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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62화 (753/1,590)

< 762화 끝으로 (21) >

이기영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이 모든 개고생이 헛짓거리가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보상받는 느낌이 든다.

모든 퍼즐이 맞춰진 것은 아니었지만 모아놨던 퍼즐 조각이 스스로 그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첫 번째 조건이었어.’

비둘기들의 창조주가 이곳에 직접 찾아오게 하는 것, 그게 첫 번째 조건이었다.

맞서 싸워야 할 적이 없다면 애초에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이 어째서 녀석에 대해 알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시퍼의 개입으로 해결해야 할 존재가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던 바 아니었던가.

직접적으로 그걸 눈으로 확인하니 조금 더 개연성이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믿어도 되는 거 맞지? 이기영 이 사기꾼 새끼야?’

물론 어째서 이걸 내게 비밀로 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알고 있다면 미래가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기억하지 않는 것 역시 내기의 조건이었을 수도 있지.’

굳이 끼워 맞춘다면 이렇게 끼워 맞출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시점에서 중요한 퍼즐이라고는 볼 수 없는 만큼 잠깐은 생각을 뒤로 돌리는 것이 옳다. 구태여 예를 들자면 딱 배경 정도라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중요한 것은 현재 놈들의 창조주가 나타났고 우리가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 하나였다.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곧바로 시선을 돌리자 지독하리만큼 이질적인 빛이 시야에 비쳐왔다.

어째서 저걸 바깥 세계의 신이라고 표현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놈이 내뿜는 빛은 이질적이었다.

전쟁 중이던 병력들 역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하고 있지 않을까.

아마 전쟁 중인 병력뿐만이 아닐 것이다. 북부를 지나 자리해 있는 대륙인들 역시 저 빛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하늘을 감싸 안은 빛은 전장 전체를 비추고 있는 것으로 모자라 점점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나 역시 저 빛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감히 항거할 수 없게 느껴지는 자연현상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저게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아마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저것에는 저항할 수 없다고. 저것과는 싸울 수 없다고 말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저런 것과 싸울 수 있는 건가?

아니,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해?

저건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는 거야?

의사소통은? 저게 도대체 뭐야?

이상한 점이 많다.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뭔가 생명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과 다르기는 하지만 그 비둘기들마저 살아 숨 쉬고 생각하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저건 그런 느낌이 없다.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이나 거대한 파도를 바라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진다.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것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딱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시스템 덩어리.’

그냥 시스템 덩어리로 보인다. 비둘기들의 창조주도 뭣도 아닌 그냥 시스템 덩어리다.

저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본능? 아니면 그렇게 움직이게 스스로를 프로그래밍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상상하던 신은 아니었지만….

‘저게 초월적인 무언가라는 건 확실해.’

꿈틀꿈틀거리는 기괴하고 거대한 팔을 김현성에게 뻗고 있는 모습이 괜스레 더 이질적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

-그분의 손을 마주 잡아. 그것으로 너는 너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거야.

‘세라핌 병신 새끼.’

쟤는 너희를 만든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너희가 저기에서 스스로 태어났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해봤어? 암만 봐도 저건 그냥 시스템 덩어리야. 의지가 없으니 스스로 나타나지도 않는 거야.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거라고.

김현성에게 반응한 것 역시 놈이 스스로 판단하고 손을 내민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놈은 그냥 자신 안에 내장되어 있는 프로그래밍을 돌리고 있는 것뿐이다. 이지혜와 세라핌이 더미월드를 돌렸던 것처럼 녀석 안에 있는 시스템이 변수에 반응한 것이다.

저 시스템이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저 시스템이 원하는 것은 사대천사가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일 확률이 높겠지.

놈은 놈이 뿌리내릴 수 있는 둥지를 찾고 싶어 했고. 대륙의 균형을 갈구하는 것을 원했다.

놈의 안에 있는 프로그램은 그것을 위해 비둘기들을 탄생시켰고, 본인이 뿌리내릴 수 있는 차원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렇게 김현성의 1회 차가 시작됐고, 가면의 영웅의 계획 앞에 놈은 실패했다.

비둘기들은 1회 차의 실패에 영향을 받았겠지만 시스템 덩어리는 그렇지 않다.

시스템이 실패하면 어떻게 하겠어?

수정하는 거야.

어디에 오류가 있었는지는 찾아낸 이후에 스스로 수정하지 않았을까. 어떤 변수가 있었는지 점검하고 다시 한번 프로그램을 돌려봤을 것이다. 현재의 상태가 딱 그런 상태다. 놈은 비둘기들로 실패를 겪었고 새로운 대안을 찾았다.

‘그 대안이….’

지금의 김현성이라는 거지.

조금은 다른 의미로 완전해진 김현성일 것이다.

김현성은 아직 인간성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놈은 김현성이 인간성을 버릴 수 있을 거라고 평가했다.

대륙과 차원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자신이 수행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을 완벽히 수행할 수 있는 신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은 놈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시바, 잡을 리가 없자너.’

김현성의 숙원은 놈에게 저항하는 것이지 놈의 손을 잡는 것이 아니다. 이기영을 적대한다고 해서 비둘기들의 편에 선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거지?

‘거봐, 우리 현성이 강직하자너. 어?’

-대답해. 세라핌. 내가 이 손을 잡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어?’

-푸흐… 푸흐하하하하하하하핫!

-네가 웃으라고 이야기한 게 아니다. 세라핌. 내 질문에 대답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현성 씨?”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놈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읽기가 힘들다.

-글쎄. 그건 네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나도 정확히 네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어. 하지만 확실히 말하건대 네가 무엇을 원하든 간에 그건 이루어질 거다. 우리의 창조주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난 대륙에 있는 인간의 절반을 죽이는 미친 계획에….

-다른 방법을 찾으면 돼. 개체 수를 조절할 방법이 이것 하나밖에 있는 게 아니잖아?

‘신인류 계획, 시발로마. 그거 지적 재산권 침해야.’

-나도 어째서 우리의 창조주가 너를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시바 무능하니까 현성이를 골랐지.’

-그분은 너에게 많은 권한을 내릴 거야.

권한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위임하는 거야. 본인의 프로그램을 대륙에 직접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내가 대륙을 바꿀 수 있나?

-이미 한 번 말하지 않았나. 네가 원하면 가능할 거야.

‘너, 시바, 지금 뭐하는 거야? 이거 내가 잘못한 거였나? 이게 아니었어?’

유대감을 상실한 김현성이 비둘기 쪽으로 붙는 계산은 아예 안 해본 건가?

‘이게 뭐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괜스레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김현성이 얻는 게 뭐가 있다고, 시바….’

아니지. 굳이 하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 얻는 것도 없지만 피해 볼 것도 없는데.

애초에 김현성이 죽자고 외신들이랑 싸운 이유는 지 품 안에 있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었나?

정말로 김현성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면 자기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게 다른 방식으로 짐을 떠안는 거라는 걸 모를 리는 없겠지만….

나였다면 분명히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할 것이다.

-손을 잡아. 김현성.

‘아니. 시바, 잡지 마. 시바….’

지금 정확히 김현성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다. 물론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기본 효과 때문인지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지만 도대체 뭘 원하길래 놈의 손을 잡는 걸 고민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일단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 것은 당연지사.

“현성 씨.”

뭐가 됐든 간에 시나리오는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한다. 김현성이 외신의 편에 선다는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곧바로 바깥으로 향하자 여러 가지가 뒤섞인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뭐라고 설명할 시간이 없다.

날개를 펼친 이후에는 곧바로 하늘을 날기 시작. 주변에서는 계속해서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일단은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옮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진짜로 잡을 거 아니지? 그렇지? 시바?’

-손을 잡아. 김현성.

‘말도 안 돼. 시바. 무슨 손을 잡아? 이건 아니야.’

그 새끼는 그냥 시스템 덩어리야. 아무것도 아니라 그냥 괴물 새끼라고.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어.

퍼어어어어어어어엉!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한쪽으로 튕겨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직격탄을 맞은 것만 같다. 다행히 제때 방어 마법이 펼쳐졌기 때문에 다른 이상은 없지만 몸은 땅으로 떨어져 곧바로 땅바닥을 구른다.

“명예추기경님?”

“명예추기경님이다! 명예추기경님이….”

“보호해!”

‘미안. 지금은 그럴 시간 없어.’

다시 한번 날개를 펼치자 몸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겹겹이 보호 마법들이 채워진다.

‘형 지금 가. 시바. 그러니까 괜히 상황 꼬이게 하지 말고….’

내가 생각해도 꽤 빠른 속도로 날고 있는 것 같다. 중간중간에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았지만 정신이 없어 하나하나 확인할 수가 없다.

드래곤들이 브레스를 쏘아 길을 열어줬고 길드원들의 목소리도 들린 것 같다. 엘레나와 선희영의 목소리도 들린 것 같았는데….

아마 지금까지 몸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김현성의 모습이 점점 육안에 잡히고 있다. 이질적인 빛은 아직도 김현성에게 손을 뻗고 있었고, 세라핌 역시 내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다.

“현성 씨!”

하지만 김현성이 나를 바라보는 눈을 확인한 순간.

“하….”

“…….”

‘아. 낚였네.’

내가 놈에게 낚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손을 잡을 생각은 없었던 거네. 시바. 아… 이걸 왜 낚였지?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자너. 김현성의 우직함을 간과했네. 아….’

어차피 이곳으로 향해야 하기는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 김현성이 나를 낚았다고 생각하니 뒤통수가 얼얼하다 못해 쓰라리다.

뒷다리에서 커다란 고통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라고 비명을 내지르기가 무섭게. 머리카락을 붙잡은 손이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쓰레기 같은 자식.”

김현성이 비틀린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 성….”

뭐라고 막 입을 떼려는 찰나. 목을 조르는 우악스러운 손길이 나를 덮쳤다.

“켁… 켁….”

“더럽고 비열하고 추악한… 쓰레기.”

“켁….”

“어떻게 해줄까? 더러운 자식.”

“케헥….”

“내가 어떻게 죽여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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