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2화 끝으로 (1) >
깜짝 놀란 것 같은 박덕구의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여전히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다.
기분 나쁜 땀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용인해 줄 수 있을 정도, 여기까지 정신없이 뛰어오며 전투를 치러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놀란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다. 상황실에 있어야 할 내가 신전 한가운데서 발견됐으니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당황할 만했다.
몇몇은 대놓고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돼지를 보고서는 크게 안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거 돼지 새끼라고 불렀다고 소문나는 건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조금 격해졌던 것 같기도 했다. 이지혜 덕분에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스트레스가 쌓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감정을 크게 드러낸 것 같았지만 곧바로 점잖은 모습을 보이자 서로를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다들 오랜만에 보네.’
세트나 다름없이 느껴지는 안기모와 김예리 마지막으로 황정연까지 자리해 있는 모습. 다른 길드원들은 다른 부대에 편입된 것 같았다. 밸런스를 유지해야 했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모르는 얼굴들이다. 심지어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 능력치를 보면 나쁘지는 않아 보였지만 어딘가 하자가 있는 이들이다.
지나치게 체력만 높다든가 지나치게 적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라든가. 내 기준으로는 써먹을 수 있는 이들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 저 같은 부대원들만 뽑아왔네.’
조금 정상적인 이들로 구성하면 어디가 덧나나 싶기도 했지만 스탯을 볼 수 없는 녀석에게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형님? 형님? 맞는 거요?”
‘그럼 내가 이기영이지, 누구로 보여?’
“부길드마스터가 맞네요.”
“들어와 있었으면 들어와 있었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주지! 어쩐지 이상하기는 이상했다니까! 언제부터 있었던 거요? 아니, 그것보다 어째서 여기 있었던 거요?”
“설명하자면 길어.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은 이동하는 게 좋겠다. 마침 나도 할 말이 많으니까 이 주변만 빠르게 벗어나자고.”
“아니, 일단 설명을….”
“빨리 가자고.”
“알, 알겠소.”
“여기 계셨군요. 부길드마스터. 이거 오랜만입니다.”
해적왕의 꿈을 이룬 안기모는 이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조혜진이 철저하게 숨겼다고 한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을 테니… 눈치가 빠른 녀석이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깨달을 수 있었으리라.
뜬금없이 알프스를 따라가라는 룰을 부여받은 것부터 의심이 됐겠지.
“오랜만.”
짧게 인사를 건네는 김예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지만 얼굴에는 반가움이 묻어나 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는 게 눈에 보인다.
‘좀 솔직해져라. 진짜. 너 정 많은 거 알아. 그렇게 쿨한 척하면 오히려 더 안 쿨해 보여요.’
마지막으로 안심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몰아쉬는 신입 길드원 알프스까지. 차마 이쪽에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인사를 건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그녀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갔으니까.
“고맙습니다.”
“네… 네! 부길드마스터!”
‘기합 들어가 있는 모습 좋고요. 자고로 신입은 이래야지. 패기가 있어야 된다니까, 패기가. 근데 사실 그렇게 고맙지는 않아요. 얘들이 반갑기는 반갑고. 솔직히 기분은 좋은데 내 기분이 좋다고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니자너.’
어쩌자고 여기까지 들어온 건지 묻고 싶기야 하다.
‘다른 건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뒀어야 했나?’
가면을 쓰고 만났을 때 다른 말은 하지 말라고 언급이라도 해야 했나 보다. 아니, 저 강아지가 나를 기억했다는 게 조혜진이 이번 작전을 기획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다 내 잘못이지 뭐.’
일단은 미소가 지어지니 그것으로 됐다.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일이 짜증 나기는 했지만 어차피 지금부터 알게 될 것이다.
살짝 주변을 둘러보자 박덕구가 뽑아온 반쪽짜리 들이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을 어떻게 한다.’
조금 급조되기는 했지만 간단한 방진 정도는 짤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껴진다.
‘애들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든든한 돼지 새끼가 있으니 전투 몇 번 정도는 치를 수 있을 것이다. 막 그렇게 입을 떼 지시사항을 전달하려고 했던 찰나였다.
“형님은 내 옆에 딱 붙어 있으쇼. 아니. 차라리 내가 들고 달리는 게 낫겠네.”
“뭐?”
“모두 움직이라니까!”
‘뭐야.’
“위치 잡고 갑시다. 거, 빨리빨리! 그러니까… 그게… 스물네 번째. 스물네 번째!”
‘뭐가 스물네 번째야?’
궁금증은 빠르게 해소됐다.
‘이 돼지 새끼….’
빠르게 진영을 재정비하는 부대원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아니, 시발 이게 뭐야?’
훈련이 잘되어 있다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박덕구 패밀리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보다 더 이상적이다.
‘이게 이렇게 된다고?’
기형적인 도형을 모아 끼워 맞춘 정사각형의 퍼즐 같은 느낌이다. 조금 투박하기는 하지만 뭐라고 트집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모양이 완성됐다.
맨 첫 줄이 아니라 중앙에 박덕구가 자리해 있는 모습, 아마 기본적인 진영은 다를 것이다.
조금 변형된 형태로 만들어진 이 모양은 후방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만 같다.
‘밸런스가 좋은데.’
전위에 박덕구가 없다는 게 커다란 약점으로 자리할 것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더 단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거북이 같은 느낌, 목이 언제든지 등껍질 안으로 숨을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지는 방진에 다른 사람을 보는 눈으로 돼지 새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너 시바 누구야.’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한 건 형님이었소.”
‘아무리 그래도 시바.’
“전진! 전진!”
부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박덕구는 내 몸을 최대한 방패와 가깝게 붙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말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은 느낌. 나름대로 편안한 승차감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거, 신전 밖으로 나갈 거요. 그런 작전이었으니까.”
“무슨 작전인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는데… 혜진 누님이 찾을 수 있는 걸 찾으면 바깥으로 나오라고 했다는 것 외에는… 그때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게 형님이었던 것 같더라니까. 형님을 찾고 바깥으로 나가는 게 내 임무라는 거지.”
“퇴로는 확보했고?”
“그런 자세한 것까지는 잘 모른다니까. 이번 작전이 완전히 극비였다는 거 아니요. 극비. 아 잠깐 앞에서 전투가 있을 것 같으니까. 그것 끝나고 마저 이야기합시다.”
시야가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굳이 망원경으로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거, 움직이쇼! 가만히 있지 말고! 김양! 거기서 뭐 해! 움직여야지! 어이! 정씨 아저씨! 힐! 힐! 타이밍 놓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 거기 좋다니까! 거기! 예리야! 매혹의 춤! 매혹의 춤!”
‘매혹의 춤은 하지 말지. 좀. 그거 정식 기술로 쓰기로 한 거야? 진심으로?’
“지금 딱 느낌 좋다니까! 지금 그대로! 하면 이길 수 있을 거요! 버티고! 버텨줘야지! 거기서 버텨줘야지! 아니! 거기서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 안기모 씨! 좀 메워주쇼! 아아아! 답답해 가지고! 진짜!”
‘이 새끼 뭘 알고 하는 거 맞는 거지?’
“정연씨! 보호! 보호! 잘했다! 나이스! 나이스으!!!”
목소리 하나는 우렁차다. 응원도 기가 막히고.
우당탕탕거린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어찌 됐건 뚫어내긴 뚫어낸 모양, 어미 곰이 새끼들 잘 있나 확인하듯 얼굴을 들이미는 박덕구의 모습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이 멍청한 새끼. 극비… 시바. 극비. 밖으로 나간다며 퇴로 확보해 놨냐고.”
소리를 지르며 등짝 스매시를 날리고 싶었지만 녀석의 부대원들이 들을까 그러기도 힘들다. 조곤조곤 힘 있게 말하니 내가 점점 열이 올라오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그… 그러니까.”
“당황하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해. 시바.”
“거, 그…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는데. 퇴로는 만들어 놓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솔, 솔직히 나는 잘 몰라서….”
“아니, 어떻게 몰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 건 혜진이 누님을 포함해서 몇몇이 전부요. 아마 그… 붉은용병의 용병여왕이나 검은백조에 박연주 누님. 김미영 팀장님이랑 공화국과 연합, 이 종족 쪽에서도 몇… 모르긴 몰라도 채 10명도 안 되는 것 같더라니까.”
“뭐?”
“거, 어디서부터 이야기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스파이가 있었다는 거 아니요. 밀정이라고 해야 되나.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의 편에 서고 싶어 하는 배신자 놈들이… 솔직히 어떻게 접선했는지도 모르겠다니까.”
조금 양심이 찔려오기는 했다.
‘아 그건 이쪽에서 한 거기는 해.’
“이야기가 잘되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지휘부 입장에서도 일이 그렇게 진행되다 보니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거 아니요. 혜진이 누님이 말하길 부품들을 구해오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소.”
“부품?”
“진짜로 부품을 가지고 와서 무슨 물건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되나.”
“나도 알아 그냥 표현이 그렇다는 거지.”
“아, 바로 그거요. 다들 자기 할 일을 끝내면 알아서 결과물이 나온다는 거지. 그래서 내가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가 없다니까. 아 그래도 하나 말해줄 수 있는 건 있는데.”
“뭔데?”
“이거는 혜진이 누님이 나한테만 말해준 건데.”
“응.”
“절대로 도망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니까.”
“…….”
‘대충 뭔지 알 것 같은데….’
사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기껏해야 퇴로를 확보해 성벽으로 되돌아가는 걸 상상했었다. 하지만 조혜진이 저런 식으로 입을 열었을 정도라면 확실히 지휘부 쪽에서 생각해 놓은 게 있다.
‘어떻게 싸우려고 그래?’
부품이라는 게 뭐지? 이기기 위해 필요한 재료가 뭐야?
텔레포트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방주를 통해 이곳으로 오지 않았던가.
‘제어장치?’
마력을 억누르는 제어장치를 손본다면 텔레포트로 도망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병력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 있다. 이미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는 거다.
박덕구의 말대로 후퇴한다는 선택지는 없다.
‘도망쳐야 하는데.’
카스가노 유노가 봤던 엔딩 장면에서는 틀림없이 성벽이 자리해 있었다.
김현성 배때기 엔딩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본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이 옳다.
무슨 방법이 됐든 여기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은 엔딩으로 향하는 방법이 아니다.
‘아. 이거 조금 꼬인 거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허벅지를 두드렸을 때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김현성의 목소리.
‘1회 차의 하얀 씨는 교국 전체를 옮겼었습니다.’
“어….”
‘대륙의 지도를 바꾼 거라고 말씀드리면 이해하기 편하시겠군요.’
머리로 망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
내가 엔딩 장소로 향할 수 없다는 그곳을 이곳으로 불러오면 된다.
“하… 하하, 시발…. 시발! 푸흐… 푸하하하하!”
드디어 알 것 같다.
“키야… 기가 막히네.”
조혜진은 북부의 성벽 전체를 신전 앞으로 옮겨올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