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0화 끝으로 (9) >
‘아, 씨…. 머리 아파 뒤질 것 같네, 진짜.’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난이도가 높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와. 씨….’
정말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허겁지겁 김현성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상황, 옆에서 박덕구가 주접떠는 소리마저 거슬리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방금 그거 형씨였소?”
‘시바 보면 몰라? 김현성이었잖아.’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진짜 끝을 알 수 없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형씨랑 형님이랑 뭉치면 적수가 없다니까.”
‘아니. 알겠으니까 조금 조용히 좀 해.’
“크으….”
“아, 좀! 입 좀!”
“아… 알겠….”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돼지 새끼에게 시간을 빼앗긴 사이에도 전장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시바, 그래도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엘룬의 망원경을 얻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동안 지력 능력치의 상승도 있긴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 역시 자만이었던 모양이다. 라파엘을 몰아보며 김현성을 그리워한 게 우스워질 지경이지 않은가.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김현성이 아니라 나였다. 열심히 스펙 업 한 이 자동차는 이기영이라는 파일럿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변명거리 정도야 있다.
커버해야 될 공간이 늘었으니까.
커다란 검은색 날개를 달고 있는 김현성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더 이상 제한적이지 않다.
김현성이 전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이 흙바닥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드넓은 하늘 전체가 김현성의 전장이나 다름없다.
말인즉슨 녀석의 앞뒤는 물론이거니와 위아래까지 커버해 줘야 한다는 것.
위에서 공격이 떨어질 수도 있고 아래에서부터 화살을 이 올라올 수도 있으니 시야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시바. 시바. 시바. 그래, 시바. 변명이지. 변명이야.’
녀석의 100%를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기영의 무능이다.
장담할 수 있다. 김현성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더 효율적으로 적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놈의 전부를 끌어내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기영 씨 괜찮으십니…?’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십니까아?
말을 걸 여유가 있었네. 한가롭게 남 걱정할 여유가 있었던 거지? 내가 어떤 상황인지 살필 여유가 있었던 거지?
놈이 멈칫거리는 시간은 불과 몇 초에 불과했지만 그 몇 초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 몇 초가 얼마나 중요한지 녀석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뻔하지 않은가. 본인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딜레이된 몇 초를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김현성이 더욱더 속도를 올리는 중, 뭔가 시무룩한 얼굴부터가 본인이 아직 여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심지어 불편한 표정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진짜 짜증 나네. 진짜로. 만족이 안 돼? 이걸로도 안 된다고?’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만 같다.
‘이것밖에 안 되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페이스를 빠르게 가져가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다.
회귀자의 100%를 끌어올리지 못하면 이 전술을 사용하는 의미가 없다.ㅋ
우습지 않은가. 병력의 잠재력을 끌어올리지는 못할망정, 병력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는 컨트롤 타워라니, 이렇게 무능한 새끼가 또 어디 있을까.
가능성은 낮지만 내가 김현성이였다면 이기영 손절 계획을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 이제는 쓸모 없구나 기영 씨도…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물론 김현성이 이딴 말을 지껄이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괜스레 짜증이 치솟기 시작한다.
‘이래도 부족해? 이래도?’
곧바로 여신의 거울을 두드린다. 이게 내 한계라는 걸 알고 있지만 눈을 멈추지 않는다.
어느새 다음 전진기지까지 당도한 김현성에게 계속해서 좌표를 전송하고 퀘스트를 내린다.
전장을 눈에 담은 것 역시 잊지 않는다. 어느새 내 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여신의 손거울, 그리고 조금 더 보기 편한 거울이 눈에 보인다.
살짝 눈을 돌리니 빠른 속도로 상황실을 셋팅하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제야 내가 박덕구의 방패 위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는 걸 인지했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래. 시바. 아까는 환경이 너무 별로였어? 그렇지? 시야도 너무 좁고 임시로 만들어진 상황실이었잖아. 기다려. 시바. 기다려. 이번엔 진짜 제대로 한다.’
다시 한번 화면을 눈에 담는다. 마치 곤충의 눈같이 가득 차 있는 다각도의 시야가 한꺼번에 머릿속에 들어온다.
순식간에 들어온 어마어마한 정보량을 처리하기도 당연히 쉽지 않다.
머릿속에 있는 프로그램을 돌리는 와중에도 김현성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결국에는 모호한 퀘스트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김현성을 좌표로 보낸 이후에 주변 상황을 녀석에게 맞추는 것이다. 줄타기처럼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이렇게라도 해야지.
-기영 씨?
‘보내고 있어요. 시바, 기다려요.’
21번 전진기지에 누가 있었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게 누구였지? 박연주? 박연주 있나?
한쪽 손으로는 거울을 두드리며 망원경으로는 검은백조의 길드마스터를 찾는다.
아니나 다를까 비둘기들과 함께 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박덕구 몰카를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색의 무구들을 계속해서 쏘아 보내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교국 8좌로서도 부족함이 없다.
“박연주 님. 그쪽으로 현성이 갑니다. 합류하는 그 즉시 제가 찍어드린 포인트로 함께 움직이세요.”
-어?
의문을 표시할 시간 따위는 없을 것이다. 곧바로 옆을 지나치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쳤을 테니까.
린델의 삼대 길드에 길드마스터를 꽁으로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곧바로 호응하기 시작하는 박연주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서로 연계하며 검을 휘두르며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유기적이다.
흩어졌다 붙었다 하기도 하며 서로 등을 맞댄 채로 검을 휘두르기도 한다.
김현성이 앞으로 전진 하는 사이 박연주는 김현성을 따라 붙어 검은색의 검들을 쏘아 보낸다.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 열리기 시작한다.
‘아, 시바. 체력 회복 깜빡했네.’
지금 곧바로 회복 주문과 버프를 갈아주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상황, 어쩔 수 없기는 했다. 두 사람을 위해 마법사들의 증원을 요청했어야 했으니까.
김현성과 박연주가 잠깐 움직임을 멈춘 사이 거대한 마법이 떨어진다. 두 사람은 폭발의 범위에 휘말리지 않는다.
미리 캐스팅해 뒀던 바람 마법이 두 사람을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확인.
-파란 길드마스터..
-오랜만입니다. 검은백조 길드… 확인… 마스터.
-네. 이렇게 일어나 계신 모습을 보니….
-확인.
잠깐이지만 두 사람은 추진력을 얻는다.
공중에서 휘리릭 돌면서 박연주는 온갖 화려한 기교를 부리며 사방 팔방에 검을 쏘아 보내는 중, 김현성은 박연주가 열어준 공간으로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달리기 시작한다.
-현성 씨 위에!
하늘에서 빛을 떨어뜨리고 있는 적 비둘기를 보고 박연주가 입을 열었지만 김현성은 동요하지 않는다.
근처 마법 병단이 보호 마법 주문을 완성했으니까. 심지어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쏘아진 브레스가 공중에 떠 있는 적을 한 차례 쓸어버린다. 박연주의 임무는 여기에서 끝.
‘쩔었지? 현성아? 쩔었지?’
-꼭 무사하세요. 파란 길드마스터.
-확인.
곧바로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향하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사방팔방에서 날아 들어오는 화살들의 위치를 계산하고 좌표를 쏘아 보내자 공중에서 방향을 선회하는 김현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금 쩔었지? 진짜? 장난 아니었지?’
제발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나름대로 공을 들인 한 수였으니까.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어.’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드래곤 브레스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고 있다.
마치 언제 브레스가 쏟아질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김현성은 공중에서 다른 비둘기들보다 한 발자국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브레스틑 모두 김현성을 빗겨나간다. 아니, 날개 끝부분이 살짝 그을린 것 같기는 한데… 아주 약간의 오차가 있었나 보다.
뭐, 저 정도면 그래도 정상참작 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괜찮겠지. 김현성도 눈치챈 것 같지가 않다. 계속해서 빠르게 움직이는 김현성의 표정에 변화는 없었으니까.
그래. 시바 녀석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아직 부족해? 아직?’
도대체 어디까지 해줘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을 지경, 전술 김현성이고 나발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와 내리꽂힌다.
‘이건 어때?’
-확인.
‘이렇게 한번 움직여 볼래?’
-확인.
여전히 변화가 없다. 내 실수가 있을지언정 김현성의 실수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 괜스레 나를 짜증 나게 만든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많이 봐야 돼.’
더 많이 봐야 한다.
‘더 빠르게 생각해야 돼.’
더 빠르게 생각해야 한다.
내 손가락질에 천천히 늘어나기 시작한 화면은 어느새 상황실 전체를 가득 메운다.
크고 작은 화면들은 계속해서 서로 다른 장면을 비춰주고 있다.
‘내가 조금 뒤 떨어졌나.’
김현성은 퀘스트 이상의 임무를 수행해 주고 있다. 몇 초 정도 딜레이 된 명령 체계 동안 할 게 없는 녀석이 다른 곳까지 커버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도? 이래도?’
눈에 핏줄이 터져 나올 것 같다. 머리가 핑하고 어지럽지만 높은 지력 능력치는 정신을 놓게 만들지 않는다.
계속해서 코피가 뚝 뚝 떨어졌지만 닦을 여유는 없다. 대충 팔뚝으로 닦자 얼굴이 피로 문질러진 것만 같다.
‘아직도? 아직이야? 이제 괜찮지? 그렇지?’
-조금 더 올리겠습니다.
‘이 개새끼.’
더 이상은 능력 밖이다.
‘이 이상은 불가능해.’
이미 머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한계를 넘어섰다. 하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퓨즈가 꺼지기 일보 직전이다.
‘더 이상 시발 뭘 어떻게 하라고 진짜.’
한 구역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머리와 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뭣 하지만 이미 평범함의 범주를 넘어 선 위업이다.
나조차도 이런 게 가능할지에 대해 고민해 봤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래. 이 방식으로는 이게 한계다.
‘조금 더 느껴야 돼.’
내가 직접 전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김현성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놈의 눈이 전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나도 김현성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
‘피부로 느껴야 된다고.’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종류의 정보가 필요하다.
이를 테면 감각. 절정에 이른 검사가 전장에서 느끼는 감각, 피부로 느껴지는 위협, 코 끝을 스치는 악취, 경험으로 쌓인 무의식적인 움직임, 바닥의 감촉, 공기의 흐름, 피부에 맞닿는 적들의 혈액.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모든 걸 나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고 있다.
‘가능해?’
불가능하면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아니, 아마 최대한 비슷하게 할 수 있을 거야.
일단은 김현성이 보고 있는 시야부터. 여신의 거울로 보이는 게 아니라 놈이 진짜로 보고 있는 것처럼. 망원경이 있으니까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망원경을 반으로 쪼갤 수 있나? 내가 잠깐 놈에게 망원경을 빌려주면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게 가능한가?
남아 있는 신성으로 그런 게 가능할까. 절박하기까지 한 느낌.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여전히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뒤떨어지는 기분이다. 계속해서 몇 발자국씩 멀어지는 듯한 기분은 괜스레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불가능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할 수 있어.’
시스템을 이용하면 가능해. 아니, 이건 처음부터 내가 가지고 있어야 했던 거였어.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할 능력이었다고.
그러니까. 해야 돼. 내놔. 그러니까 내놓으라고. 본래부터 내 거였어.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짜증에 바닥을 내려쳤던 바로 그때였다.
[신화 등급의 새로운 특성을 개화합니다.]
“내가, 시발, 이럴 줄 알았다고. 시바.”
[신화 등급 -회귀자 사용설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