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0화 가치 (6) >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얼굴이 살짝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고 있는 모습이 괜스레 눈에 띈다. 누가 봐도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다.
괜찮다고, 평소와 같다고 말해야 했던 것은 아닌지 떠올려봤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중에 꺼낸 말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리라. 방금 입에 담았던 것처럼…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이렇게 행복한데.’
이따금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지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텅 빈 공간 속에 혼자 남겨져 있는 것 같은 기분, 호흡이 가빠지고 속이 점점 메스꺼워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져 깊은 수면 속으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감각.
그 감각은 이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린다.
나 자신을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였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다.
검을 들지 않아도 되고,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되는 장소였다.
꿈에도 그리고 있었던 이상향 속에서도 여전히 김현성은 괜찮지 않았다.
“제, 제… 제가 괜한 이야기를….”
“길드마스터, 괜찮으십니까?”
“네. 혜진 씨.”
“형씨. 괜찮은 거요? 표정이 좋지 않은데.”
“네…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로 괜찮아? 안색이 창백….”
“그래. 나는… 괜찮다. 예리야.”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도망치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말할 것이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내 선택에 긍정할지도 모른다. 이기영은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현재의 자신이 쓸모없다는 것 정도는 그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럴 거야.’
무능한 자신보다는 그녀가 일을 처리하는 게 더 확실하다. 그녀의 말대로. 김현성은 실패한 인간이었으니까. 내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실패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잃기만 했으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선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다. 실수한다면 또 잃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 그냥 해본 말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정말입니다.”
“…….”
“…….”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까요?”
“네?”
“잠깐 따로, 이야기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고… 아마 다른 분들도 이해해 줄 겁니다.”
살짝 주변을 둘러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요.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무의식중에… 오늘은 모임이 있는 날이고 또, 기영 씨도 바쁘실 테니.”
“제가 그러고 싶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밖으로 나가시죠.”
먼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모임 장소를 벗어나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륙과는 다른 풍경이다. 네온사인에 슬슬 불이 들어오고 있었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려온다.
발걸음을 옮기기가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다. 이렇게 많은 사람 사이에 있는 것도 이상하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핸드폰을 만지며 걸어가는 사람, 친구나 연인과 함께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 술에 취한 이들도 눈에 보였고, 각자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인파들 사이로 섞이는 그의 모습도 눈에 보인다.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항상 생각해왔지만 어디에서나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만 같다.
자신도 비슷한 느낌일까. 나는 지금 어떻게 보일까.
살짝 옆을 바라보자 유리에 비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이질적이다. 새삼스럽게 이곳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장소마저 김현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잠깐 쓴웃음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대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기영 씨와 함께 걷는다면 조금은 섞이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네?”
“이곳 말입니다.”
“이곳이라고 하시면….”
“지구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걷고 있는 이 장소요.”
“…….”
“불편하신 겁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무척 편한 것 같습니다. 대륙에 비한다면 이곳은 위험한 장소도 아니고,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이 적으니까요. 적어도 그곳에 있는 것 보다는 덜 무거운 것 같습니다.”
“덜 무거운 것 같다고 하시면.”
“저… 기영 씨. 아까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니까요.”
“무의식중에 나온 말씀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입니다.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신 것 같아서…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응하는 게 힘이 드시는 겁니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기는 했지만 따로 실감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기도 한다. 적응했냐 적응하지 않았냐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당연히 전자에 손을 얹을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지구에서 생활하라니 힘이 드는 게 당연하겠죠. 그야 우리는 그 대륙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왔으니까요. 현성 씨 같은 경우는 저보다 더 오래 지냈으니, 혼란이 생기실 만도 합니다.”
“…….”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신이 어색하다고 느끼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말이 맞다.
“하지만 현성 씨뿐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과 섞이고 사회에 섞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가지고 있는 짐의 크기는 모두 다를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걸 느끼고 있을 겁니다.”
“네… 네.”
“모두가 힘드니 참으라고, 버티라고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바로 이거예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닫는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은 거였습니다. 저기 길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사람들입니다. 핸드폰을 만지며 걸어가고 있는 사람도, 모두 현성 씨와 같은 사람들이에요.”
“…….”
“서로 대화도 나누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는 서로의 이해자가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면 그게 가능해질 겁니다. 부족하겠지만 그게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더 가깝게 생각해 봅시다.”
싱긋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좁게는 대륙에서 함께 넘어온 우리 길드원들이 우리의 이해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여는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것보다 더 좁게는 제가 현성 씨의 이해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걱정이나 근심은 떨쳐 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기영 씨도….”
“세상에 그런 걸 무서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아마 다들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겁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니고요.”
“아….”
“그래서 드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저도 같았거든요. 나를 이해해 주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물론 현성 씨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네?”
“많은 걸 함께하고 많은 걸 공유하지 않았습니까. 제 생각이….”
“아, 아니요. 틀리지 않습니다. 전혀… 틀리지 않아요.”
“다행이군요.”
속을 좀먹고 있었던 벌레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불안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세차게 뛰던 가슴이 천천히 진정되는 것 같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별것 아닌 한마디였지만 그 어떤 말보다 더 위안이 되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저, 저야말로 다행입니다. 저야말로. 그렇게 생각해 주시고 계실 줄은….”
상황이 반전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물론 제가 현성 씨를 완전히 이해하고 현성 씨가 저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
“서로의 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까.”
“아….”
“현성 씨도 제가 가진 짐을 함께 들어주셨으니까요.”
“어….”
“현성 씨라면 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 어….”
“제가 주제넘게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도 현성 씨의 짐을 함께 든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부족했지만 말입니다.”
부족하지 않았다. 절대로, 단 한 번도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어… 아… 어….”
“제가 지금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게 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현성 씨가 제 버팀목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버팀목이 되어준 적이 없었다.
그는 내 짐을 함께 들어줬지만 나는 그의 짐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도망쳤다.
도망쳐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아니… 저… 저는….”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지기 시작한다. 호흡이 가빠지고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다. 주변의 것들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목소리도 잘 들려오지 않는다. 지독한 자괴감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쓰레기 같은 인간.’
“저는….”
‘이기적인 인간.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
눈앞에 있는 얼굴이 입을 크게 벌려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네가 내 짐을 함께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네 짐을 함께 들어준 것만큼 나를 지탱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눈에서 점점 눈물이 차오른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장소가 어디인지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고개를 황급히 돌리자 검을 들고 서 있는 내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김현성.”
황급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를 안고 있는 22살의 김현성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도망치는 거야?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절대로 도망치지도 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잖아. 형을 잃고 그렇게 다짐했잖아.”
뒤를 돌자 머리에 뿔이 달린 괴물이 말을 이었다.
“그의 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야. 너는 도망치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할 용기가 없어서 그저 도망치고 있는 거라고. 이 이기적인 자식.”
‘아니야. 나는….’
“그는 널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네 짐을 들어주기 위해 자신을 내 던졌어. 그 결과가 이거야? 내 모습이지만 혐오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구나. 넌 그의 옆에 설 자격도 없어. 너 같은 쥐새끼는 지옥에서 평생 썩는 게 어울려.”
‘나는 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 그럴 의도는 없었어. 이게 합리적이기 때문이야. 나는 모든 걸 망칠 거야. 모든 걸 망칠 거라고.’
“너는 그를 위해서 무엇을 했어? 그가 네 뒷바라지를 하며 힘들어하는 동안 너는 그를 위해서 뭘 했냐고 이 이기적인 쓰레기 새끼.”
‘나는… 나는….’
“이제는 네가 희생할 차례야.”
-김현성. 이제는 네가 희생할 차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