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4화 끝으로 (13) >
다시 한번 녀석을 살펴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올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김현성 정신 성장은 개뿔.’
“…….”
‘이 새끼 이 정도면 무슨 정신병 있는 거 아니야? 진짜?’
“…….”
‘내가 병신이었지. 내가 병신이었어.’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여전히 당황스럽다.
완전히 미쳐 버린 상태에서 이성을 되찾은 걸 칭찬했던 내가 병신처럼 느껴진다. 제정신을 차린 이후에 뭔가 내면적인 성장을 이뤄낸 거라고 생각했었던 이기영이 병신이었나 보다.
‘난 또 진짜 성장한 줄 알았자너. 내면적인 성장은 개뿔 그딴 거 없었자너. 아니, 성장하기는 성장한 것 같은데 루트를 잘못 탔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진짜 회귀자 사용설명서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자너. 상황 제대로 꼬일 뻔했네. 진짜.
욜라 이상하긴 이상했다니까. 김현성이 갑자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할 리가 없는데.
말 그대로, 애초에 녀석이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것부터가 조금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내 몸에 무리가 갈까 봐 온갖 고집은 다 부리며 통신까지 차단했던 그 김현성이 갑작스레 함께해 달라고 말했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 긴가.
짐을 나눠 들기는커녕 짐을 떠넘겼다고 죄책감에 시달렸던 녀석이었다. 김현성 속의 이기영이 무척 위태로운 것으로도 모자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약한 새라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더 그렇다.
잠깐 까먹고 있을 뻔했지만 아직까지도 기억상실 기믹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
무슨 약을 먹고 왔는지, 갑자기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정말로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를 짓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거겠지.
어쩌면 보상심리 같은 것도 있을지도 모르지. 모든 걸 매듭짓기 전에 한 번은 더 교감하고 싶다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왜 그런 거 있잖아. 버킷리스트 같은 거. 마지막인데 혼자 싸우면 쓸쓸하잖아.
‘제정신 차린 게 자기희생 엔딩이나 찍으려고 그러셨어요? 왜, 시바 계속 도망치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새끼가 희생한다고 지랄을 할까 몰라.’
“…….”
‘와, 진짜 머릿속을 열어보고 싶네.’
이미 반쯤은 열어보고 있었지만 아주 세세한 생각을 전부 캐치하기에는 숙련도가 많이 부족한 모양, 하지만 굳이 보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있는 법이다.
녀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심리상태에 있는지 훤히 보인다. 정확하다고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녀석이 살아온 배경이나 감정을 느껴보면….
‘뻔하지. 뭐.’
잠깐 김현성한테 빙의해 보자면 이렇다.
‘지금까지 너무 도망만 쳐온 것 같습니다. 제게 주어진 역할이 뭔지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해 왔던 겁니다. 제가 회귀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겠습니다.’
그렇지. 도망쳤지. 근데 그게 왜. 누가 너보고 도망치지 말라고 칼이라도 겨눴어? 사람이 도망 좀 치고 회피할 수도 있는 건데 너는 뭐가 그렇게 문제야?
어쩌면 세라핌에게 죄의 심판을 받았던 것도 떠올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수많은 죄를 저질렀고 이 죄들을 외면해 왔습니다. 계속해서 생각했었습니다. 어쩌구. 속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항상 생각해 왔었습니다. 저쩌구. 이제 이 죄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어쩌구. 드디어 죗값을 치르고 어쩌구. 모든 것을 떠안고 어쩌고.’
마지막 순간에 주절거리며 명대사를 쏟아낼 빌드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저런 대사를 지껄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내가 쓰레기라 그런 것이 아니라 김현성이 정신병이 있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누가 네 죄에 대해서 신경이나 쓴데? 1회 차? 그건, 시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그리고 이미 2회 차 시작한 마당에 뭐…. 이미 세탁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세요, 진짜. 이런 놈이니까 신한테 사랑받고 영웅이고, 주인공 포지션 잡는 건 이해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 진짜.’
김현성이 1회 차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빛의 성자 이기영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필터링을 한 이야기를 쏟아냈다는 것 역시 뻔한 이야기다.
전쟁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이야기했지만 그 전쟁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땠는지, 얼마나 많은 인간을 죽였는지, 놈의 기준으로 얼마나 비인도적인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도 묘사하지 않았다.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부분 역시 존재한다.
그러니까 1회 차, 평범하고 순수했던 1회차 이기영이 가면의 영웅으로 각성하기 전, 박덕구의 죽음에도 김현성이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 역시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아니. 손을 거든 건 맞긴 해?’
대충 거들었을 수도 있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지역에 통째로 마법을 떨어뜨린다는 건 기득권들의 허가 없이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니까.
최종적으로 결제를 내린 건 당시 제국의 여황이었을지는 몰라도 당시 기득권이었던 김현성의 의견도 들어가지 않았을 거라고는 장담 못 해. 그래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김현성이 기여했든 기여하지 않았든 지금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는 거야.
사람마다 입장 차이라는 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나는 가면의 영웅 본인이 아니었으니까. 녀석의 유지를 이어받기는 했지만 놈이 분노했다고 해서 나도 분노하라는 법은 없지.
-기영 씨?
“…….”
-기영 씨?
“네?”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루트는 계속해서 찍어드리고 있는 것 같은데. 뭐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잘하고 계십니다. 아주 자알 하고 계시네요.”
-…….
“전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주 대다안 하십니다. 혼자서도 전부 마무리 지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네.”
-죄… 죄송합니다.
“네?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뭐가 죄송한데요? 뭐가 죄송한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니, 뭐가 죄송한지 알아야 사과를 받아주죠. 그냥 지금 상황 모면하려고 대충 던지는 말이나 다름없잖습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눈앞에 있는 거나 신경 쓰세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그러니까, 아까 그 명령을 무시하고 움직여서…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나서… 죄송합니다.
“그것 때문에 화난 거 아닙니다.”
-제가 부주의한 탓에 상처를….
“아니, 상처를 입은 건 현성 씨지 제가 아닙니다. 통각 차단했으니까 안심하시고 마음껏 싸우세요. 말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요?”
-…….
순간적으로 기분이 시궁창으로 나가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내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녀석의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뭔가 집중력 자체도 슬슬 떨어지고 있는지 전투에 집중도 못 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진짜….’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솟아 올라 잠깐 억지를 부리기는 했지만… 확실히 영향을 받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너무 심했나?’
그래도 제 딴에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형제 같은 친구랑 마지막에 마지막에는 전장에서 함께하면서 뭐 밀린 이야기도 나누고 정서적 교감도 하고 멋진 대사 쳐주고 눈물 한번 쫙 빼준 이후에 산화하는 그림 그리고 있을 게 뻔하자너.
근데 마지막이 이렇게 됐으니 얼마나 기분이 더럽겠어.
물론 아직 마지막이 다가온 것은 아니었지만 김현성의 기분을 나락으로 처박기에는 충분한 모양이다.
정상적인 마지막 인사를 하지는 못할망정 전부 다 망치고 빛기영 기분 잡치게 한 것으로 모자라 어째서 기분이 상했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속이 터질 지경이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번 구덩이 속으로 점점 파고드는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하는 생각부터 꽤나 순도 깊은 자괴감 마저 나를 덮쳐온다.
열심히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며 적들을 쓸어나가고 있지만 흔들리는 동공과 괜스레 힘이 들어간 전신은 녀석이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
-그러니까….
“…….”
‘그래. 시바, 그만하자. 그래도 제 딴에 한번 해보려고 한 건데. 생각해 보면 내가 이렇게 흥분할 이유도 없지. 뭐.’
어차피 김현성의 계획이 실제로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엔딩에 나와야 할 장면은 이기영 배때기지 김현성의 자기희생이 아니었으니까.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자기희생 엔딩보다 더 끔찍한 엔딩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나은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김현성은 죽지 않을 거고 희생도 하지 않을 거다. 희생하는 것은 회귀자의 동료지 회귀자가 아니다.
‘내가 너 대신 희생하겠다.’
내가 생각하고도 조금 가슴 저릿한 멋이 있다.
‘진짜 멋있기는 하네.’
자기 자신한테 살짝 취할 정도로 울림이 나쁘지 않다.
‘아, 씨.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취 물약이 또 아쉽네.’
-그러니까… 제가… 죄송… 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네.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흥분하신 것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현성 씨가 혼자 판단을 내리면 이걸 하는 의미가 없잖습니까. 이 정도 고통은 괜찮으니 지시를 무시하지는 말아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절대로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알기 쉽죠.’
녀석이 기분이 직접적으로 들어와 꽂히는 것 이전에 전장에서부터 그 영향력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감정에 솔직한 것 같다.
순식간에 적들을 쓸어버리는 검은색 선의 위용은 굳이 다시 한번 묘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괜히 이미 전쟁은 끝난 것 같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신과 같은 존재가 전장에 강림한 상황.
열세로 보이는 전장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이후에는 다음 전장으로, 그다음 전장을 해결한 이후에는 또다시 다른 전장으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북부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회귀자의 모습은 정말로 마지막 남은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 못 턴 지역이 얼마나 되지?’
전장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김현성이 다녀간 전장은 밀리고 있는 형국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형국으로 전환되어 있다.
‘그렇게 무능하지는 않지.’
차려놓은 밥상을 떠먹지 못할 정도로 대륙은 무능하지 않다.
검은백조 길드의 박연주, 오스칼과 빅터하르트 영감, 천관위와 위란, 각 전진기지를 대표하는 영웅들 역시 승기를 잡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지 남은 적들을 몰아내는 중, 마치 데자뷔처럼 어딘가에서 많이 봐왔던 장면이었다.
언제 나왔는지 전장에서 날뛰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 역시 시야에 비치고 있다.
아직까지는 치열한 접전이 유지되고 있는지 몸에 하나둘 창이 박히고 있는 모습.
그녀는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고, 대미지 역시 그리 커다란 것 같지 않았지만, 저 장면 역시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틀림없이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본 장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정말 온 것 같은데.’
-기영 씨.
“네?”
-그러니까….
“네.”
-잠깐 괜찮으십니까?
“네.”
-그러니까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 현성이와 함께 하는 추억 여행 시작하나요.’
“네. 당연히 기억합니다. 이전에도 자주 드렸던 말씀이니까요.”
‘근데 우리 이 이야기 자주 했잖아.’
-네. 기영 씨가 제가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도 그랬었지만…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정을 붙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근데 추억 여행 처음부터 가려고 하는 건 아니지? 튜토리얼 때부터 되짚기에는 시간이 없자너.’
-그리고… 파란 길드에 처음 들어갔을 때 말입니다만….
그 와중에 김현성은 자신의 손으로 끔찍한 짓을 저질러야 한다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추억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