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5화 끝으로 (3) >
‘저는 케루빔 님이 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굳이 변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나는 네 조언 따위는 필요 없다.’
‘조언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걸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받아들이라고 강요를 드리는 것도 아니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셔도 됩니다. 원래 제 말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
‘많이들 변하신 것 같더군요.’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
‘아니요. 쓰로누스 님도, 도미니온스 님도, 세라핌 님도 변하셨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두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아마 긴 전쟁 때문일 겁니다. 외부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가까운 곳에서 영향을 받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인간들의 생과 사를 직접 들여다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그럴 만도 합니다. 그들은 아름답지요.’
‘…….’
‘그들은 눈이 부십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 그리고 그들의 유한한 삶과 그들의 욕구는 모두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같은 걸 느끼셨을 겁니다. 보통 자신들과 다른 걸 동경하게 마련이니까요. 케루빔 님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그들의 불완전함을 동경하고 계실 거라고 말입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로군.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네 개소리에 일일이 대응해 줄 생각은 없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과 닮고 싶다고. 최소한 케루빔 님은 아니더라도 아마 다른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실 겁니다.’
‘아니, 우리들은….’
‘제 말이 틀릴까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때는 그 인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당시에 잠깐 말을 멈춘 것은 아마 정곡을 찔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세라핌은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의 행동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 인간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고 도미니온스는 그들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서적을 읽거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이미 도미니온스의 하루 일과였다.
쓰로누스도 다르지 않았다. 녀석은 인간들의 무구와 인간들의 검, 그들의 물건이나 그들의 전투 방식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본래 가장 신체가 약했던 쓰로누스가 자신과 검을 부딪치게 됐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변화였다.
분명히 변화였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낸 우리였지만 그렇게 급격한 변화를 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었다. 변화는 갑작스러웠고 또 급진적이기도 했으며 또 빛나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변하고 싶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미 변했을지도 모른다.
“유대.”
유대감.
인간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고 있는 이상한 끈.
그 끈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때부터 이미 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가면을 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었던 감정, 이를테면 전장에서 등을 맞댄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죽어갈 때 서로의 손을 부여잡거나 동료를 지키기 위해 대신 삶의 끝을 택하거나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사지로 들어가는 그들의 무모함은 모두 유대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느껴졌다.
쓰로누스 역시 그에게 유대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끈에 대해서 깨달은 것은 우리 중 쓰로누스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그걸 가지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지만 쉽게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우리들은 함께 태어나고 함께 존재하게 됐을 뿐이다.
서로를 위해 생의 끝을 걸지도 않고 감정도 교류하지 않는다. 의견에 대한 찬반과 그것에 대한 대립이 있고 집단을 형성하기는 하지만 인간들과는 다르다고 느껴진다.
정확히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지만 유대감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라핌, 쓰로누스, 도미니온스. 그리고 나.
“…….”
세라핌, 쓰로누스, 도미니온스. 그리고 나.
“우리는…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을까. 연결된 적이 있었을까.”
‘글쎄요. 저도 뭐라고 답을 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케루빔 님께서는 변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입 다물어라.”
‘중심을 지켜야 하는 이도 필요합니다. 상위의 존재라면 응당 그래야지요. 아시다시피 인간들은 불완전합니다. 그들을 관리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비인간적이어야 합니다. 어째서 대륙이 이렇게 망가졌는지에 대해 떠올려 보세요. 케루빔 님.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륙이 망가진 것은 인격신이 존재하고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현재 차원들에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바로 그겁니다.’
“…….”
‘인격신이 이 대륙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라 이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동정하고, 아끼고 심지어는 사랑하기까지 합니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 아닙니까? 관찰자로서 자리해야 할 신들이 인격을 가지고 있다니요. 하핫. 인격신들이 항상 필멸자들의 삶에 관여해왔어요.’
“…….”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한 이벤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항상 대륙은 그렇게 흘러왔어요. 자연재해, 전쟁, 악마의 침입이나 그런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 태어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대륙의 위기를 막은 것은 언제나 인격신 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억제했지만 그들은 항상 간접적으로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용사에게 성검을 내린 것도, 자연재해를 잠재운 것도, 타고난 운명을 타고난 인간을 막기 위해 지혜를 내려준 것도 언제나 인격신이었습니다. 네. 그들 역시 불완전합니다. 무엇이 대륙에 이로울지 알고 있으면서도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 대의를 그르칩니다.’
“…….”
‘더 이상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케루빔 님마저 변화를 추구한다고 하신다면 대륙은 이전과 달라질 게 없을 겁니다.’
“나는 네… 네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 추악한 악마야.”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면을 쓴 환상이 옆에서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게 보여 쓴웃음이 지어진다.
나는 다를 거라고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탓이다.
과거에 그가 말했던 충고 아닌 충고들은 이미 뇌리에 박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악마의 간교한 혓바닥은 마지막에 와서도 자신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케루빔 님은 달라졌습니다. 결국에는 달라지고 말았군요.’
“네… 네 말에 따르는 것 같아서였다. 그게 기분 나빠서였어.”
‘글쎄요. 이유야 크게 상관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케루빔 님이 달라졌다는 것 하나입니다.’
가면을 쓴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며 싱긋 웃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환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비틀거리며 일어나 낫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환상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개소리.”
‘제가 이전에 말씀드린 것을 끝까지 기억하고 계셨다면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끈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케루빔 님의 발목을 잡은 거예요. 힘차게 낫을 휘둘러야 할 대상은 제가 아니라 세라핌 님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으셨습니까.’
“분명히… 말했을 터다. 네 말대로 움직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라고.”
‘제가 만약 케루빔 님의 죽음을 원했다면 케루빔 님의 그 청개구리 같은 성향마저 고려해 말씀드렸을지도 모릅니다. 하핫.’
“그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다르다. 이 더러운 악마야. 나는… 나는 네 간교한 혓바닥에 넘어간 것이 아니야. 세라핌의 목을 베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내 의지였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네가 아무리 날 농락하고 싶어 한다 한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째서였습니까.’
“나도 알 수 없다.”
‘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도 중얼거리시지 않았습니까. ‘세라핌, 도미니온스, 쓰로누스, 그리고 나’라고. 모르긴 몰라도 유대감인지 뭔지가 케루빔 님의 안에 자리 잡았나 봅니다. 함께 태어나 같은 숙명을 함께 하기로 한… 형제. 네, 형제자매들에 대한 미묘한 유대감이 케루빔 님의 발목을 잡은 겁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
‘유대감이라는 말에 사전적인 의미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공통된 느낌, 끈과 띠라는 뜻으로, 둘 이상을 서로 연결하거나 결합하게 하는 것. 아쉽게도 세라핌 님께서는 케루빔 님과 유대감을 느끼지 않으셨나 봅니다. 하핫.’
“…….”
‘저는요. 이 유대라는 게 쌍방향이 됐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이라는 건 소통하기 때문에 비로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아무리 케루빔 님께서 유대, 유대 한다고 해도 다른 이들이 그렇게 느껴주지 않으면 허무한 일이 되어버린다, 이 말입니다. 이를 테면 벽에게 유대감을 느낀다고 하는 거나 다름이 없겠네요. 결국 개죽음 엔딩이네요. 개죽음 엔딩. 그러게 제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
‘변화하지 말고 완전해져야 한다고. 결국 당신도 멍청한 놈일 뿐이네요. 표정이 조금 안 좋으신데. 후회하시는 겁니까.’
“아니… 나는…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속으로 한 번 되물었지만 답은 여전했다. 슬프지도 않았고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다. 조금은 무감각해진 느낌이었다.
딱 하나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저 악마의 혓바닥을 뽑지 못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표현 그대로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라핌에게 최후를 맞이한 것도, 세라핌을 막지 않은 것도 후회되는 것은 없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시는 겁니까.’
그것은 아마 궁금증 때문일 것이다. 저 악마의 말에 저항해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는 사실 자체는 만족스러웠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유대감.”
그게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했으니까.
그게 뭔지 알지 못했으니까.
‘아마 너 같은 놈들은 평생 깨닫지 못할 거야.’
그럴지도.
‘참 웃겨. 마지막에 후회한다는 게 꿈의 실현이 아니라 개인적인 호기심이라니.’
그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은 과업은 실현될 것이다. 우리는 도구로써 태어났으니까.
‘널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사람이 없다는 게 가슴 아프네.’
우리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아. 끝이 왔다고 해도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아쉽구나. 조금 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도 괜찮았을 텐데.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네가 한 말은 내게 주박이 되었구나.
네가 내가 변화하기를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간에 말이다. 나는 너를 저주한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네 최후가 추할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거야. 여전히 네가 원하는 건 얻지 못하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하. 네가…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겠구나.”
잠들 뻔한 신체를 깨운 것은 거대한 폭발 소리였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게 된다.
이미 몸에는 힘이 다 빠져 있었지만 거짓말처럼 일어서게 된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가장 반가운 목소리이기도 했다.
“뭐야? 퍼랭이. 너 뒈진 거 아니지?”
“…….”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몸이 성치는 않네.”
“미안하게 됐군.”
“뭐. 지금이 남의 사정 봐줄 만큼 한가한 상황도 아니고. 나름대로 전시 상태이기는 하니까. 멋있게 회복해서 돌아오라고 말해줄 수가 없네.”
“…….”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밸런스는 맞춰줄게. 이 정도면 되나? 아… 생각보다 아프네.”
“여전히 어리석군.”
“남이사. 그럼 준비됐어?”
“그래.”
“다른 말은 필요 없지?”
“그래.”
시야에 비친 것은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낸 붉은 짐승이었다.
“마지막이 그리 나쁘지는 않겠군.”
어쩌면 저 짐승도 나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