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4화 끝으로 (3) >
“…….”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요? 뭐 성공하기는 한 거요? 아니, 정말로 뭐가 있기는 있었던 거요?”
“…….”
‘일어났구나. 이 새끼.’
-기영 씨. 들리십니까?
‘그래, 시바 들린다.’
-저, 저 김현성입니다.
‘자기소개 안 해도 알아요.’
-김현성입니다.
‘두 번 말 안 해도 알아요.’
멍하니 전방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도 잠시.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무 예상하지 못 한 일이라 다른 반응을 보내기가 힘들다. 괜스레 주먹을 꽉 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구태여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저절로 고개를 돌리게 된다.
망원경 안에 비치는 것은 폐허에 혼자 남아 있는 김현성.
겉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거대한 뿔을 머리 위에 달고 있는 상태였고, 온몸이 검은색의 무언가로 뒤덮여 있다. 검은색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여전했다.
차이점은 녀석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는 것 하나였지만….
‘얼굴 하나로 이렇게 달라지네.’
괴물 같았던 모습이 간지나게 흑화한 주인공의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내가, 시바, 뿔 잘 어울릴 줄 알았자너.’
얼굴에 맞게 체형도 본래대로 돌아온 걸 보니 멋을 아시는 분이 저 형태를 디자인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붉어진 모습, 아니, 심지어 지금도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래. 다시 살아나니 얼마나 감격스럽겠어.’
여신의 손거울을 손에 꽉 쥐고 필사적으로 입을 열고 있는 모양새는 살짝 한심하게 느껴진다. 허둥지둥대는 걸 보니 본인이 뭔가를 잘못 누른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제기랄. 이거… 왜 안 되는 거야?
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아니야, 되고 있는 거 맞아.’
“네. 들립니다. 현성 씨.”
“현성이 형씨 일어난 거요? 진짜로? 정신을 차린 거요? 크으… 거 모든 게 잘 되고 있구만.”
맞아. 근데 얘는 어떻게 정신을 차린 거야?
이렇게 혼자서 본래대로 되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김현성의 이성을 깨우는 깜짝 이벤트라도 구상해야 하나 싶을 만큼 둠둠현성은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뭐 시간제한이라도 있었던 건가? 아니면… 뭐 각성 비스무리한 거라도 한 거야? 전형적인 주인공 성장 클리셰자너. 흑화한 이후에 제정신 차리고 내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거.’
모르긴 몰라도 김현성도 한 계단 더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나로서도 환영할 만한 부분이다. 혹시 둠둠현성이 배때기를 찌르는 게 아닐까 걱정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이성을 잃은 놈이 살살 찔러줄 리가 있겠는가. 그나마 이성을 되찾은 상태라도 되야 나를 배려해 줄 것이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물론 이미 배신당하고 분노하고 정신없는 마당에 배려고 뭐고 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기왕이면 이성이 있는 편이 더 좋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이 채널이 지휘부와 연결된 채널이라는 것.
개인 손거울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연락이 닿지 않아 허겁지겁 이 채널로 들어온 것 같았다. 김현성의 손거울이야 그 정도 권한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뭐 상관은 없기는 한데….’
지휘부라고 해도 채널에 들어와 있는 건 김미영 팀장을 포함해 몇몇이 전부였으니까.
-기영 씨? 기영 씨 맞습니까?
‘그럼 내가 이기영이 아니면 누가 이기영이여.’
“네.”
-무사하셨군요. 정말로… 정말로 다행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현성 씨는….”
-죄송… 흐으윽… 죄송합니다.
‘아니, 시바 울지마. 다른 애들 듣자너. 위엄 있는 모습 보여줘야지. 강한 모습. 시바. 정신적으로 성장한 모습. 시바.’
-제가…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일을 망쳐서… 도망치고 숨어서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어나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했습니다.”
-힘들게 만들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힘이,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짐을 덜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 저는 계속해서 숨어 있었습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제 앞에 있는 것을 외면해 왔던 것 같습니다. 함께 짐을 들어드린다 말한 주제에 계속해서 문제를 회피하고만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한 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얘들이 듣고 있잖아. 원래 지휘 채널에서는 사담 금지예요.’
“하… 하하….”
본인이 어떻게 힘든 상황을 이겨냈는지 말하고 싶은 저 심정은 이해하지만 멋쩍은 웃음을 보내는 것 외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는 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저를 깨운 것은 기영 씨가 보내준 메시지였을 겁니다.
‘아 시바… 나가고 싶다. 채널 뜨고 싶다.’
지금 나가면 1분 뒤에 이제 지휘는 누가 해줍니까? 묻는 목소리가 들려오겠지.
눈치가 있으면 5분 후에 들어와도 상관없을 것 같았는데 김미영 팀장을 비롯해 컨트롤 타워에 들어와 있는 이들은 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조용히 이쪽 대화를 듣고 있는 것 같아 괜스레 신경 쓰인다.
김현성 이 새끼는 정신이라도 나갔는지 계속해서 지 할 말만 이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다른 종류의 빌런이다.
-네. 죽지 말라고, 일어나 달라고 말씀해 주신 메시지 말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네… 네. 당연히… 네… 아무튼 일어나 주셔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아니, 시바 그만 좀 해. 진짜. 1절만 하라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2절 3절까지 할 것 같은 느낌, 감격에 찬 녀석의 말을 잘라내기는 싫었지만 일단은 빠르게 말을 이어야 했다.
“밀린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눈앞에 닥친 일들도 있고 여긴 개인 채널이 아니니까요.”
끊어줄 때는 확실하게 끊어줘야지.
-아… 네.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였지만 뭐 본인이 잘못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겠지.
“이렇게 깨어나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아니요. 제가… 한 일은….
‘아, 얘 또 말 길어지네.’
“조금 후에 봅시다.”
-아… 네.
“김미영 팀장님?”
-네, 부길드마스터. 김미영 팀장입니다. 길드마스터, 무사히 생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네…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두 분이서 조금 더 오래 대화하셨으면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아니요.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채널은 사담을 하라고 만들어놓은 채널이 아니니까요.”
‘내가 한 말 들었지?’
-…….
‘이제 실수한 거 깨달았죠? 이제 막 깨어나서 정신 없었죠?’
망원경으로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은 김현성이 비친다.
-지금 가겠습니다.
“굳이 오실 필요 없습니다. 현성 씨는 오지 말고 성벽에서 대기하세요. 어차피 근처에 계실테니.”
-네?
“전투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벽을 이쪽으로 불러올 거예요.”
-아….
-알고 계셨군요. 부길드마스터.
“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대충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무엇보다 혜진 씨가 이렇게 과감한 결단을 내릴 거라고는….”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
얘도 알 수 있을 정도면 진짜 힘들어하긴 했나 보네.
그 힘든 상황에 영혼약탈자 도미니온스랑 드잡이질을 하고 있다는 걸 떠올리자 다시금 이지혜의 인성에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필요로 하시는 데이터는 지금 보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네.
“신전의 대략적인 지도부터 보내드리는 게 맞겠네요. 위치가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만 제어실, 혹은 제어실로 추측되는 장소는 따로 표시를 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신전에 계속해서 신성을 공급하는 장소를 차단하면….”
-네.
“저도 모든 장소를 가 본 것은 아닌 터라 몇몇 장소는 확인이 불확실한 가능성이 큽니다. 추가로 현재 병력들이 있는 위치도 전송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김미영 팀장님께서 관리해 주세요. 성벽에서의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이 신전 지도를 다 외운 거요?”
‘박덕구 이 새끼는 내가 튜토리얼 던전에서 길 외운 것도 기억 못 하지.’
튜토리얼 던전 때처럼 화살표로 위치를 표시할 수는 없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면 기억에 남는 게 있는 법이다.
물론 지도를 만들어 놓을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에는 대략적인 정보가 들어가 있다.
-확인했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성벽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미 전투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혹시나 작전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보험도 들어 놓은 건가?’
여러 가지로 준비가 참 많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신전 안에 들어가 있는 각 부대에게 신전의 지도를 전송했습니다.
‘응, 나도 보고 있어.’
갑작스레 움직임이 달라진 이들의 모습이 망원경에 들어온다. 컨트롤 타워에게 계속해서 데이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공화국에 새로운 대장군들도 연합의 강자들도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현장에 나와 있는 야전 지휘관들은 끊임없이 여신의 거울을 두드리는 걸 보니 갑작스럽게 얻은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는 데 정신이 없는 모양. 박덕구 역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알프스가 이끌고 있는 이 부대는 굳이 이런 종류의 데이터가 필요 없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실시간으로 병력이 움직이고 있는 것까지 표시해 주고 있으니까.
망원경을 조금 더 위로 올리자 신전의 곳곳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눈과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
아마 바쁜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컨트롤 타워에서도 계속해서 내가 보내는 정보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장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고 이들은 야전 지휘관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데이터를 수치화해야 했으니까.
모든 게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컨트롤 타워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이 된다. 수백 개가 넘는 여신의 거울 앞에 사람들이 따닥따닥 붙어서 계속해서 허공을 두드리고 있지 않을까.
“덕구야. 여신의 거울 몇 개 더 줘봐. 네 거라도 내놔.”
“알, 알겠다니까.”
나라도 계속해서 힘을 보태는 것이 맞다. 마력으로 몇몇 개의 손거울을 띄운 이후에는 정신없이 손가락을 두드린다.
임무를 마친 우정길드는 다른 병력과 합류하기 위한 동선을 잡아준다.
미리 보낸 라파엘이 녀석들을 이끌고 이동하는 게 시야에 비친다. 1회 차의 영웅들 역시 마찬가지다. 녀석들은 벌써 두 번째 제어실에 들이닥쳤다.
적 병력에 포위되기는 했지만 주변에 녀석들을 도울 수 있는 병력이 있다.
규모가 작은 놈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은 아니다. 다소 능력치가 떨어지는 이들은 전투를 회피하면서 이동하며 신전에 눈들을 설치하고 있다.
어두웠던 맵이 점점 밝혀지고 여신의 손거울에도 점점 더 많은 데이터가 들어온다.
비둘기들이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런 종류의 전투에서 컨트롤 타워 유무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아. 너네 대가리는 뭐 하고 있냐고? 아직까지 신나게 싸우고 있을걸.’
아직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따가 확인해 봐야지.
아, 짜투리 시간에 확인해 봐야 할 것도 있지. 카스가노유노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손거울이 울렸다.
[네. 미래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 마취 물약 좀 먹어둬야겠네. 눈물 콧물 한 번 뺄 준비도 해주고.’
김현성이 이기영의 배때기를 찌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