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4화 이례적인 일 (2) >
‘우리 얘가 기술이 없어서 그렇지 힘은 좋아요.’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필사적으로 역주행한 라파엘은 강했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묵직한 검으로 쓰로누스의 가슴을 관통한 녀석은 0.5 김현성 정도로 믿음직스럽다. 아니, 0.6 김현성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날개를 펼친 채로 계속해서 회색빛의 힘을 주입하는 모습.
모르긴 몰라도 저 회색빛은 비둘기들에게 꽤 치명적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상극인 건 너무 당연해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아마 독처럼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의 내부를 갉아먹고 있을 것이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놈의 얼굴이 내 예상이 맞았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괜… 괜찮….”
“죽어.”
“쿨럭… 쿨럭.”
이윽고 라파엘의 검이 녀석의 가슴에서 뽑혀 나온 순간, 천천히 허물어지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쪽에 손을 뻗으며 허우적거리고 있었지만 악마의 손아귀를 허용할 수 있을 리 만무, 살짝 몸을 뒤로 빼는 것이 맞다.
옆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놈의 뒤로 보이는 것은 피를 뒤집어쓴 채로 활짝 웃고 있는 라파엘이었다.
“형.”
‘아이고, 그래. 우리 회색빛의 용사 왔어? 아주 믿음직스러워. 그래. 그래야지.’
“형.”
우리 성검용사의 얼굴에는 해냈다는 성취감이 서려 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왔고 결국에는 그걸 보여줬으니 기분이 좋은 게 당연하지 않을까.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면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
얼굴에는 빛과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신념이 새겨져 있었다.
쓰러져 있는 쓰로누스와 우리 라파엘의 차이점이 바로 이거다.
왜 녀석이라고 의문점을 가지지 않겠는가.
녀석은 김현성을 악으로 규정했었고 결국 우리 회귀자에게 뚝배기가 터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의문점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라파엘의 마지막이 그리 좋았던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라파엘은 모든 의심을 이겨내고 이 자리에 있다. 본인이 버림받지 않는 방법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빛을 따르는 것.
빛이 인도한 길을 아무 의심 없이 걸어가는 것.
회색 비둘기와의 차이점이야 굳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그래. 네 역할이 컸지. 진짜.’
회귀자의 상처를 치료한 것도 라파엘이 아니었던가.
‘많이 듬직해졌네.’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승리하는 법이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생명유지장치를 떼지 않은 걸 이렇게 자랑스러워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그새 많이 자란 것 같지 않은가. 한때는 꼴도 보기 싫은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뭐라고 했어. 누나. 이거 떡상한다고 했지.’
내가, 시바, 이거 무조건 되는 거라고 했잖아. 그때 안 팔길 잘했네, 진짜. 이런 게 판단력이라는 거지.
올라갈 주와 내려갈 주를 구분하는 짐승 같은 감각. 투자의 귀재 이기영.
본래부터 몸을 꽉 채우고 있었던 회색빛의 마력은 조금 더 늘어나 있는 것 같았고 스탯도 상승한 게 눈에 띈다.
경험적인 부분이야 어쩔 수 없지만 라파엘은 규격 외로 강하다. 물론….
‘그게 쓰로누스를 이긴다는 말은 되지 않지만.’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는 꼴은 가관이다. 정신을 다른 곳에 빼앗겼던 건지, 아니면 애초에 막을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놈은 죽어가고 있었다.
물론 굳이 놈에게 시선을 고정시키지는 않았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라파엘이 먼저였으니까.
일단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여주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정말로 내 눈앞에 있는 모습이 현실이냐는 듯,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게 꿈이 아니냐는 듯 의문을 품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눈에는 눈물을 가득 담고 있어야 했고 종국에는 또르르 흘리는 게 괜찮을 것 같다.
‘아, 근데 얘 아까 내가 하는 소리 들었으려나? 욕도 했었던 것 같은데.’
사소한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뭐 문제는 없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자기 듣고 싶은 것만 듣는데 뭐.’
감동적인 재회에 병신 새끼 정도야 애교에 가깝다.
“라파엘….”
“네.”
“라파엘… 라파엘 님?”
“네.”
“라파엘 님.”
이제야 목 놓아 불러보는 그 이름, 내 동생 라파엘.
“네.”
다시 생각해 보니 눈물을 보이는 건 당당한 빛기영과 어울리지 않은 것 같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중간에 멈추는 것은 힘들지만 꾹 참아보자. 연약하지만 마음은 강한 뚝심 있는 포지션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고맙습니다. 라파엘 님. 제… 제 목소리를 들어주셨군요.”
“흐릿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듣고 있었어요. 깜깜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와중에도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서…. 네, 일어나라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어요.”
‘그건 내가 부른 거 아닌 것 같은데.’
“형을 구해달라는 목소리였어요. 아마 베니고어 님이 저를 인도해 주신 거겠죠. 이렇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오래 걸렸네요. 이렇게 앞에 서기까지.”
‘이야, 성장했구나. 라파엘.’
“정말로 오래 걸린 것 같아요. 제 미약한 힘이라도 보탤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
“아니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라파엘 님. 그리고… 절대로 작은 힘이 아닙니다. 선택받은 힘이고 대륙을 구원하기 위한 힘입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보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네. 정말로 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형. 몸은 괜찮으신가요? 어디 다치시거나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혹시 이 악마들이 형에게….”
이 새끼들 진짜 나쁜 놈들이야. 진짜 다 죽어야 되는 놈들이라구.
“이 악마는 어떻게… 죽이는 게 좋을까요?”
이런 것도 좋아. 하나하나 판단을 이쪽에 맡기니까 얼마나 행복해.
당연히 죽여야지. 지금 살려두면 화근이 될지도 몰라. 리타이어 상태기는 한데 원래 얘네 명이 조금 질기잖아.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는 끄덕여주자. 무언의 긍정에 라파엘이 검을 크게 치켜드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바로 옆에서 거대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여기다! 이곳입니다!”
“여기에 이기영이 있다!”
‘비둘기 새끼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리 만무, 귀를 울리는 굉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몸이 이동되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반응하지 못했지만 우리 성스러운 성검용사는 적들의 공격에 반응했다.
몸이 붙들린 채로 빠르게 이동되는 감각, 하얀색 빛이 이쪽에 쏟아지는 것이 보였지만, 회색빛이 시야를 환하게 비춘 이후에 들어온 공간은 아까 전에 있었던 장소와는 다른 장소였다.
“죄송해요.”
“…….”
‘이 새끼들 반응 빠르네. 척하면 척이죠. 시바. 케루빔 새끼. 벌써 풀어놨구나? 아 근데 쓰로누스는 막타 쳤어야 됐던 거 아닌가.’
라파엘이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쉬운 것이 사실.
만약 쓰로누스가 다시 일어나 인류에게 검을 겨눈다고 생각하면 위협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이건 안 좋은데.’
놈들이 쓰러져 있는 쓰로누스를 발견할 것이고 이기영이 다시 인류에 붙었다고 확정 지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쯤이면 이미 모든 걸 깨닫지 않았을까.
라파엘에게 안겨 이동되는 와중에도 생각을 멈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떻게 움직이는 게 가장 효율적인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
라파엘이 여기까지 닿은 것을 보면 아마 전장의 범위가 넓어졌을 것이다. 굳이 망원경으로 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다.
상륙작전은 성공했고, 조혜진은 부대를 나눠 신전 전체를 전쟁터로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조혜진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무언가 노리고 있는 게 있을 테니 그걸 처리하려고 하는 거겠지.
물론 이쪽의 구출도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정말로 조혜진이 내 구출만을 목적으로 이곳에 쳐들어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정도 리스크를 감당하려고 하는 게 맞다면 분명히 뭔가 숨겨둔 수가 있다. 분명히.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형? 일단 본대와 합류를… 아니, 방주 쪽으로… 길은 막혀 있지만….”
‘여기서 곧바로 라파엘에게 안겨서 방주로 되돌아가는 게 맞나.’
잘 선택해야 돼.
잘 선택해야 한다.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
‘세라핌.’
내가 태세 전환 버튼을 눌렀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마 직접적으로 전해 듣지는 못했을 거다.
케루빔과 세라핌은 걷는 노선이 달랐고 현시점에도 서로 다른 것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만약 알고 있다고 해도 세라핌이 그걸 믿어주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고….
이기영이 다시 태세 전환 버튼을 눌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본인이 믿고 있는 죄의 심판을 부정하게 되는 일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순식간, 선택 역시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아니요. 라파엘 님은 먼저 돌아가세요.”
“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계시면 곧바로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무리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은 주사위를 던져야 할 타이밍이다.
물론 이기는 게임이기 때문에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갚아야 할 게 있지.’
세라핌한테는 갚아야 할 게 있었으니까.
“하…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긴박한 일이에요.”
“…….”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꼭 해야 합니다. 믿어주세요. 틀림없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
“…….”
녀석은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 뜻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 이전에, 현재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라파엘 역시 의식하고 있다.
비둘기 병력이 이쪽을 압박하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나를 안은 채로 전투를 치를 수 없을 테니, 차라리 나를 안전한 곳으로 보낸 이후에 추적자들을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본인이 미끼가 되는 걸 상정하고 있던 찰나에 나온 제안이라는 거다.
선택지는 적었고 판단은 빠르다. 휙휙 뒤바뀌는 배경 사이로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어와 내리꽂혔다.
“적어도 안전한 곳에 세워 드릴게요.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대기하고 있을 테니 꼭 신호를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가능하다면 이쪽으로 향하는 악마들을….”
“네. 막아 볼게요. 형. 딱 20분, 20분 후에 찾아갈게요.”
“20분이 지나도 아무 신호가 없으면 곧바로 찾아와 주시면 됩니다. 꼭.”
‘꼭 찾아와야 돼. 알겠지? 나 버리면 안 된다.’
“네.”
대답을 하면서도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곧바로 몸을 날리는 것을 보면 추적자들을 빠르게 처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모양인 것 같았다.
시간이 부족한 것은 이쪽 역시 마찬가지. 말 그대로 이건 시간 싸움이다.
세라핌의 귀에 이기영 배신 썰이 귓구멍에 들어가기 전에 빠르게 작업을 쳐야 했다.
‘누나. 준비됐어? 지금 빠르게 해야 돼. 시간 없어.’
영혼의 파트너가 필요한 일.
‘이지혜. 시바, 얘 어디 갔어. 도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어?’
망원경으로 있을 만한 곳을 확인해 봤지만 도통 보이는 것이 없다.
‘아. 얘 진짜, 시바, 혹시 진짜로 영혼 빼앗긴 거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계속해서 망원경으로 격전지의 주변을 살피자 시야에 비친 것은 조혜진과 도미니온스.
-그녀를 어떻게 했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저 역시 말씀드렸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아… 시바. 누나 진짜. 하지 말라고 했잖아. 진짜.’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거 하고 싶냐고 진짜.
-그녀의 영혼을 되찾고 싶으신 거라면 와 보십시오. 그게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도미니온스에게 영혼을 빼앗긴 이지혜 하지 말라고. 시바, 한시가 급하다고 진짜.
-다시 한번 소개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도미니온스. 영혼약탈자 도미니온스입니다.
“아… 진짜 영혼약탈자 같은 거 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