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8화 끝으로 (6) >
거대한 용들이 하늘을 뒤덮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대륙에 드래곤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수십 마리의 천사들이 드래곤에게 달라붙는 것이 보인다. 공중에서 뒤엉키며 격전을 펼치고 있는 모습 자체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의로운 광경이다. 당연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래픽으로 버무리는 장면들보다 더욱더 화려하다.
점점 숫자가 많아지는 천사들을 드래곤들이 견제하기 힘들어지자 엘프들은 계속해서 활시위를 당겨 드래곤들을 보조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드래곤들에게 다가가던 천사 중의 일부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여유가 생긴 용들은 거대한 이빨과 발톱으로 놈들의 몸을 짓이긴다.
밀집된 에너지를 담은 브레스가 쏘아지자 비둘기들은 곧바로 공중에서 산개하는 중, 물론 그 여파에 휩싸인 비둘기들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녹아버렸다.
전황이 유리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비둘기들의 공세를 견디다 못해 추락하는 용들 역시 시야에 비친다.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루기아는 아직까지 여유가 있는 모양, 그녀 역시 다른 드래곤들처럼 계속해서 브레스를 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드워프를 비롯한 이종족들 역시 칼과 도끼를 든 채로 성벽에서 뛰어내린다. 총력을 기울인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광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말 그대로 대륙의 사활을 건 전투나 다름이 없었다.
-저 악마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줍시다. 하나가 된 대륙이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줘야 합니다!
-공격! 공격!!
-손을 멈추지 마라! 계속해서 시위를 당겨라!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마지막 전투다.
북부 전체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보니 망원경으로도 시야를 잡기가 힘들다. 워낙 거대한 규모의 전투가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국의 병사들과 신성기사단들은 신성력을 뿌리며 적과 맞서고 있었고 공화국의 병사들은 마법을 흩뿌린다.
거대한 폭음이 연쇄적으로 들려오고 기상천외한 빛깔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모습은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대륙의 영웅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적과 마주하고 있는 장면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형님 우리도 빨리 나가야 될 것 같다니까.”
‘시바 나도 알아.’
왠지 모르게 모든 상황이 내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조금 시간을 끌려고 해봤지만 이미 박기리 삼남매는 이곳을 탈출할 준비를 마친 상황, 내가 뭐라 말을 내뱉기도 전에 이미 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아…… 이거 시바 그냥 들어가야 될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을 찾고 싶다면 찾고 싶었지만 현재는 그 방법을 찾기가 힘든 상황이지 않은가.
‘시간이 없어.’
그 말 그대로다.
‘준비하고 있어야 돼.’
타이밍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서 본 그 장면이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드래곤이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점점 이미 퍼즐이 하나 맞춰졌다.
희라 누나가 창에 꽂힌 상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마지막 전쟁이 터졌으니 희라 누나도 바로 달려가지 않을까. 조금 싸우다 보면 상처가 생길 테고 그 장면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라파엘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우정 길드와 함께 바깥의 전쟁터에 합류할 것이다.
제노지르아와 정하얀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마법을 구현시킨 정하얀이 마력을 회복하면 전장에 난입하는 건 시간문제다.
-정하얀 님…… 아직은…….
-아니요. 할, 할, 할 수 있어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정하얀 님. 조금 더 회복하셔야 합니다.
아무래도 정하얀은 곧바로 전장으로 합류하고 싶은 모양,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마법 할배들의 만류에 입술만 깨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조금 더 쉬어야지…… 상식적으로 평범한 인간이 이런 마법을 구현했으면 백 퍼센트 죽었을걸. 애초에 구현하지도 못했겠지만…… 구현하다가 터졌겠네.’
본인의 무리하고 있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저 휴식도 오래가진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쟤 마력 회복 빠르니까.’
제노지르아도 아직 최종보스처럼 쫄병들 풀어놓고 근엄한 척 하고 있는 분위기고…… 정하얀이 마력을 회복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세 시간? 아니, 다섯 시간 정도는 되려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아…… 시바 내 마취물약. 시바…… 아…….’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 같아 괜스레 입안이 쓰다.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합리화하게 된다. 이를 테면…….
아니, 근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얘를 어떻게 설득시켜. 이거 혹시 미래 바뀌고 있는 거 아니야?
이 정도로.
문제는 타이밍이 맞아야 된다는 것 하나가 아니지 않은가. 시간 안에 김현성에게 당도해도 녀석이 나를 찔러야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멘트 정리도 안 해놨는데. 너무 이상하잖아. 갑자기 막 어? 내가 그 가면쓰레기요. 하면 이상하잖아. 걔가 믿겠어? 분명히 안 믿을 걸 결국에 막 도리도리하고 그러다가 못 찌를 것 같다고. 이거 시간 부족한 거 아니야? 시바? 누가 옆에서 좀 도와줘야 되는 건 아니냐고…… 빌드업 할 시간이 부족한데…….’
물론 도와줄 놈이 있기야 하다. 1회 차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는 비둘기가 있기는 있으니까.
하지만 놈이 김현성과 만나면…….
‘현성이 또 발릴 수도 있잖아.’
우리 회귀자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세라핌은 존재만으로 김현성의 카운터나 다름이 없다. 뭐라고 입을 털기도 전에 다시 한번 벌집이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다. 물론 지금의 김현성은 조금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 돼.’
만약에 김현성이 세라핌과 대치하는 상황이 만들어 졌다고 해도…… 그 비둘기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되어 구구절절 이야기를 풀어 줄지도 의문이고…… 의외로 말이 많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있기도 하지만…….
구태여 그런 도박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와 꽂힌다. 다른 장면을 찾는 게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김현성은 최대한 세라핌에게 떨어뜨리고…… 배때지 엔딩 개연성이야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찾으면 되는 거니까. 만약 다른 사람으로 찾아야 한다면…….
‘누가 있을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정하얀?’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한소라 관련한 일로 기본 죄책감이 탑재되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정하얀은 뻔뻔하다. 만약 백금색의 검들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개수가 얼마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마력회복하는 시간이 조금 길겠네.’
그녀가 등판할 때까지 시간을 맞출 수 있느냐도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이래저래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 역시나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걸 떠올리게 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자 아까의 전장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왔다. 전체적으로 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현재의 전황이 어떻게 뒤집어질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게릴라전으로 내부에만 상처를 입혔던 방금과는 다르게 인간들이 대놓고 올인하고 들어오는 상황이니 놈들도 함부로 괄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라핌이 지시하지 않더라도, 지금쯤이면 컨트롤 타워가 만들어져도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점점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비둘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리안…… 님을 위하여.
-지원요청! 지원 요청해!
신전과 성벽의 끝에서부터 조금 씩 전황이 뒤집힐 조짐이 보인다.
‘이거 시바 진짜 대륙 지키기 하려면 할 수밖에 없겠는데.’
방법은 둘째 치더라도…… 일단은 이기영이 큰 맘 먹고 희생 하기는 해야 되는 상황처럼 비쳐졌다.
괜스레 시선을 돌리자 김현성이 전장에 합류해 천사들을 썰어버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전황 자체를 바꿔버리는 모습은 저절로 입을 벌리게 된다.
‘와…… 우리 현성이 확실히 세긴 세네.’
자기 자신을 조금은 믿기로 결심했는지 확실히 검이 살아 있다. 루시퍼의 힘을 마구잡이로 뿌리던 이전과는 다르게 지금 휘두르고 있는 것은 김현성의 검이다.
혹시나 또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지만 잠깐 동안 여유가 생긴 사이에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영 씨 어디 계십니까?
“지금 덕구랑 빠져나가는 도중입니다. 곧 컨트롤 타워에 도착할 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이쪽으로 오실 필요도 없고요. 일단 그쪽 전장을…….”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네. 거의 다 왔습니다. 용병여왕님과도 만날 것 같고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전투에 임해주세요. 전황이 그리 좋지 만은 않습니다. 지금 계시는 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이곳은 괜찮을 겁니다.
‘아닌데. 거기 도움 많이 필요한데.’
솔직히 말하면 김현성이 없어도 되는 전장처럼 보이기는 했다. 이미 김현성이 그쪽에 있는 중간 네임드 비둘기들을 처리했으니까.
김현성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인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일반 비둘기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보다 조금 무게감 있는 놈들을 잡고 다니는 게 더 유리하다. 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녀석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모습이 보인다.
-세라핌의 위치를…….
‘시바…….’
“글쎄요. 저도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확인이 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또 알려줬다가 현성 당하면 제자리걸음이자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하는 게 아니라…….”
-…….
“걱정하는 게 아니라 확률의 문제예요. 현성 씨는 세라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상성이 너무 안 좋아요. 지금 제가 그쪽으로 갈 부대를 편성했으니 다른 쪽에 집중해 주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검 용사파티 준비됐을 것 같은데. 라파엘도 컨디션 좋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너 못 이겨.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겨. 내가 죄를 사해 준다고 그래? 그거 그냥 하는 말이야. 네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 문제야. 물론 그게 너를 다시 살렸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잠깐이야.’
김현성 같은 놈들의 새겨진 상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심판의 검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불가능해요.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일단 컨트롤 타워에 들어간 이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후의 지시사항은 지휘부에서 지침이 내려올 테니 그때까지 전선을 유지하세요.”
-분명 이길 수 있습니다.
‘아…… 네에. 네에. 그러시겠죠. 너 주인공 병 심하게 걸린 거야. 원래 주인공들이 그렇자너. 한 번 진 적한테 다시 재도전하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자너. 근데 현실은 달라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내가 지금 배에 구멍 뚫리기가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전투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기영 씨가 도와주신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
내가 응원해 주면 이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질 리가 없습니다.
김현성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단박에 이해가 된다. 천천히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면서 확률을 한 번 계산해 보자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가능성은 있네.’
한번 시도는 해볼 만하다.
‘중간에 안 될 것 같으면 성검용사 파티 투입시키면 되니까.’
사실 그렇게 할 확률은 현저히 적다. 내가 판단해도 질 것 같지 않았으니까.
잠깐 동안 음성 메시지를 끊은 이후에는 곧바로 박덕구에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덕구야.”
“대화는 다 끝난 거요?”
“방패로 나 좀 받치고 있어. 거기에 좀 앉자.”
“뭐…… 이 상태로 달리라는 거요?”
“지휘부에 들어가기 전까지야. 어차피 지금 근처에 적들도 없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하라면 해. 그리고 네 부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여신의 손거울 전부 가져오라고 하고 정연 씨한테 여신의 손거울 좀 고정해 달라고…….”
“네. 부길드 마스터.”
“아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네.”
“여신의 손거울 좀 마력으로 고정시켜 주시면 됩니다. 이동하면서 확인할 테니 최대한 위치에 변함없이 부탁드립니다.”
“네.”
천천히 손거울들이 떠오르는 게 시야에 비쳐왔다. 아무런 화면도 떠 있지 않은 손거울에 천천히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망원경에 비친 김현성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준비가 됐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입을 열었다.
“거리가 좀 됩니다.”
-예.
“포인트 집어드리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요.”
광활한 전장이 한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