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5화 가치 (1) >
‘꼭 지금이었어야 해? 꼭?’
괜스레 입안이 쓰다.
‘자기 욕심 채우겠다고 진짜. 이건 아니지.’
너무 당황스러운 광경에 헛웃음이 나온다.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언젠가 한 번 제대로 된 걸 보여준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던 거로 기억하지만 그게 지금이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와…. 너무 황당하다.”
안 그래도 바빴던 타이밍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 조혜진이 그렇다.
‘얘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걸 가로막아?’
정확히 뭘 목적으로 이곳으로 왔는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여기까지 온 것은 조혜진의 판단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한 번 더 전장을 둘러보니 이해가 간다.
덕구나 하얀이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 그 둘뿐만이 아니다. 거의 상당수가 모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리 전달받은 매뉴얼대로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었고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어느 정도 확신이 선다.
뿐만이 아니다. 병력 전체가 퇴로를 확보하지 않을 것을 보면 이기영 구출 이외의 다른 목적이 더 있다.
오히려 사방으로 퍼지고 있는 모습, 중대를 나눠 신전 안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나쁜 판단은 아니다.
‘그래, 나쁜 판단은 아니지.’
신전 안에서는 비둘기들의 날개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이곳은 적의 진영이었지만 오히려 전투의 이점은 우리 쪽이 가지고 있다.
압도적으로 숫자가 불리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을 지연시킨다면 지연시킬 수는 있다.
본래 덩치가 클수록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법이 아닌가.
말 그대로 이곳에 침투한 병력은 외줄을 타는 소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병력을 나눈 이유도 있지 않을까.
조혜진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는 건 너무나도 확정적인 이야기였다.
그 목표를 위해 뛰어다니던 조혜진을 갑작스럽게 등장한 영혼 약탈자 도미니온스가 막아선 것이다.
‘영혼 약탈자 도미니온스?’
한숨이 나올 정도의 스토리텔링, 영혼약탈자라는 설정은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르겠지만 네이밍 자체가 촌스럽게 느껴진다.
굳이 영혼약탈자라는 이름을 붙여야 했을까. 영혼 수집가 정도가 더 괜찮지 않았을까.
물론 클래식한 네이밍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현시점에서는 조금 무리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점점 표정이 구겨지는 이쪽과는 반대로 영혼 약탈자 도미니온스의 입가에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사실 조금 멋있기는 해. 나도 저런 설정 좀 집어넣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영혼약탈 기가 막히게 할 수 있는데.’
취향이 비슷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저게 먹힐까 싶어 의구심 넘치는 표정으로 망원경을 바라봤지만 내 심정과는 별개로 저쪽에서는 이미 저쪽만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영혼약탈자 도미니온스에게 이지혜의 영혼을 되찾기 위한 조혜진의 처절한 사투는 이미 옛날 옛적에 시작되고 있었다.
-도미니온스!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조혜진이 창을 내지르는 것은 찰나였다.
저렇게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조혜진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이지혜가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예상외로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빛의 장막으로 계속해서 조혜진을 압박하고 있는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센스 있다고 느껴진다.
‘저건 누나 아니네.’
로노베, 아니면 도미니온스?
뭐가 됐든 상관은 없지만 이지혜가 뿜어내는 빛은 실제로도 날카로웠다는 것.
공중에 살짝 뜬 채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빛을 뿌리고 다니는 모습에 이지혜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내가 벨리알의 도움을 받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몇 번이나 밀고 당기는 격전이 벌어진 이후에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조혜진과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영혼약탈자.
아직 규격 외로 접어들지 못한 조혜진은 일대일에서 그녀를 상대할 수 없다.
답답한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분노가 서려 있었다. 순수한 분노 말이다.
‘내 친구 진짜 불쌍해서 어떻게 해.’
너무 가슴 아프네.
-당신은….
-…….
-당신은 올곧은 사람입니다.
-절대로 용서 못 해. 절대로.
-부러지지 않은 점 역시 마음에 듭니다. 당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절대로 너만은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말 그대로, 당신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니 다시 정중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뭐?
-지금 당장 뒤를 돌아 왔던 곳으로 그대로 돌아가십시오. 돌아가신다면 지금의 무례를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실수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관리하게 될 새로운 대륙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평화롭고 정의로우며 올바른 대륙의 주민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신 같은 이들입니다.
슬슬 양념을 치고 있는 모습은 가증스럽다. 당연히 이지혜는 조혜진이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자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조혜진의 표정이 다시 한번 분노로 얼룩진 것이 보인다. 뭔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이 입술을 꽉 깨무는 모습에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혜진이 명대사를 투척할 거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입을 떼는 모습이 보였다.
-…….
-아주 작은 생명도 소중히 하는 사람이었다.
‘뭐, 누구 말하는 거야?’
-검이라고는 쥘 줄도 모르고 싸움이라면 피하는 사람이었어. 조금의 갈등도 불편해해 항상 양보하던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항상 강한 척하지만 속은 여린 사람이었다.
‘누군데. 그게. 내 이야기 하는 거지? 혜진아?’
-생채기 같은 상처로도 아파하던 사람이었다. 남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그 작은 몸으로 많은 것을 감당하던 사람이었어.
‘누구 이야기하는 거야.’
-이런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데. 아니, 누나 이미지 메이킹 왜 이렇게 되어 있어? 어떻게 한 거야? 얘 눈치 빠른데.’
-아니요. 당신은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 인간은 누구보다도 추악한 인간이었습니다. 살아갈 가치라고는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자는 대륙의 해악입니다. 당신 앞에서는 숨기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녀가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 인간인지… 그녀는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지혜 누나는 자아성찰이 잘 되어 있네.
-그 입 다물어라.
-…….
-…….
-…….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건 없어.
-…….
‘와, 명대사. 시바.’
와. 혜진아. 진짜. 와. 와. 이건 저장해야지.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혹시나 했지만 그긍더 급의 명대사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건 없어.’
전형적인 영웅전기에서나 나올 것 같았던 대사를 실제로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더 소름이 돋는 것은 조혜진의 얼굴이 무척 진지했다는 것. 말 그대로 자신이 내뱉은 말에 한 점의 의심도 없었던 것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저 대사를 눈앞에서 들은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점 하나였다.
-누구에게나 어두운 면이 있다. 인간은 선하기만 할 수 없어. 한때는 나도 너처럼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도미니온스. 너는 인간을 규정할 수 없어. 아니, 너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개인을 규정할 수 없다. 내 신념은 이미 수도 없이 부러졌고 나는 그렇게 올바른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오히려 그녀가 더 나보다 더 곧은 사람이었다.
-…….
-인간의 인 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네게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모난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인간을 이해할 수 있어야 인간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조금 더 객관적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 발자국 뒤에서 중립적으로 말입니다. 이게 그자의 영혼입니다. 이 탁하고 더러운 것이 바로 당신이 그렇게나 찾던 영혼이란 말입니다.
도미니온스의 손에 나타난 것은 영혼은 개뿔, 그냥 로노베가 만들어 준 건 같은 검은색 구슬이었다.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무는 조혜진은 저게 정말로 이지혜의 영혼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정말 더러운 영혼이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모욕하지 마라.
-…….
-그 사람을 모욕하지 마.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 그녀의 삶과 생각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으아아아….’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다.
‘아. 나도 영혼약탈자 이기영 해야 되나.’
-누구나 살아갈 자격이 있어.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은 그런 시답지 않은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천천히 창을 뻗는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흔들림 없는 얼굴로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은 반하고 싶을 정도로 멋있다.
뭔가 갑작스럽게 각성하는 듯한 흐름으로 가는 것 같진 않았지만 조혜진은 한 번 더 마음을 바로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깐 감았던 눈이 떠지는 것은 순식간, 영혼약탈자 도미니온스의 앞에 자리 잡은 것은 한 자루의 날카로운 창이었다.
-내가 그걸 증명하겠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저기는 이제 또 신나게 치고받겠네.’
계속 보고 싶기는 했지만 중요한 장면은 전부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거 저렇게 놔둬도 괜찮기는 한 건가?’
누나도 뭔가 생각이 있지 않겠어?
배신감 때문에 잠깐 정신이 나갔었지만 뭔가 이유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
조혜진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캐내 도움을 줄지도 모르고,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아무 의미 없이 자기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거라면 최악의 상황이라 할 수 있지만 이지혜는 목적 없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는 사실 자체는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쉬운 소리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대미지를 입는 건 녀석들이 아니라 우리였으니까.
빠르게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창을 내 뻗고 있는 조혜진, 그리고 그런 창을 회피하며 계속해서 장소를 옮기는 도미니온스.
안 그래도 복잡한 전장에 둘이 계속해서 뒤엉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 역시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망원경으로도 뒤져봤지만 보이는 것이 없다.
‘어디 있는 거야.’
아직까지도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잠깐 동안 고민하기는 했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내가 녀석이었다면 어디로 향했을까.
‘신인류 계획.’
틀림없이 그것부터 지키러 갔을 것이다. 많은 게 달려 있고, 녀석으로써도 많은 걸 투자한 계획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익숙하지 않은 날갯짓으로 날갯짓을 하려다 차라리 달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는 폭음이 들려온다. 이 주변까지는 아직 인간들이 들어오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이미 전장의 열기로 가득 차 있다.
‘박덕구?’
박기리 삼 남매가 운용하고 있는 병력도 근처에 있다. 아마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린다면 이곳으로 향하지 않을까.
-움직이라니까! 빨리!
마치 내게 말하는 것만 같다. 녀석의 목소리에 힘입어 발걸음을 한 번 더 내디딘다.
그제야 내 집보다 더 친근한 장소가 시야에 비친다. 거대한 문을 열자,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세라핌의 모습이 보였다.
백금색 비둘기는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의자에 앉아서 말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게 느껴진다. 조용하고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구태여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20분 후면 라파엘이 도착할 테니 천천히 빌드를 쌓으면 된다.
“여기 계셨군요. 세라핌 님.”
“…….”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약간의 의심이 서려 있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