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3화 끝으로 (12) >
검은색 선이 지나갈 때마다 온몸이 잘리며 땅바닥을 나뒹구는 비둘기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멀찍이서 바라보면 저런 광경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저걸 지켜보고 있는 갤러리들 역시 김현성의 모습이 선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커다란 여신의 거울을 손가락으로 한 번 긋자 내 손을 따라가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저 거울에 새로운 기능이 걸린 것은 아니다.
-확인했습니다.
“네.”
김현성은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디로 움직이기를 원하는지 모든 걸 이해하고 있다.
사실 확인했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전하기도 전에 녀석은 이미 깨닫고 있었으니까.
어떤 경로로 녀석이 그걸 깨닫게 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녀석은 분명 내 생각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거, 시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도 읽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새로 얻은 특성의 이름은 이기영 사용설명서가 아니라 회귀자 사용설명서였으니까.
김현성이 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김현성을 사용하는 종류의 특성이라는 거다. 나는 녀석의 어떤 걸 느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김현성이 바라보는 시야. 녀석의 상태, 내가 원했던 것처럼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모든 걸 함께 느끼고 있었다.
‘시바….’
머리가 핑핑 돌아갈 정도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은 아마 그것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인이 갑작스레 초인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나는 그 힘을 휘두를 수 없지만 그 힘을 휘두르는 이가 느끼는 감각들을 느끼고 있다.
공기를 찢으며 이동하는 속도와 바위도 으깰 수 있을 것 같은 근력.
절정에 이른 검사의 검술과 녀석이 다룰 수 있는 힘, 그리고 전쟁터에서 쏟아지는 열기와 적의, 초인의 후각과 촉각, 고양된 기분과 감각, 모든 걸 느끼고 있다.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것은 내가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내가 어떤 명령을 원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것뿐이다.
겁이 많고 자존감이 낮은 김현성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는 모양. 누군가 전장에 함께 해준다는 건 녀석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 누군가가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인 빛기영이라면 특히나 그렇지 않을까.
‘아암, 그렇고말고.’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김현성은 선택을 두려워한다.
본래 녀석의 성향이 그랬던 건지, 아니면 만들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가면의 영웅이 회귀자에게 내린 시련은 녀석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지만 한편으로는 유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1회 차에 김현성을 생각해 보면 무척 뻔한 이야기지 않은가.
김현성은 모든 일을 망쳤다. 튜토리얼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녀석은 항상 최악의 선택지에만 발을 담갔다.
녀석이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놈의 동료들을 죽거나 반병신이 됐고 끝끝내 가면의 영웅이 내린 가면의 시련 앞에 무너졌다.
그 트라우마가 사라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녀석은 선택을 두려워한다.
아닌 척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해도 놈은 선택하는 것을 무서워한다. 가슴속, 아니, 영혼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그 잔재는… 김현성이 본래의 힘을 내는 걸 억제하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족쇄를 달고 있는 맹수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본인의 앞발과 뒷발에 커가란 쇳덩이가 달려 있는지도 모르는 맹수.
-하…하하!
김현성은 내가 자신에게 힘을 내려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보여주고 있는 무력은 모두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힘이다. 녀석은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해줄 수 있다.
김현성은….
‘X나 세. 진짜.’
개인적으로 측정한 전투력을 훨씬 상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직!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전장을 휩쓸고 있는 저 친구 좀 보세요, 여러분들. 시바, 만화에서나 나오는 모습 아니야?
-확인했습니다!
“집중하세요.”
-네!
환희에 찬 얼굴이 눈에 보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색 파동이 놈들을 뒤덮는다.
온종일이라도 싸울 수 있을 것 같다는 회귀자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다른 병력을 김현성을 위해 사용할 필요도 없다. 날아들어 오는 마법과 화살을 방어할 보호 마법을 지원해주거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른 영웅들을 밀어주지 않아도 된다.
김현성 혼자 움직여도 결코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거대한 빛과 화살, 창들이 사방팔방에서 날아들어 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굳이 마법사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는다.
왜.
녀석이 보고 있으니까.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모든 각도에서 볼 수 있었으니까.
물론 판단하는 것은 김현성이 아니다. 상황실에 앉아 있는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한다.
어디로 피하는 것이 좋을지 어떤 루트로 움직이는 것이 좋을지 판단을 내린다.
아무 근거 없이 내리는 판단이 아니라 내게 쏟아지는 모든 정보를 근거로 한 판단이다.
‘그렇게 이기적인 비롯된 판단도 아니지.’
김현성의 상태, 녀석의 경험치, 녀석의 생각. 이기영의 개인적인 의견을 거기에 덧붙여 가장 합리적인 루트를 찾아준다.
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시간은 찰나다.
어떻게 이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알 수 없다. ‘어째서 생각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으니까.
그렇게 만들어진 명령체계가 김현성에게 내리꽂히는 것 역시 찰나. 마치 뇌가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김현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녀석은 날아들어 오는 창을 하늘로 쳐낸다.
팔이 살짝 저릿하다.
날아 들어오는 빛무더기는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로 돌파한다. 화살은 날개를 펼치는 풍압으로 날려 보낸다.
가장 합리적인 공간으로 날개를 뻗는다. 듀렌달을 휘두르기가 무섭게 몇십 마리의 비둘기가 휩쓸려 나간다. 검은색 선이 다시 한번 하늘을 가로지른다.
‘시바! 개 빨라! 시바!’
하늘에 서 있는 검은색 선은 어느새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현성아 너무 빠르다. 시바.’
눈앞에 빅터하르트 영감이 고군분투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마무리하기에는 아까운 인간이니 살려두는 것도 괜찮겠지.
루트를 수정하자 김현성이 다시금 몸을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저 멀리서 보였던 영감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영감을 향해 창을 내지르고 있었던 비둘기들 몇 마리의 머리가 김현성의 손에 의해 땅바닥에 처박혀 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이후다.
-자… 자네는….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오랜만입니다. 영감님.
“따라 하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현성 씨.”
-아… 네.
금안 적안의 오드아이가 그렇게 간지났을까. 김현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영감은 허탈한 듯 말을 이었다.
-하… 하하…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군…. 신에게 선택받은 이가 하나가 아니었던 모양이야.
-…….
-…….
-아니. 신에게 선택받은 이는 하나입니다.
-?
-저는… 신에게 선택받은 이에게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아이고 현성이 기특하기도 해라. 그래. 내가 널 선택한 거야.’
-아니… 그렇지 않네… 자네는….
순식간에 영감이 멀어진다. 빠르게 달린 김현성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는 것이 느껴진다.
절정에 이른 검사의 팔이 검을 휘두르는 감각이 내 손 안에 그대로 느껴진다.
‘와, 이거 시바 나도 세질 가능성 있는 거 아니야?’
머릿속에 김현성의 검술이 있는데. 동네 양아치들 정도는 검술로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해서 적들을 뚫고 나간다. 흑색의 선이 한 차례 전장을 훑고 지난 곳에 남은 것은 한 차례나 늦게 땅바닥에 처박히는 비둘기들뿐이다.
‘가즈아! 가즈아!’
콰아아아아아앙!!
콰지직!
퍼어어어어어어엉!!
‘검만 쓸 수 있는 줄 알았더니 몸도 잘 쓰네. 왜 지금까지 안 쓰고 있었어? 너무 얽매여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니면 까먹고 있었어?’
검을 땅바닥에 꽂은 김현성이 비둘기들을 주먹과 발로 후려치는 것이 보인다.
퍼어어어엉!
비현실적인 소리와 함께 온몸이 으깨진 놈들이 김현성에게서 튕겨 나간다.
‘컨셉에는 조금 안 맞는 것 같기는 한데 한 번 뿔로 들이 받아보는 것도 간지날 것 같자너. 어차피 오늘 이후로는 뿔 쓸 일도 없을 텐데 한 번만 써보자.’
머릿속으로 다소 어처구니없는 지령을 떠올리자 곧바로 김현성이 천사 한 명을 뿔로 들이받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
확실히 그다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다.
‘아… 이거 진짜 너무 쉽자너.’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의 상황이 여유가 있다.
전력 차는 압도적이고 악마들 사이에 김현성은 양 소굴 안에 들이닥친 늑대나 다름이 없다. 어깨 쪽에 통증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아아악!!”
고개를 돌린 곳에 자리한 것은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네임드 비둘기.
‘방금 말 취소. 시바 방심하면 안 되겠다.’
화살을 쏘아 보내는 특기라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화살을 감지하지 못했다.
김현성 역시 깜짝 놀란 것 같은 반응. 화살이 박힌 건 자기 어깨인데 뭐 저렇게 놀란 건지 모르겠다.
이 새끼는 아프지도 않아? 고통에 익숙한 거야? 시바 졸라 아팠는데….
-괜찮… 괜찮으십니까?
“아… 네. 괜찮….”
-죄…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
“아니요.”
‘아… 진짜 이 새끼 또 겁먹었다.’
“통각 공유는 조금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정하세요.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네요.”
순식간에 거대한 분노가 머릿속에 내리꽂힌다. 미처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화살을 날린 네임드 비둘기의 얼굴이 피떡이 되어 있다.
얼굴이 완전히 뭉개져 있는 것으로 모자라 사지가 난도질 되는 모습은 조금 역하기까지 하다.
-개자식! 개자식!
‘알았어, 그만해. 둠현성 다혈질 시바….’
어쩌면 감정도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천천히 마음을 다잡자 안정됐는지 천천히 숨을 몰아쉬는 김현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거 진짜 되네.’
머리에 몰려 있던 피가 점점 빠지는 것 같은 감각이다. 녀석도 본인이 지나친 모습을 보였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지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저도 잠깐 집중력을 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아니… 정말로 죄송합니다.
“전투에 집중하세요.”
-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어깨가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흑색의 선이 움직이는 것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다.
아까보다 입술을 더 꽉 깨문 녀석은 오히려 더욱더 빨라지고 있었다.
폭음과 굉음만 계속해서 들려온다. 이제는 ‘확인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녀석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김현성이 검을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보인다. 노을빛의 검을 주문했지만 아쉽게도 둠현성 상태로는 나가지 않는 모양, 하지만 거대한 칠흑색의 기운이 적 진영을 덮친다.
모든 게… 모든 게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시바 진짜 졸라 멋있네.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그 누가 저 장면을 보고 전율을 느끼지 않을까. 저걸 보고 전율을 느끼지 않는다면 놈이 있다면….
‘그 새끼야말로 악마관계자지.’
이단심문관이라도 불러 심문하는 것이 옳다. 한쪽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와중에도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괜찮았습니다. 곧바로 다음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네.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환하게 웃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고 또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뭔가 찜찜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주 깊숙한 곳에서 두려움과 결심이 느껴진다. 찰나였지만 녀석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었다.
‘뭐야? 뭐가 무서워? 아까 그것 때문에 그래?’
네가 나를 속일 수 있어?
잠겨져 있는 걸 풀어내는 것 정도야 쉽다.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려고 생각하자 확실히 놈이 품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
-다음은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
-어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습니다. 기영 씨. 이렇게….
“…….”
-지금 움직이겠습니다.
‘하… 이 새끼 봐라.’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다.
‘이 개새끼 진짜.’
내게 있어서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다.
김현성은….
김현성은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끝을 자신의 희생으로 마무리하기로.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