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9화 끝으로 (18) >
‘아, 이 새끼 멘탈 안 괜찮나?’
힘내라, 김현성. 시바.
‘진짜 안 괜찮은 것 같은데.’
혼란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뭐라 설명하기도 힘든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우리 회귀자를 덮치고 있는 게 느껴진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수만 마리의 구더기들이 온몸을 갉아먹는 듯한 감각이 느껴질 정도.
녀석은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고 현재의 상황을 무척 혼란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무 과민반응을 하는 것 같아 내가 다 민망하기는 했지만….
“…….”
‘당연한 건가.’
김현성의 여기까지 온 과정을 떠올려보니 딱히 이상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2회차 김현성의 성장과정은 실상 빛기영과의 유대를 메인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체적인 성장도 성장이지만 메인은 역시 정신적인 성장이 아니었던가.
매섭게 불어오는 북풍처럼 차가웠던 김현성의 심장을 사르르 녹여 버린 빛 중의 빛, 그 누구보다 따뜻했던 ‘그 녀석’이기영.
그 녀석은 항상 사건에 중심에 있었고 김현성의 얼마 남지 않은 인간관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한때는 서로를 오해하기도 했고, 의심하기도 했고, 적으로도 만나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가장 신뢰하던 관계로 발전해 김현성의 성장과 새로운 인격 형성에 기여했다.
이는 심료 치료의 일환이기도 했고 1회 차에서 마모된 김현성에게 진실된 관계가 무엇인지 친절히 알려주는 교육의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 시바. 맞지. 그럴 만하지.’
영혼의 교감까지 나누며 모든 의심을 날려버리지 않았던가.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쓰레기가 아닌가 생각해 봄 직하다.
이미 털어냈다고 생각한 의심이 다시 생겨났을 때의 녀석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은인 아니야?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 없는 거 아니냐구. 아니, 정신적인 생명의 은인이지. 솔직히 내가 현성이 멘탈 심폐소생술 했자너. 시바 2회 차를 막 시작했을 때 김현성 눈빛 생각해 봐. 사람 하나 살리고 치료까지 해주고 병원비까지 내준거지. 근데 의심하고 있는 거자너… 얼마나 자괴감이 들겠어?’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고 있지 못하는 것만 같다.
원래 멘탈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인다.
검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고 억지로 입술을 꽉 깨문 것도 눈에 띄었다.
이렇게라도 멘탈을 부여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중요한 시기니까. 그럴 만도 하다.
‘아, 이거 시바 이대로 진행하는 게 맞나? 솔직히 전쟁은….’
유리한 상황이기는 한데….
“현성 씨?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
“현성 씨?”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미 중요 비둘기들은 전부 미국 갔고, 병력의 컨디션도 나쁘지 않은데… 김현성 이 새끼 이러다가 정신병 걸리면 어떻게 해?
물론 갑작스럽게 전황이 바뀔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걸 위해 김현성에게 정신병을 선물하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도 들어와 꽂힌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할 정도로 녀석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게 끝이라면 이기영이 그런 설계를 할 리가 없지.’
정말로 이게 끝이었다면 루시퍼와 내가 의미 없는 내기를 할 이유가 없다.
뻔하지 않은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지금 하고 있는 전쟁 이후에 뭔가가 더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물론 확실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만 하지 않은가.
비둘기들이 끝장난 이후에 진 비둘기 보스가 나타날 수도 있고 비둘기 부모님이 나타날 수도 있다.
갑자기 대륙이 붕괴될 수도 있고, 내가 상정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이 루시퍼와 계약을 한 것으로 모자라 쓸데없이 배때기를 내어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장 확률이 높은 건… 놈들의 창조주?’
바깥 세계의 신.
비둘기들처럼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
정말로 완전무결한 존재.
까놓고 말하면 루시퍼가 커버 쳐 주지 않으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걸어놓은 안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무시할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다.
잠깐 동안 내적 갈등을 겪기는 했지만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기영은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나라고 왜 우리 회귀자의 정신 건강을 걱정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와서 물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어.”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렇게 계속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와중에, 유일하게 즐거운 녀석이 하나.
-이제야 기억이 난 건가?
-…….
-너는 부정하고 있을 뿐이야. 김현성. 받아들이는 게 네게도 이롭지 않을까? 그자는 네 구원자가 아니야. 네 영혼을 비틀고 쥐어짜 내는 악마 그 자체야.
-…….
-네 입으로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 그 악마는 지금도 너를 손바닥 위에 올리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걸.
‘이건 좀 찔리기는 하네.’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어. 너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어. 네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내 말이 틀려?
‘물 만난 물고기 수준이네.’
본인의 웅변이 김현성에게 먹혀들고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는 했지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나도 조금 도움을 줘야지.
“현성 씨? 지금….”
-기영 씨가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네… 기영 씨가 신경 쓰실 일은… 일단 체, 체력 회복은 마쳤으니 곧바로….
-시선을 돌린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 너 자신에게 직접 물어봐. 1회 차에서 네 인생을 쥐고 흔든 자가 누군지, 네가 그렇게 증오하던 녀석이 누군지, 네 동료들과 대륙의 인간들을 학살하고 네 영혼을 무너뜨린 자가 누군지. 네 삶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휘두르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기만하고 속인자가 누군지. 네 자신한테 물어보라고.
여기서 의심 한 스푼 더 넣어줘야겠네요.
-닥… 닥쳐.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네 진짜 적이 누구인지 응시해!
-닥… 닥쳐어!!!
김현성이 검을 쥐고 날아오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순식간에 공중에서 한차례 맞붙은 녀석들은 계속해서 공중에서 선을 그리며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별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세라핌은 지금 이 상황이 내게 엿을 먹일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김현성 역시 계속해서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내가 계속해서 집어주고 있는 포인트도 제대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지 움직임 역시 엉망진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세라핌을 압도하는 걸 보면 확실히 육체적으로는 완성이 된 모양, 심지어….
‘시바, 세라핌 저러다 죽는 거 아닙니까?’
물론 저 새끼는 죽어야 되는 비둘기가 맞지만 자기 역할은 확실하게 하고 가야지. 김현성의 마음속에 있는 의심이 확신으로 만들어야지.
조금 문제가 있기는 한데….
‘아…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이 의심을 완벽히 뿌리 내리게 하기가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흐윽… 그런 생각한 적 없어.
“현성 씨?”
-믿어주세요. 저는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정, 정말… 정말입니다… 끅….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제… 제 머릿속에 누가 들어온 것 같아요. 뭔가. 뭔가가 이상합니다. 기영 씨.
“확인이 되는 건 없습….”
-내 머릿속에서 나가! 흐윽… 이 개자식! 이 더러운 자식!
‘네 머릿속에 있는 거 난 거 같아….’
-흐윽…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세라핌은 한 번 외쳐줘야지.
-눈을 떠라! 김현성!
-닥쳐! 닥쳐어!!!! 아니에요. 아니야! 내 머릿속에서 나가! 제기랄! 나가 루시퍼어!!!
‘루시퍼 아니야. 나야.’
무식하게 검을 휘두르고만 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 모습이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비참해 보이는 상황이다. 솔직히 저걸 보고 있기도 쉽지가 않다.
-저는 의심 따위는 한 적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의심 같은 걸 한 적이 없어요.
‘괜찮은 거 맞지?’
회귀자 사용설명서에 저항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걸 저항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는 진심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흐윽… 끅….
‘거부 하지마. 현성아. 받아들여야 돼. 너도, 시바, 뭐라고 말 좀 제대로 해봐. 이 미친 비둘기야.’
-받아들여라! 김현성!
‘시바. 그렇게 뻔한 대사만 지껄이지 말고 좀.’
녀석에게는 뭔가 기대하기가 힘들다.
계속해서 녀석과 부딪치던 김현성이 움직임을 멈춘 것은 내가 한 번 더 의심을 집어 넣었을 때였다.
‘저항하지마. 제기랄.’
이대로 가면 정말로 김현성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다급 해진 그때.
갑자기 자신의 왼쪽 뿔을 붙잡은 놈이 시야에 들어온다.
-제길! 제길!
‘뭐 하는 거야. 너.’
“너 뭐 하는 거야… 야….”
-제기랄… 제길!
“너 이 미친 새끼야! 뭐하고 있는 거야?”
-제기일!!!
김현성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놈이 지금 뭘 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힘이 들어간 팔이 눈에 잡힌다. 으직으직거리는 징그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웬만한 고통에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김현성이 기괴한 비명을 내뱉고 있다.
통각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김현성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전해져 온다. 하지만 녀석은 이전의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 광경을 본 세라핌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진다. 저도 모르게 김현성이 내뱉는 비명이 주는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다.
“하지 마, 이 병신 새끼야! 하지 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광경. 결국에는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김현성의 왼쪽 머리에 있는 뿔이 그대로 뽑혀 나갔다.
-허억… 허억… 허억….
거대한 뿔이 뽑혀 나간 자리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다. 김현성의 반쪽 얼굴을 완전히 뒤덮은 혈액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의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지고 초조해진다.
땀으로 범벅이 된 김현성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내… 내 머릿속에서 나가. 루시퍼. 나는 의심하지 않아… 나는….
“이 미친 새끼….”
-나는… 저는 의심한 적 없어요. 믿어요. 이, 이전에는 그랬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믿어요. 믿어요. 믿어. 나는 믿어. 나는 믿어….
‘시발… 이거 어떻게 하지? 진짜 그대로 가는 게 맞아? 그대로 가야 돼?’
-이제는 알아요. 이제는….
‘어떻게 해? 어떻게 하지? 시발… 시발… 이걸 어떻게 해? 개 시바… 개 시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진짜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못했는데. 진짜….’
여전히 녀석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의심에 저항하고 있다. 방금의 행동으로도 의심이 사라지지 않자. 결국에는 남은 오른쪽 뿔에도 손을 가져다 대고 있다.
-내… 내 머릿속에서 당장 사라져. 루시퍼.
‘어떻게 해? 어떻게… 어떻게… 시바, 이거 어떻게 하냐고. 시바… 어떻게 해?’
-나가으… 으으윽…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녀석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