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7화 끝으로 (5) >
‘진짜로 놓고 온 것 같은데… 큰일 났네.’
자신의 형제들을 부르며 생을 마감한 케루빔의 최후를 눈에 담아보려고 했지만 녀석의 근처에 덩그러니 놓인 가방이 시야에 들어온 직후에는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긴 가방은 내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만 같다.
안쪽을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마 완전히 개 박살이 났을 것이다. 신성으로 둘러싸인 연구실마저 폐허가 된 마당에 내 가방이라고 무사하겠는가.
뒤를 돌아 걸어가고 있었던 차희라 역시 가방이 눈에 띄었는지 슬쩍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저 누나도 가방 하나 구하고 싶어 했지.’
나 대신 상태를 확인해 주는 것 같아 기쁘기는 하다. 아이템 판정이 유지되고 있다면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아… 이거 걸레짝 됐네.
하지만 이내 가망이 없다는 걸 확인했는지 휙 하고 던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태여 희라 누나에게 메시지를 보내 물어볼 필요도 없다. 김현성의 컬렉션 중 하나는 이미 가방으로써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녀의 말대로 저건 이미 걸레짝이나 마찬가지다.
‘저기에 시바… 연금키트도 들어 있었는데.’
다시 만들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에 기가 찬다.
‘전설 등급 연금키트였다고… 용 숨결 물약이랑 빛 폭탄 물약도 다 저기 있자너.’
아니, 솔직히 그건 아무래도 좋다. 애초에 전투 물약을 쓸 상황 자체가 오는 걸 반기지 않았으니까. 가장 중요한 건 마취 물약이었다.
‘아… 시바. 이거 어떻게 하지.’
그냥 없이 들어갈까?
없이 들어가도 괜찮겠지? 그 정도 고통은 지금까지 잘 참아 왔잖아. 솔직히 이토 소우타 때도 마취 물약 없이 들어갔던 거잖아… 몸 함부로 굴리는 것 정도야 쉬웠다구….
하지만 그때의 이기영과 지금의 이기영은 다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겠다고 독기에 가득 찼던 초창기 이기영의 심정이 어땠는지 솔직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배 좀 부르고 인생 좀 낭낭해지면 바뀌는 게 사람이라고 했던가. 고통에서 벗어난 지 오래된 빛기영의 육체로 배때기를 찔리는 상황은 결코 반갑지 않았다.
‘아, 내가 방에 하나 넣어놓지 않았나?’
순간적으로 머리가 번뜩였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요?”
“문제는 무슨… 그나저나 잠깐 어디 좀 들렀다 가야겠는데.”
“가까운 거리요? 이제 곧 하얀이 누님이 소환할 것 같은데…. 아니, 그건 형님이 더 잘 알겠구나.”
“어차피 여기서 별로 안 멀어. 빠르게 다녀오자.”
“크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무슨 비밀병기라도 숨겨놓은 모양이요.”
‘비밀병기는 비밀병기지.’
감정 잡아주게 하는 비밀병기. 눈물 뚝뚝 흘리고 상황 연출해야 되는데 아프면 집중 못 하잖아.
아마 지금 상태로 배에 구멍이 난다면 비명만 지르다 시간이 다 가지 않을까. 마지막 인사를 할 여유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와, 시바. 이렇게 생각하니까 케루빔이 대단하기는 대단해.’
나 같으면 데굴데굴 굴렀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정확히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요?”
“한 시간 정도.”
“충분하겠구만.”
‘있겠지? 놔뒀겠지?’
비둘기들이 내 방을 한바탕 뒤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마취 물약은 무사할 것이다. 안쪽에 숨겨놨으니까. 뭐, 저들이 어떻게 찾을 수 있겠어.
괜스레 박덕구의 팔뚝을 툭툭 치자 황소처럼 방향을 바꾸는 녀석. 방까지 당도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디요?”
“조금만 더 가면 나와.”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간 직후에는 곧바로 안을 확인하기 시작, 예상대로 비둘기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이미 방이라고 볼 수도 없었지만 사실 이 방이야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없다.
곧바로 바닥을 두드린 이후에 잠금장치를 해체하자 바닥이 갈라지며 작은 창고가 시야에 비쳐왔다.
함께 들어온 박덕구는 신기했는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이내 내 모습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에 숨겨놨었던 거요?”
“응. 비상용으로 몇 개 챙겨놨지.”
용 숨결 물약 세 개. 빛 폭탄 물약 하나. 그 외에도 내가 생존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깡그리 모아 저장해 놓은 창고였다.
창고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협소하기는 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기야 한다.
‘역시, 시바, 준비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예비 가방도 하나 넣어놨었구나.’
작은 문제가 있었다면 마취 물약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
더 안쪽에 있을까 싶어 뒤적거려 봤지만 분명히 넣어놓은 적이 있던 것 같았던 녹색 물약이 눈에 띄지 않았다.
‘뭐야. 시바. 이거 왜 없어.’
고급 치유 물약도 있고 마나 회복 물약도 있다. 파란 길드에서 나오는 고급 연금 물약 세트는 물론이거니와 정식으로 판매되지 않은 여러 가지 물약들과 생존키트, 촉매들이 눈에 띈다.
‘이게 어디로 갔어?’
혹시 그것만 넣어두지 않은 것은 아닌가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 시…이발….”
“뭐요? 갑자기.”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진짜….”
“뭐 잘못되기라도 한 거요?”
‘이지혜 이… 시바… 너… 진짜.’
만약 누군가 이걸 가져갔다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뻔하지 않은가.
“와… 진짜… 이 누나… 진짜 어떻게 이래? 시바 진짜 이건 아니지. 상도덕이 있지. 이건 아니잖아….”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도미니온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혜진 역시 몸이 성하지 않다. 내가 보지 않은 사이에 엄청난 격전이 있었던 모양.
아니, 지금도 서로를 향해 창을 들이밀고 있다.
-도, 도망가세요. 혜진 씨.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진도 많이 뺐네, 진짜. 약탈당한 영혼이 튀어나와서 도망치라고 하는 것까지 진행됐어? 그것도 스토리야? 둠기영 아류 아니야? 개연성은 충족시킨 거 맞으시죠? 아니, 약탈된 영혼이 갑자기 도미니온스 몸으로 들어가는 건 무슨 설정이야?’
-제가 이 몸을 억누르고 있는 동안 도망가세요. 어서요.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시바, 진짜. 가증스럽다. 진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가증스러울까. 딱 저 표현이 가장 잘어울린다.
대충 봐도 견적이 나온다. 저 누나도 아픈 거 잘 못 참는 거로 유명한 사람이다.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린 채로 움직이는 것만 봐도 부자연스럽다.
도미니온스, 로노베와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이지혜는 저 고통을 참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몸에 떨림도 없고 솔직히 고통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누가 봐도 마취 물약을 꿀꺽한 사람의 모습이라 할 만했다.
정말로 고통스럽다는 듯이 몸을 떠는 연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실상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걸 본다면 가증스럽다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혜진 씨는 저를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어요. 네. 이자의 말대로 저는… 저는….
-세상에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믿어요.
‘혜진아. 속지 마라. 진짜… 니가 저 여우의 본 모습을 봐야 되는 데… 가증스럽다. 너무 가증스러워 치가 떨린다… 와….’
-지혜 씨가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뭘 말해줬는데.’
-간혹….
‘뭘 말해줬어?’
-자기 자신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타인이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 와중에 저 가증스러운 눈빛 봐 진짜.’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지혜 씨가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그러니까 기영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일단 나를 언급해 주는 건 마음에 든다. 게다가 기영이란다.
-부길드마스터는 자기 자신을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표현합니다만 그렇지 않아요. 그 누구보다도 가슴 따뜻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에요.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고 진정한 양보가 뭔지 깨닫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 이거 들을 만하다.’
-지혜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비하하고 폄하하지만 지혜 씨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필요한 사람입니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마음이 예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그건 아니야. 진짜 마음 하나도 안 예뻐.’
마음이 예뻤다면 내 마취 물약을 가지고 갔을 리가 없다.
-그렇지… 않아요.
-아니요. 제 말이 맞습니다.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혜 씨가 그렇게 스스로를 폄하할 필요는 없어요. 꼭 스스로 평가한 대로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좋다고 말씀하신 것 역시 지혜 씨였어요. 벗어나실 수 있어요. 아니, 제가 벗어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창을 들고 달려드는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이제 슬슬 클라이맥스로 넘어가는 모양인지 도미니온스도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눈물을 흩뿌리며 이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지혜와 이번에는 구해내고 말겠다는 집념으로 가득 차 있는 조혜진의 모습을 보니 당황스러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저 누나는 진짜 사람 감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혜진은 흔들리고 있다. 부러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아슬아슬하게 견뎌내고 있다.
마취 물약을 섭취한 이지혜에게 흔들림은 없다. 그저 계속해서 도망치라고 말하거나 이제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저게 연기라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운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
‘아니, 시바 그래서 내 마취 물약 어떻게 해. 진짜.’
남은 한 병마저 이지혜가 꿀꺽했다면 이제는 정말로 다른 선택지가 없다.
-하아… 하아….
-혜진… 씨… 저… 더 이상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쪽에서는 신파물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도대체 저게 무슨 상황인 건지 이해할 수도 없다. 대충 그런 분위기라는 건 알겠는데 전개를 따라가기가 힘들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혜진과 이지혜가 자리 잡은 곳이 마지막 남은 제어실이었다는 것.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른 이지혜가 조혜진을 저곳으로 안내한 거라고밖에 볼 수가 없다.
‘아… 시바, 이거 시작되겠구나.’
미처 다른 대책을 생각하기도 전에 조혜진이 창을 뻗는다. 커다란 굉음이 들려오며 김미영 팀장이 보낸 메시지가 들어와 꽂혔다.
-작전 성공했습니다.
‘아니. 잠깐만 아직 성공하면 안 될 것 같아.’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정하얀은 캐스팅을 내뱉고 있는 중.
-……!!
기어코 주문을 내뱉은 정하얀이 지팡이를 위로 크게 들어 올리자 비현실적인 광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북부 전체를 뒤덮은 마법진, 천천히 소환되기 시작한 거대한 성벽. 그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영웅들과 대륙 지도자들.
-가자! 빛과 함께 하는 영웅들이여! 대륙을 지키자!
교국의 혁명지도자 오스칼은 검을 들고 가장 먼저 성벽에서 뛰어내린다.
‘아냐. 아직 아니야.’
-베니고어 님을 위하여!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연세에 우렁차게 소리 지르는 바젤 교황과 신성기사단은 필사의 각오로 전투에 뛰어들고 있었다.
‘잠깐만….’
-은혜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중립국의 프리스티나.
‘너네 왜 그래. 단체로 왜 그래. 시바. 은혜를 갚을 거면 지금 오지 말았어야지.’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공화국의 지도자마저 대륙뽕에 취했는지 함성을 내지른다.
-진정한 화합을 위해!
‘아직 화합하지 마. 시바.’
이 종족 연합의 엘리오스.
-우리들은 오랫동안 많은 것을 잊고 살아왔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싸우자.
‘아니, 그냥 잊어.’
차라리 안 나타났으면 했는데 심지어 도마뱀들까지 등판했단다.
그리고.
-…….
결의에 찬 표정으로 검을 든 김현성까지. 녀석이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눈에 보인다.
‘시바… 아직 아니야. 이 새끼들아. 아직 아니라구… 현성아. 형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아직….’
김현성이 든 검이 평소보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기자.
‘아직 아니야….’
신화로 전해져올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전쟁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시이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