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3화 끝으로 (2) >
‘우리 혜진이 진짜 이 갈았네. 와, 왜 요걸 생각 못 했을까.’
너무 현실성이 없었기 때문에 아예 고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하얀이 이걸 가능하게 하냐 역시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으니까.
‘불가능할 게 뭐가 있겠어?’
정하얀은 이미 중력을 북부 전체에 떨어뜨린 이력이 있다. 방법은 다르다고 한들, 그녀가 상식을 벗어난 마법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중력 떨구기 마법학과를 나온 마법사가 순간 이동 마법학과의 권위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한소라의 신체 일부를 손에 쥔 정하얀에게 그런 구분이 필요할 리가 없다.
전공에 관계없이 정하얀은 마법이라는 커다란 학문에 능통해 있었으니까.
이게 가능하냐고 묻는 것보다 불가능한 게 뭔지 물어보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연구할 수 있는 시간만 충분하다면 우리 대마법사는 언제든지 결과를 만들어준다.
마력을 회복하는 동안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정하얀 역시 이를 갈고 있었다는 거다.
조혜진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이 둘이 합의점을 찾았다는 사실 또한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조혜진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까. 이 미친 작전을 기획한 것은 정하얀이 아니다.
‘참 의외기는 해.’
내가 아는 조혜진은 신중하고 안정 지향적이었다. 사실 성격 이전에 이런 종류의 작전에 조혜진은 절대로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체스를 둘 때도 그런 성향이 두드러진다.
조혜진이 모 아니면 도의 심정으로 주사위를 던질 때는 항상….
‘최후의 최후의 최후였으니까.’
그녀가 느끼기에는 현재의 상황이 최악처럼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입장에서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지.
김미영 팀장이나 전략기획실, 위원회본부의 중역들과 함께 계획을 구체화 시켰겠지만….
행동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그만큼 이번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높게 쳤다.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에 최소한의 개연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아마….
“내가 이걸 알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목적은 이기영의 구출만이 아니다. 이기영 역시 작전을 성공시킬 부품이다. 이 계획을 끌고 갈 만한 필수요소로 규정한 것이다.
단 하나라도 어긋나면 모든 게 무너질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도박에 다른 사람도 아니라 조혜진이 주사위를 던졌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뭐, 뭐 눈치챈 거요? 아니면 역시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거요?”
“덕구야.”
“?”
“혜진이가 나한테 넘기라고 한 거 없어? 밀봉해 놓은 거라든지, 뭐 편지 같은 거라든지 그런 거 없냐고.”
“아… 내 정신 좀 봐. 아!”
‘이 새끼 진짜. 시바, 내가 이거 눈치 못 깠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아니, 근데 이거 혜진이 누님이 절대로 열지 말라고 했었는데.”
“나 주라고 한 거야.”
“절대로 열지 말라고 했었는데.”
“절대로 열지 말라고 한 걸 왜 줬겠어? 빨리.”
“무슨 상황이 와도 열지 말라고 했단 말이요.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그때 그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니까.”
“아니, 시바. 잡소리 하지 말고 빨리 내놓으라고!”
“알, 알겠….”
품 안에서 무언가 뒤적뒤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녀석의 주머니 안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여신의 손거울.
‘시바, 생각대로 딱딱 되네.’
조금 전까지 짜증 났던 감정이 그대로 사그라지는 느낌. 초조하고 불안한 감정이 많이 희석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지혜 누나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리라.
문제는 신전 안에 있는 신성이 여신의 손거울의 전파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다음으로 필요한 부품이 무엇인지 역시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새끼들 이거 제정신 아니네.’
컨트롤 타워도 없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어?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근접한 거리라면 연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정 거리 이상의 장소에서는 여신의 손거울이 듣지 않고 있는 상황, 다른 부대가 가져올 부품은 컨트롤 타워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달라지기는 했지.’
이기영은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빛의 눈을 가지고 있었고, 아무에게나 메시지를 날릴 수 있는 빛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조혜진이 원하는 건 이런 종류의 컨트롤 타워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부대와 부대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장치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건 아마도….
‘막 사원, 아니, 아들 와 있었어?’
신전 안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부대 중 하나에 균열 박물관 5등급 관리자 막스가 포함되어 있다.
“덕구야.”
“왜 부르쇼? 아직 가려면 한참 남은 것 같은데….”
“막스는 어느 쪽으로 갔어?”
“…….”
“막스는 어느 쪽으로 갔냐고.”
“막스가 여기 와 있는지 형님이 어떻게 아는 거요?”
“알 만하니까 알지. 새로운 더미를 만들어서 보낸 건가? 본체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누구랑 갔어? 희라 누나야? 아니면 검은백조? 그것도 아니면 공화국 쪽의 길드? 왕국연합?”
“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우정클랜, 아니, 우정길드였을 거요.”
“뭐?”
“우정길드라니까.”
“그게… 시바 어디에 붙어 있는 길든데?”
“형님도 알고 있는 거 아니었소?”
“내가 그런 코딱지만 한 길드를 일일이 어떻게 기억해?”
“기억나지 않는 거요?”
“뭐가?”
“거, 옛날에 형님이 여장하고 나서 균열 박물관 체험하러 갔을 때 형님이랑 같이 다니던 사람들 말이요.”
‘여장한 거 아니야. 시바. 진짜로 변했던 거라고.’
“…….”
“다 린델 출신이요. 이철우, 국민지, 다른 사람들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그때….”
“…….”
“정말 기억 안 나는 거요?”
“아니. 기억나.”
하지만 표정이 구겨진다.
‘시바. 뭐야. 시바. 우정길드?’
머릿속에서 답이 없었던 놈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성 때문이 아니다.
‘그놈들이 이 작전에 참가할 깜냥은 돼?’
대륙에서 내로라하던 이들로만 꾸려진 길드 안에 녀석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더미라고는 하지만 남의 소중한 아들내미를 그런 놈들에게 맡겼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제정신인 거야? 시바, 제정신인 거냐고. 완전히 버러지들이었잖아. 답도 없는 놈들이었다고.’
박덕구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상황, 급한 마음에 허겁지겁 망원경을 돌려봤지만 이미 기억에서 흐릿해진 놈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이룩한 길드요. 원래는 클랜이었는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는지 내가 다 깜짝 놀랄 정도로 올라왔다니까. 이번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량이 엄청나게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소. 혜진이 누님도 그래서 별말 없이 작전을 맡긴 거고. 뭐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나는 모르지만… 아마도….”
일단 라파엘에게 메시지를 보내놓자 혹시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계속해서 이동하며 한참이나 신전을 돌아봤을까. 드디어 익숙한 인영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놈들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놈들 사이에 껴 있는 막 아들은 확실하게 눈에 들어온다. 굳은 얼굴 표정. 작고 여린 몸으로 웬 정체 모를 놈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게 보였다.
마음의 눈으로 놈을 확인하니 그제야 놈이 누군지 알 것 같다.
‘이철우? 맞잖아. 시바.’
스멀스멀 잃어버린 기억들이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 제발 아니었으면 했지만 나와 같이 균열 박물관을 다녀온 파티가 맞는 모양이다.
괜스레 욕을 내뱉으며 다시금 놈들을 천천히 확인했을 때였다.
“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달라진 놈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한 것.
‘뭐야 이 새끼들… 아이템 왜 이렇게 좋아?’
기본적인 스탯의 성장은 고개를 끄덕여줄 만한 수준이기는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녀석들로서는 이룩할 수 없었던 성장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삐까뻔쩍한 놈들의 모습이었다.
‘뭐야. 시바, 왜 이렇게 좋은 건데. 저게 다 얼마짜리야?’
클랜이 해체될 거라고 생각했던 내 판단과는 다르게 놈들은 오히려 더 똘똘 뭉쳐 있는 것 같다.
이철우와 국민지뿐만이 아니다. 당시에 함께 균열 박물관 나들이를 나갔던 이들 역시 온몸이 고급 아이템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새로 들어온 길드원들의 몸 곳곳에서도 빛이 나고 있다.
그중 한 놈은 아예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모습이다.
‘뭐야… 이 새끼들 이거 로또라도 맞았어?’
로또라도 맞은 게 아니라면 저런 겉모습이 설명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온몸을 고등급 아이템으로 도배해 놨으니까.
클랜에 여유 자금이 많아지니 다른 유명 모험가들을 영입했을 테고 압도적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클랜을 길드로 성장시킨 것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길드의 창립 멤버보다 수준이 높아 보이는 길드원들이 눈에 보인다.
심지어 그중에서는 나와 김현성이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었던 1회 차의 영웅들도 포함되어 있다.
돈이 좋아 온 놈들도 있겠지만 1회 차의 영웅들은 돈으로만 움직이지 않는 녀석들이다.
우정길드의 대외적인 평판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천사들과 전투를 하는 모습 역시 상당하다. 금방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을 고쳐주겠다는 듯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놈들의 눈에는 절대로 질 수 없다는 투지가 서려 있다.
‘와, 시바 이게 이렇게 되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착하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보상을 받게 되어 있다고.
‘저 스노우볼이 이렇게 굴러 왔다고?’
의미 없는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예전의 작은 파티에게 베풀었던 온정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힘들었던 파티에게 내밀었던 따뜻한 손길. 그때의 작은 손길을 기억하는 녀석들은 어느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커다란 중책을 맡고 있었다. 대륙에 없어서는 안 될 당당한 한 사람의 모험가로 자리해 있다.
감동적인 순간에 울컥하기는 했지만 이 자리에 와준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울지 마. 이기영. 여기까지 와준 영웅들에게 실례니까.
-철우 오빠!
-알고 있다. 민지야. 막스 님 괜찮으십니까? 이 주변은….
-조금 더 들어가야 합니다. 아직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이 근방 어디에 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지만….
‘우리 아들 근엄한 척하네.’
곧바로 퀘스트를 생성해 위치를 보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느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으니까.
예상대로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있는 막 아들의 얼굴이 환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아버지예요.
‘응. 아빠라고 불러야지.’
서둘러 몸을 움직이던 영웅들이 첫 번째 제어실로 들이닥치는 것은 순식간, 막스가 신전 안에 통신 타워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 직후에는 곧바로 여신의 손거울에 접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다렸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김미영 팀장입니다.
다른 목소리도 말이다.
-기영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