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761화 (752/1,590)

< 761화 끝으로 (20) >

“…….”

-…….

‘정말로 끝났어.’

정확히 말해서 기억을 지운 것은 아니었다. 2회 차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부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사건이 없다면 성장 역시 없다. 거세시킨 것은 김현성이 내게 느꼈던 감정과 유대감이다.

설명하기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아마 김현성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이전처럼 커다란 감정을 느끼고 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는 일들이라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이기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김현성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모든 감정은 모두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렸다.

“…….”

뭐라고 코멘트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다. 추억은 김현성 혼자서 쌓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원래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죽은 사람들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괴롭다는 거.

물론 경우가 다르기도 했고 내가 선택한 일이기는 했지만 상실감이 생긴다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여야지 뭐. 어쩌겠어. 뭘 잃었나보다는 뭘 얻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 아니야?’

그 말이 맞아. 그게 맞는 말이지. 일이 끝난 다음에는 주워 담을 수도 있잖아. 이걸로 파고드는 게 내 스타일도 아닌데.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지 뭐. 간단한 거야.

‘시바 행복 회로 좀 돌려 보자. 우울하면 재수 없으니까. 다 잘 됐잖아.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고 변수도 차단하고 있어. 더 이상 반전의 여지가 없을 정도라고.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웃는 게 맞지. 그렇지 않아?’

계속해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입가에서는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내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는 거야. 중요한 건 그거 하나라고.’

문제는 없다. 전부 다 내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기쁜 소식이니까. 누나한테 전해주는 게 맞겠네.

근데 얘 정신없을 텐데… 굳이 말 안 해줘도 상관없나. 어차피 혜진이랑 드라마 찍고 있을 텐데.

덕구는 어디서 뭐 하지? 아 싸우고 있겠구나. 하얀이도… 싸우고 있네. 벌써 마력도 전부 회복한 것 같고….

슬쩍 상황실을 둘러 봤지만 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자축하는 의미로 괜스레 허공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린다.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니 축배를 들기에 이르기는 하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아, 내 정신 좀 봐. 일단 회귀자 상태가 어떤지부터 봐야지.

분노로 일그러져 있는 얼굴이 다시 한번 눈에 보인다.

‘진짜 화났네.’

뒤죽박죽 섞여 있었던 이전에 비하면 무척 단순한 감정이다. 이렇게 심플한 게 가장 좋게 느껴진다.

왠지 1회 차의 김현성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와 꽂힌다. 김현성에게 있어 그 녀석은 2회 차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쳐내면 1회 차 김현성이 남는다고 해석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그건 아닌가.’

뭐라고 평가를 내리기도 어렵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놈이 더 이상 마음의 목소리에 저항하고 있지 않다는 것.

김현성은 받아들이고 있었고 확정 짓고 있었다. 의심이 아닌 확신이다. 이기영이 1회 차의 가면남이라는 확신은 이미 놈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하나가 바뀌면 여러 가지가 바뀌는 법이다.

녀석이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던 추억들이 전부 일그러진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이 새끼 입장에서는 모든 게 거짓말이고 기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뭐.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하나하나 추억을 되짚어가며 병신 같았던 자신의 모습들을 되돌아보고 있잖아.

녀석이 느끼는 분노 중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도 있다. 이전처럼 자기혐오로 얼룩진 분노가 아닌,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원수에게 다시 한번 속았다는 분노였다.

대뜸 욕을 박거나 연결을 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모양.

내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 놈의 앞에 있던 세라핌이 입을 열어왔다.

-무엇을 깨달았지?

-…….

-뭔가 깨달은 표정인 것 같은데.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 거지?

-…….

-하… 하하. 하하하하하.

‘너도 수고 많았어, 세라핌. 근데 너 웃는 거 좀 재수 없어.’

-푸하하하하하핫!

김현성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곧바로 검을 날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어….

세라핌의 뺨에서 혈액이 흘러내리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오는 모습. 아무런 말도 없이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다.

‘뭐지?’

일단은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계속해서 포인트를 찍어 주고는 있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잠깐 동안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째서 녀석이 방금과 같은 행동을 취했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차피 비둘기야 놈의 적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현성 씨?”

-네. 기영 씨.

‘목소리 살짝 차가워졌자너. 시바. 감정이 안 담겨 있자너. 진짜 남 부르는 것 같자너. 목소리가 시바 예전 같지 않자너.’

“조금… 상태는… 괜찮아지셨습니까?”

-아까보다는 한결 나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이 아직도….

“네?”

-실례가 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직접 와서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가겠다고 말하기는 한 것 같은데… 와 시바. 김현성 이 여우 같은 새끼… 마음 진짜 단단히 먹었구나.’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발언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불러들이고 싶은 거구나? 진짜로 적으로 규정한 거야?’

김현성의 입장에서 가면의 영웅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자식이었으니까. 아마 내가 내뺀다면 이후에 화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직접 불러들여서 확실하게 찢어 죽이고….

‘어?’

뭐야. 찢어 죽이면 안 되지. 너 왜 그런 생각해?

‘목을 날려 버리는 것도 조금 그렇지. 아니, 왜 계속 잔인한 것만 생각해? 온몸을 조각 조각낸다고? 팔다리를 잘라 버리고 땅바닥을 질질 기게 만든 다음에 발로 짓이겨 죽이겠다고?’

“아니요. 잠깐 확인해야 하는….”

-부탁드립니다. 지금 기영 씨가 필요합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서 돼지우리에 처박아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너 이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누가 그런 걸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시바 우리가 함께한 추억이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 그건 너무 나갔지. 그런 게 어딨어. 시바. 그렇게까지 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아?

잠깐 동안 침묵을 보내기가 무섭게 김현성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안 좋은 상상들이 사라진다. 녀석이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인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새어 나갈 수도 있다는 가정을 경계하고 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내가 알 수 있다는 설명을 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내가 자신의 생각을 알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변수를 모조리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네. 조심히….

‘근데 그건 알아야지. 현성아. 애초에 김현성이라면 여기에 와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을 거야. 너무 어설프다고. 지금 그게 연기하는 건지 뭔지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내가 속아주는 거지.’

괜히 품속에 마취 물약이 있는지 다시 한번 찾아본 이후에는 몸을 일으킨다.

-기영 씨?

“네. 준비하고 있습니다.”

기왕이면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좋다.

김현성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세라핌이 상처투성이가 되기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오히려 조절하고 있는 듯한 느낌,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일부러 밀리는 모습도 슬슬 보여주면서 뭐. 머리도 붙잡아 주고.

자꾸 자기 자신한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어필하고 있는 거지. 리얼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게 느껴지기야 한다.

문제가 있다면 아직까지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

끝이 다 와 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그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직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까이 왔다는 것 하나는 인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떤 상황을 위해 장면을 완성시켜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직 아닌 건가?’

아니, 일단 가고 난 이후에 생각하는 게 맞는 건가? 녀석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내 손을 잡아. 김현성. 내가 네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줄 수 있어.

-…….

절대로 안 잡을걸.

-우리는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던 거야. 그렇지 않아?

-그 입 닥쳐. 세라핌.

-애초에 너희들이 승리할 확률이 없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뭘 위해서 싸우고 있는 거야?

-나는 너와 말장난을 하고 싶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 너와 우리가 싸운 게 본의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끝없이 파멸로 치닫는 전쟁은 우리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었어.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던 벌레 같은 기생충에게 휘둘린 거지.

-난 애초에 너희들의 방식에 단 한 번도 찬성한 적이 없어.

-맞아. 하지만 그게 필요한 일이라는 거 알고 있잖아. 대륙은 병들었어. 괜히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까. 2회 차를 겪으면서 너도 느낀 게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네 입으로 말해봐. 인간이 이전과 달라졌던가?

-…….

-인간은 달라지지 않아. 네가 알고 있는 그자처럼 본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거야.

-…….

-나는 네게 기회를 주고 있는 거야. 김현성. 너는 아직 되돌아올 수 있어. 불순물이 끼어들기는 했지만 충분히 정화할 수 있을 거야. 이미 너는 인간이라고 볼 수도 없잖아?

-개소리.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네. 저 쓰레기는.’

세라핌은 김현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녀석이 회귀자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싫어하는 쪽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애초에 비둘기들은 악마들이 가지고 있는 힘에 적대적이었고 김현성은 그 힘으로 완전히 감싸 있을 정도로 오염된 상태였으니까.

본인이 가진 심판의 검에 대한 자부심이 특히나 남다르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 개소리는 자기 자신까지 속이면서 입을 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나한테 엿을 먹이고 싶었어요?’

세라핌의 행동은 단순히 나를 화나게 하고 싶어 하는 것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창조주가 너를 원해.

‘뭐?’

-우리의 창조주가 너를 원해. 김현성.

‘갑자기?’

아니, 갑자기가 아니다.

‘이거… 계산된 거야? 이것도 보고 있었어?’

당황스러웠지만….

‘정말로 계산된 거냐고. 시발.’

이걸 노리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비둘기들의 창조주는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은 관리자를 원해 저 모지리들을 만들었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김현성은….

“잘라낸 상태니까….”

거대한 빛이 하늘을 뒤덮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 빛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지만 찬란해 보이기도 해 뭐라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틀리지 않았네. 하… 시바… 틀리지 않았어.’

마지막 퍼즐은 저것을 위해 존재한다.

이기영의 희생은 저것을 위해 존재한다.

이질적이고 거대한 빛은 기묘한 형태의 모양의 팔을 만들어 김현성에게 천천히 뻗고 있었다.

바깥 세계의 창조주가 찾아오는 게 아니다.

“우리가… 불러내야 했던 거였어….”

녀석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 역시 과제 중 하나였다.

해피엔딩이 될지 배드엔딩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김현성과 이기영의 유대를 끊는 것 역시, 엔딩으로 가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였을 것이다.

“틀리지 않았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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