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751화 (742/1,590)

< 751화 끝으로 (10) >

그것은 환희에 가까웠다.

이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건 분명히 환희와 비슷한 감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는 고양감이 전신에 퍼져나간다.

드넓게 펼쳐져 있는 전장이 오롯이 자신을 위해 펼쳐져 있다. 모든 퍼즐이 딱딱 들어맞을 때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인 쾌감이 등 뒤를 쓸고 지나간다.

사실 1회 차에도 2회 차에도 나는 전투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본 적이 없었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쪽이 더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어떻게 전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땀과 혈액으로 젖은 몸,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감각과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전투가 끝나고 나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고 전장으로 나서기 전에는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였다.

물론 간혹 다른 부류가 있기야 하다.

전쟁을, 전투를 진심으로 즐기는 이들이 있기야 하다.

이를 테면 용병여왕, 그녀는 1회 차에서도 2회 차에서도 전투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으니 그런 부류에 포함해도 되지 않을까. 피에 취해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 그런 부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붉은용병의 길드 마스터인 차희라는 정말로 순수하게 싸움을 즐기는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이런 종류의 쾌감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녀조차 그와 함께 하는 전장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아마 그녀가 느낀 것은 자신과 다른 종류의 감정일 것이다.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하늘 위로 치솟는 순간 쏟아지는 브레스가 느껴졌지만 굳이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다. 저게 자신을 스쳐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귓가를 곧바로 스쳐 지나간 용의 숨결이 눈앞에 있는 천사들을 휩쓸어 버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 열리는 것이 보였지만 그쪽으로 몸을 비틀지는 않았다.

내가 향해야 할 곳은 저곳이 아니었으니까. 더욱더 커다란 공간이 눈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 곧바로 날개를 치솟자 몸이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만 같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적들이 스스로 급소를 내어주는 것만 같다.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빛과 마법에서 오롯이 자신만 벗어나 있다.

‘이게….’

새롭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잘 짜여진 전장에서 느끼는 이 기분은 매번 새롭다.

‘즐거워.’

지독히도 증오했던 전쟁터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니,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투 그 자체에서 비롯된 즐거움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몸은 정상인 건가?’

현재 그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닐까?’

언제나 자신의 건강은 뒷전인 사람이었으니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수척해진 상태로 피를 흘리던 모습이 떠올리자 다시 한번 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부담되는 거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문제다. 컴퓨터조차 과부하가 걸릴 정도의 데이터양을 한 인간이 받아들이고 있다.

미래 예지에 가까울 정도로 전장을 컨트롤 한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인간이 이런 걸 실현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위업이다. 물론 그가 특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의 몸은 망가져 있었다. 어쩌면 한계에 다다랐을 수도 있다.

‘그만두게 해야 해.’

최대한 빨리 그를 내버려 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몸은 계속해서 이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멈추게 해야….’

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을까.

‘끝낼 수 있을까?’

그 없이 이 전장에 마침표 찍을 수 있을까.

“불가능해. 절대로… 불가능해.”

이 감각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어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기영 씨 없이는 이 전장을 마무리 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거지? 어디부터 깎아내리면 되지? 어디서 싸우면 되는 거야?

북부 전체에 펼쳐진 전장은 드넓다. 경험이 많이 쌓였다고 한들, 천재들이 바라보는 전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영 씨가 보고 있는 전장은 자신은 들여다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는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 오차는 없고 실수 따위도 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것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김현성이라는 자원을 잘 써먹을 수 있는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만약 그가 없다면…. 그래. 당장 눈앞에 있는 천사들과의 전투를 승리로 가져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어.’

자신은 그를 필요로 한다.

‘더… 더.’

빠르게 날개를 펼치며 검을 휘두른다.

‘더… 더!’

땅으로 내려온 직후에도 다리를 멈추지 않는다.

“확인.”

왼쪽에서 날아 들어온 창은 팔을 들어 쳐낸다.

‘더… 더 할 수 있어. 더.’

“확인.”

시야가 빠르게 뒤바뀐다.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 덕분에 전장을 제대로 살피기가 힘들다.

‘아직 더 할 수 있어. 더.’

몸의 속도를 눈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중요하지 않다. 내 눈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으니까.

“확인.”

잠깐 숨을 고른 사이에 곧바로 회복 마법이 몸에 떨어진다. 체력 회복 주문도 함께 외워 준 것 같았지만 체력이 떨어졌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거친 숨을 쉬고 있는 상황이었고 근육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힘든 것 같지 않다.

이미 뇌가 아드레날린으로 꽉 찬 것 같은 느낌, 일종의 존 상태에 들어간 것처럼 기분 좋은 감각이 계속해서 몸에 힘을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얼굴에 쏟아지는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진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도 기분이 좋다.

‘더. 더 할 수 있어.’

더 빨라질 수 있을 것 같다. 더 날카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지치지 않을 것 같고 온종일이라도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자꾸만 목이 마른 것처럼 몸이 계속해서 이 전장을 원하고 있었다.

‘아직 더 움직일 수 있어.’

하지만 그 이상의 퀘스트는 떨어지지 않는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데.’

하지만 그 이상의 지령이 내려오지 않는다.

어째서.

내가 한계를 맞았으니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기영 씨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내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다.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아마….

‘신체가 버티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계신 건가?’

정확히 몸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 자가진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검을 휘두르고 발을 놀리는 감각에 취해 다른 생각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전장은 길다. 빠르게 탈진하거나 금방 리타이어 하는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그의 판단이 맞다. 여기서는 페이스를 조절하는 게 정답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만 더 텐션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리를 시키는 것 같아 말을 꺼내는 것도 쉽지 않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지령 이외의 움직임을 선보이게 된다. 아마 조금은 여유가 있을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퀘스트가 도착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조심스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더 무리하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는 게 정답인 것 같았으니까.

“조금 더 올리겠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령이 오지 않는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계시고….’

정말로 내 육체가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여전히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갑작스레 몰려드는 자괴감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바로 그때였다.

“어….”

변화는 천천히 하지만 갑작스럽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변화를 보인 것은 전장을 바라보는 시야.

“이게… 이게… 도대체….”

마치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왼쪽 눈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져 눈을 매만졌지만 이내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한다.

눈에 비치는 것은 정면뿐만이 아니다. 옆, 그리고 뒤, 광활한 전장, 위에서 아래에서 다각도의 시야가 왼쪽 눈에 들어온다.

순식간에 들어오는 정보량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자신도 모르게 이해하게 된다.

눈앞에 보이는 천사가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 전장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내가 현재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

날개가 삐쭉삐쭉 설 것 같은 감각이 등 뒤를 훑고 지나가고 그 감각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전혀 새로운 감각들이 쏟아진다.

강아지는 후각으로 수만 가지의 정보를 받아들인다고 했던가. 현재 자신도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 생각했다.

적들이 내뱉는 호흡, 아군의 상태, 차가운 바닥과 말라 비틀어진 혈액, 공기의 흐름, 피부의 감촉, 지금까지 느껴왔던 모든 감각이 새롭다.

그중에서도 가장 새로운 감각은….

“하하.”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하…하하하!”

확신할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게 있는 법이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아마 기영 씨도 똑같은 걸 느끼고 있겠지. 호흡과 컨디션, 마치 전장에 함께 선 파트너처럼 모든 걸 알고 계시겠지.

내 뒤에, 내 앞에, 내 옆에서 함께해 주고 있다. 옆 곧바로 귀에 꽂혀 있는 수신기를 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런 건 필요하지 않으니까.

드디어 인정받은 거구나. 드디어 옆에 설 수 있게 된 거야. 하는 성취감이 온몸을 휘감은 것도 잠시,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보다는 속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

-정말로 괜찮으신 것 맞습니까?

검을 휘두르며 한쪽 손으로는 머리를 부여잡는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감각은 익숙하지 않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왼쪽 눈이 계속해서 지끈거린다.

‘어째서….’

어째서 이 천재가 자신을 배려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김현성… 김현성… 이 병신 새끼. 이 모자란 새끼…. 주제도 모르는….’

어째서 그동안 이걸 하지 않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은 불가능했던 모양이군요. 뭐 아쉽지만….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네.”

-상태를 두고 보겠습니다.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온종일… 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본격적으로 연결하겠습니다.

‘이게… 아직 연결된 상태가 아니라고?’

-지금부터는 구태여 좌표를 보내거나 설명드리지 않겠습니다. 느끼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네… 느껴집니다.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네.”

-행동하시면 됩니다.

“…….”

-뭐해? 움직여.

눈을 부여잡았던 손을 천천히 떼자.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전혀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