게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지만 않으면 돼.’
비둘기들이 발작을 일으킬 정도의 이득만 챙기지 않으면 된다. 지금까지 아군 진영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한 것은 이쪽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매뉴얼 그대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스노우 볼을 굴리는 걸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게 운영 아니겠어.’
아주 작은 이득, 그 작은 이득을 계속해서 굴리는 게 중요하다.
혜진이도 아마 할 일이 많지 않을까. 내부 정비야 끝냈겠지만 전선을 앞으로 당긴 이상 신경 쓸 게 더 많아졌을 것이다.
병력을 앞으로 당긴 만큼 임시 전선을 구축해야 할 것이고, 움직이기 시작한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도 녀석을 본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래, 혜진아. 시바.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슬슬 나가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 그래야지.”
“뭐 크게 준비된 건 없는 것 같기는 하던데… 그래도 너무 당해주지는 마요. 떡밥 던지려다가 순식간에 잡아먹히는 수가 있으니까. 실제로 위험하다니까요. 까딱하다가는 배신자로 몰려서 오도 가도 못해요.”
‘그럴 리가 있겠어?’
자만이 아니라 확신이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려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세라핌은 케루빔을 의심하고 있고 케루빔은 이쪽이 던져 놓은 떡밥을 받아먹기 급급하다.
여러 가지 퍼즐을 차곡차곡 모아 판 안에 끼워 맞추기 정신이 없다는 거다.
독립 조사 기관이 만들어진 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
‘초기 조사 정도에서 삼 일 정도 벌 수 있고.’
케루빔이랑 드잡이질 하다 보면 일주일은 훌쩍 지나지 않을까.
만약 그때 가서 놈이 깨달았다고 한다고 해도 쉽사리 나를 옭아맬 수는 없을 것이다.
독립기관을 만들자고 한 것은 녀석이었고 단순한 의심만으로 나를 압박할 수는 없다.
행정절차대로 질질 시간을 끌다 보면 눈덩이는 커지고 커져 신전을 뭉개 버릴 정도가 커지고 종국에 작고 달콤한 복수가 완성될 것이다.
‘형이 복수해 줄게.’
뭔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진 것은 목적지를 앞둔 바로 그때였다.
순식간에 붉어진 배경이 시야에 비친다.
“전투 준비 한다. 전투 준비 한다!”
‘무슨 전투 준비야?’
“인간들이다. 전투 준비한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비상사태라도 일어난 것처럼 신전 안이 붉은 경고등으로 가득 메워지는 중.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꽃밭이었던 것 같은데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뭐야. 시바. 이거 현실이야? 이거 현실이냐고. 뭐야?’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온다.
‘김현성 연방 손절 사건?’
“불가능해.”
신전의 결계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스템으로 보호받고 있다고 느껴지는 수준의 결계다.
외부에서 뚫어내면 뚫어낼지언정, 순식간에 신전 안으로 이동하는 것은….
‘밖에 온 건가?’
시바.
갑작스레 불안감이 등 뒤를 타고 온몸을 휘감는다.
‘진짜로 온 건가? 비둘기들이 호구로 보여? 그냥 적진으로 돌격이라고?’
조혜진 제정신이야?
‘아니, 시바, 위에서 캐리하고 있으면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리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내가 매뉴얼에 그딴 거 적어놨었어?’
독단적인 판단이다. 나는 이런 무리수를 던지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다. 애초 가만히 있어도 잘 굴러가는 판이었다.
그걸 설계하기 위해서 개고생이라는 개고생은 전부 다 하면서 기다렸는데. 이 판을 만들려고 내가 얼마나….
“이… 미친놈들.”
순식간에 내부로 들어올 수 없다면 이 새끼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다.
“외부에서 뚫고 들어올 생각인 거야.”
수성전을 해도 불리한 싸움인데 공성전으로 병력을 소모시키면서 들어 온 단다.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허겁지겁 뛰어나가 밖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익숙한 형태를 하고 있는 운송수단 이었다.
‘방주.’
“이… 이 미친 새끼들이.”
‘나이스 보트.’
“이 병신 새끼들….”
마지막에 봤던 것보다 더욱더 거대한 외관, 더 많은 인원을 태우기 위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튜닝을 마친 상태였다.
선체의 앞부분에 장착된 뾰족한 장치를 보니 저 용도가 무엇인지 예상이 된다.
텔레포트로 배를 신전의 앞부분으로 옮긴 이후에.
‘그냥 뚫고 올 생각인가?’
내가 불안해했던 그대로, 인류의 희망은 신전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이, 이 미친 새끼들아!”
다급한 상황에 망원경까지 켠 상황, 혹시 이쪽을 바라보는 눈이 있을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위에 있는 저 배가 더 걱정이 된다.
선체를 뚫고 들어간 시야는 어느새 선체의 내부까지 비치기 시작했다.
-더 힘차게!
‘박덕구 시바. 이 돼지 새끼.’
-더 힘차게 저으라니까!
‘이 돼지 새끼 진짜.’
-속도를 내야 한다니까!
마법사들이 마력으로 이루어진 노를 잡고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일 것이다.
-아, 거 답답하네! 노 좀 줘보쇼. 힘차게 저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매가리가 없어, 매가리가. 힘차게! 구호에 맞춰서, 여엉차! 여엉차! 여엉차! 모두 타이밍 좀 맞추쇼! 영! 할 때 밀고! 차! 할 때 당기라 이 말이요! 영차! 영차!
-아저씨. 비둘기들이 접근 중.
-마법 포대는 이미 준비됐습니다.
-그쪽은 기모 형씨가 좀 봐주쇼.
-포대 열어! 포대! 포대 열고! 신호에 맞춰서 발사합니다! 포탄 장전! 포탄 장전!
‘마법 포대는 시바 또 언제 이렇게 많이 달았어. 시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영차! 영차!
-발사!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발사!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박기리 삼 남매. 너희 진짜 왜 그래.
혹시나 이 미친놈들이 자기들끼리 독단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애초에 녀석들끼리 움직였다면 여기까지 닿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조금 더 선체 내부를 살펴보자 동승자들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조혜진, 시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결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조혜진.
‘하얀이는 건강해 보이네. 근데 그거 손에 들고 있는 나뭇가지는 소라야?’
한소라의 신체의 일부를 손에 꽉 쥔 채로 중얼 거리고 있는 정하얀.
‘너는 또 거기에 왜 껴 있어. 시바.’
조용히 성검을 매만지고 있는 라파엘.
‘희라 누나는 그냥 싸우고 싶어서 왔지?’
들떴는지 흥분한 상태로 보이는 차희라.
하나하나 다 열거할 수도 없다.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이들까지 시야에 비친다.
선희영과 엘레나 역시 온 것을 보니 애초에 전위 후위는 가리지 않기로 한 모양인 것 같았다.
일단 파란 길드원들은 모두 모여 있다. 대륙의 강자로 분류할 수 있는 네임드들도 모조리 배에 타고 있는 것만 같다.
‘저 배 채로 격추당할 거라는 가정은 아무도 안 한 거야? 저 미친 계획에 태클은 아무도 안 걸었던 거냐고.’
박기리 삼 남매의 선동에 조혜진이 말려든 건지, 아니면 일을 벌인 게 조혜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뭐가 됐든 무리수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거대한 폭격이 공중에서 시작되고 하늘에 떠 있는 배가 힘차게 신전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폭격을 맞고 선체에 충격이 왔는지 흔들리는 와중에도 저 방주는 부서지지 않는다. 시바, 그래. 저거 튼튼하기는 오지게 튼튼했어.
차원 여행까지 다녀온 경력이 있으니 몇 번은 버틸 수 있겠지만 저게 여기까지 닿으리라는 확신이 없다.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저 배를 신전에 꼬라박는 주사위는 던지지 않았으리라.
1차 방어선을 돌파한 방주가 맞이한 것은 개떼처럼 몰려들고 있는 비둘기들, 어떻게든 배의 움직임을 멈추려 하고 있었지만 마법 화포가 불을 뿜고 있다.
-발사! 발사! 발사아!!
‘안기모 저 새끼 꿈이 해적왕이라고 그러지 않았어?’
“시발, 꿈을 이뤄서 행복하시겠네요.”
콰아아아앙!
화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비둘기들이 방주에서 튕겨 나간다.
거대한 방어막이 어느새 선체를 감싼 이후에는 탄력을 받았는지 더 빠른 움직임으로 접근하는 방주가 보였다.
-전진! 전진! 더 힘차게! 더 힘차게! 부딪친다! 꽉 잡으쇼!
-다들 진입할 준비! 진입할 준비 합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충격에 대비합니다! 곧바로 움직입니다! 매뉴얼대로 움직입니다!
“너나 시바 매뉴얼대로 움직여.”
-꽉 잡으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투명한 막에 부딪치는 방주가 보인다. 조금 뻘쭘하기야 하겠지만 그대로 돌아가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직 우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어코 방주가 결계를 비집고 들어온다. 이후에는 뻔하지 않은가.
귀를 울리는 굉음을 내며 방주가 기어코 신전에 처박혔고, 상륙작전에 성공한 돼지 새끼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배 안을 뛰쳐나왔다. 뭐라고 코멘트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시… 이발… 이 나쁜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