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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36화 (727/1,590)

< 736화 가치 (2) >

‘뭐야 너 지금 나 의심하는 거 아니지?’

기분 탓일 수도 있다. 어쩌면 조금 묘한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벌써 이야기를 들은 건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전해 듣지 않았더라도 뭔가를 깨달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확률은 낮다고 생각했다. 세라핌은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기영은 이미 죄를 회개한 천사였고, 신인류 계획을 향해 나아가는 동료의 포지션에 서 있다.

나를 받아들이는 것을 제안한 것은 쓰로누스였지만 결정적으로 동의하고 자리를 열어준 것은 녀석이었다.

‘우리 동료잖아. 그렇지?’

뭐가 됐든 간에 일단은 모르는 척하는 게 정답이다. 녀석이 뭔가를 의심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변명할 필요도 없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맞다. 그게 자연스러운 행동이니 말이다.

“이곳에 와주실 줄 알았습니다.”

“…….”

“세라핌 님이라면 분명히 와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다행이로군요. 정말로 다행입니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의심하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네.’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지만 일단은 계속해서 오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허겁지겁 더미월드를 확인하는 게 첫 번째, 혹시나 다른 이상이 없는지 이곳저곳을 살펴본 이후에는 크게 안심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맞다.

당연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리는 만무했다. 이 작은 세계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곧바로… 바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잖아. 여기 위험하잖아.

만약에 누가 들어와 이 작은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면 어떻게 해? 우리가 함께 만든 세상 아니야?

신인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면 이 작은 세계를 먼저 지켜야지. 여기에 들어간 신성이 얼마야. 혼란을 틈타서 누가 이걸 노릴지도 몰라.

너도 알잖아. 최근 분위기 이상했던 거. 노리는 놈들이 없다고 해도, 전장이 되어버린 신전 안에 이걸 놓을 수 있겠어? 굳이 들고 움직이지는 않더라도 뭔가 조치를 해야 해.

살짝 세라핌의 얼굴을 바라보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넘어가 준 건가? 아니면 그냥 두고 보기로 한 건가.’

쉽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아마 후자이지 않을까. 어쩌면 죄의 심판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크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본 이후에는 이기영이 타락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겠지.

여전히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고 있는 모습, 녀석이 생각에 빠졌을 때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습관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고 있다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에 조금은 긴장이 된다.

세라핌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이 시야에 비쳤다.

“너도 여기로 먼저 와야겠다고 생각한 거로군.”

‘시바. 다행이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작은 세계를 지키는 것이 대륙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아니,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세라핌 님. 누군가가 이곳을 노리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분명히 노리고 있을 겁니다.”

“…….”

“습격이 있었습니다.”

“나도 알고 있어.”

“인간들이 아닙니다. 세라핌 님. 저를 습격한 것은 천사들이었습니다.”

“뭐?”

“가면을 쓴 천사들 말입니다.”

“…….”

“쓰로누스 님이 구해주신 덕분에 그 장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

“어쩌면 쓰로누스 님이 크게 다치셨을 수도….”

진짜 큰일 날 뻔했다니까.

쓰로누스한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나를 대신해서 검을 막아주는 걸 네가 봤어야 했는데.

아직도 그 참상을 떠올리자 괜스레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지금쯤 사경을 헤매고 있을 쓰로누스에 대한 걱정이 얼굴에 피어난다.

“쓰로누스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것보다 조금 자세히 말해줬으면 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당연히 말해줘야지.

“조사를 받기 위해 의회실로 향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커다란 굉음이 울리며 신전이 흔들렸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쓰로누스 님이 눈앞에 서 계셨습니다. 쓰로누스 님께서는 저를 안전한 장소에 데려다주신 이후에 전장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천사들 때문에… 그렇게 전투가 일어났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천사들이 아니라 천사라는 것만 빼면 거짓말은 전혀 없었다.

“처음부터 노렸던 것은 쓰로누스 님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저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

‘동요하지 않네.’

조금은 당황하거나 의심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사건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띈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현재의 상황을 침착하게 분석하려고 하고 있다.

‘생각할 게 많으려나.’

케루빔에게 먼저 이야기를 들었다면 생각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이기영이 배신했고 쓰로누스가 다쳤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해진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판단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아주 쉬운 퍼즐이다. 하지만 너무 쉽기 때문에 의심이 가는 퍼즐이기도 하다.

신인류 계획에 반대하는 천사들의 위에 누가 서 있을까. 만약에 이기영이 말한 것이 진실이라면 너무나도 뻔하지 않은가.

쓰로누스가 다쳤다는 거짓 메시지를 보낸 케루빔이야말로 모든 사건의 원흉일지도 모른다.

애초 사대 천사 중에 이 계획에 반대한 비둘기는 두 마리였고 쓰로누스가 리타이어 했다면 남은 건 하나이지 않은가.

‘너무 간단하지? 정말 너무 간단하잖아.’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케루빔이 신인류 계획 막바지에 찬성하고 신성을 투자한 것은 맞지만, 그 새끼는 계속해서 우리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다구. 훼방을 놓으면 훼방을 놨지, 절대로 협조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어.

조사기관이 설립된 건 누구 때문이지? 우리 그것 때문에 일정 늦어진 건 알지? 계속해서 너를 견제한 건 누구였어? 다 그 새끼야.

수상하지 않아? 갑자기 내가 배신했다고 메시지를 보내는 게 말이 돼? 생각해 봐, 세라핌. 내가 왜 배신을 하겠어? 나는 이미 죄를 용서받아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누구보다 대륙을 생각하는 게 바로 나야. 너 지금 그 새끼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

‘그 새끼가 거짓말한 거야. 쓰로누스를 찌른 건 그 새끼가 보낸 비둘기지. 내가 아니야.’

내 말이 맞아. 세라핌. 그 악마 새끼 거짓말에 속지 마.

‘우리와 함께하려고 하는 인간들을 죽여 대륙을 자극한 것도 바로 그 새끼라고. 정말로 모르겠어? 그 새끼가 혼란을 자초한 거야. 애초에 이 사달이 나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고. 진짜 목적은 전쟁이 아니었던 거야. 혼란을 이용해 신인류 계획을 망치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이기영을 제거하는 것, 그게 놈의 목적이야.’

너무나도 간단한 퍼즐이다. 아니, 간단한 퍼즐이라기보다는 스토리가 너무나도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놈도 확신을 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마치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딱딱 놓인 퍼즐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운 감이 있으니까.

‘너무 갑작스러웠어. 조금 급했나?’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좋았으려나?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이 간단한 퍼즐을 조금 꼬아서 선보였을 것이다.

개연성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라핌이 직접 찾아낼 수 있는 떡밥들도 여기저기 남겨놨겠지. 자연스럽고 극적으로 진실을 받아들이게 했을 수도 있다.

‘아… 시바, 내가 너무 급했던 건가.’

선물 상자를 너무 빨리 내밀었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세라핌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에라도 내 목을 꺾어버릴 것만 같다.

눈동자에는 적의가 깃들어 있었고 온갖 의혹과 의심들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 같다.

‘아, 이거 나도 그냥 지혜 누나랑 같이 영혼약탈자나 할걸. 괜히 왔어, 시바. 이래서 사람은 평소랑 다른 짓을 하면 안 되는데.’

뭔가 반전이 될 만한 요소가 필요했다. 이 상태로라면 녀석이 내 개소리에 수긍한다고 해도 마음을 쉽사리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그림은 만들어질 수가 없다.

갑작스럽게 초조해지자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인다. 옆구리에 딱 붙인 손으로 계속해서 허벅지를 두드리게 된다.

‘아, 시바… 지금이라도 그냥 갈까? 라파엘 불러야 돼?’

세라핌의 모습이 갑작스레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녀석이 선보인 행동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일어서 있는 모습, 팔짱을 낀 채로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다. 그 순간에도 손가락은 가만히 두지 못하겠는지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을 두드리고 있다.

녀석의 움직이는 손가락을 본 순간 이쪽은 손가락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처음 느낀 것은 아니다. 녀석이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건 나도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새삼스레 녀석의 모습이 나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완전 내 모습이잖아.’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마치 나를 따라 하는 것만 같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녀석은, 1회차 가면의 영웅의 행동을 따라하고 있을 것이다.

‘뭐야.’

저 행동뿐만이 아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나 걸음걸이도 굉장히 비슷하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전술 김현성을 카피한 것도….

‘세라핌이었어.’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정답에 근접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놈은 1기영을 카피하고 있다.

어째서?

케루빔이 말했던 추악한 욕망이라는 게 바로 이거야?

가정해 보자.

세라핌이, 저 백금색 비둘기가, 1회 차 가면의 영웅을 질투했고, 동시에 동경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니, 만약 정말로 1기영을 따라 하고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위 감정들이 기반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가면의 영웅이 보여주는 모습, 대륙을 위하는 마음, 능력과 성격, 인간인 주제에 천사들을 이끌던 모습이나,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방식 같은 것들에 매료된 것이 맞다면… 닮고 싶다고, 같아지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래.

이곳에 도착한 직후에 녀석이 내게 내뱉은 첫 마디가 바로 이거였다.

‘너도 여기로 먼저 와야겠다고 생각한 거로군.’

정말이야?

어째서 신인류 계획을 동의했는지도 알 것 같다. 그때도 비슷한 말을 지껄였었지. ‘나도 비슷한 걸 생각했었다’였나?

녀석은 신인류 계획 같은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생각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 것뿐이다.

성과를 빼앗거나 본인의 업적으로 남기고 싶어서 신성을 투자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주사위를 던졌을 뿐이다.

왜.

닮고 싶었으니까.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들어맞는 부분이 많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녀석에게서 내 모습이 보인다.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는 것,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는 것,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는 행동, 심지어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는 행동까지.

저 부분이 제일 재미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띄어놓은 부분이 가장 재미있지 않은가. 만약 녀석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면 녀석은 가면을 쓰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병신 새끼. 병신 새끼.’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걸리는 점이 많다. 곧바로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놈이 정말로 내 카피캣이 맞다면 해야 할 일은 뻔하지 않은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면 그만이다.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을 내뱉을 필요도 없다. 그저.

“세라핌 님.”

“…….”

“어쩌면 억측일지도 모릅니다. 흘려들으셔도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걱정이 돼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뭐지?”

“어쩌면 케루….”

까지만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역시…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병신 새끼.

가정이 들어맞았다.

이 비둘기는 가면의 영웅처럼 생각하고 싶어 하고, 가면의 영웅처럼 행동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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