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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66화 (757/1,590)

< 766화 끝으로 (25) >

다시 한번 눈을 뜨고 쳐다봐도 여전히 가면을 쓴 남자가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정말로 헛것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너무나도 현실감이 없는 장면이다.

김현성이 자신의 옆에 있는 가면을 쓴 남자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녀석이 정신을 놓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쟤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한들, 어깨에 손을 두른 녀석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이상해진 것은 아니다.

김현성은 물론이거니와 세라핌 역시 녀석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어.’

이 개 같은 새끼가 나랑 지금 퀴즈 놀이 하자는 거야 뭐야?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놈이 뭘 말하고 있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 심지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놈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 동안 혀를 차기는 했지만….

‘이거… 힌트라고 봐도 되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아니, 무조건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눈앞을 봐. 완전히 개판 오 분 전인데.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어?

가면의 영웅이 한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니야.

이유 모를 개소리에 선동당하자는 게 아니라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는 거야.

최후의 최후에 타인에게 선택을 맡기는 건 확실히 우리답지 않지. 이기영이 뒤통수를 맞는 쪽이 아니라 때리는 쪽이 아니라는 것도 공감할 수 있어.

나는 루시퍼에게 선택을 맡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이미 한 번 데였잖아.

정확히 계약 조건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서로 함정을 파놨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고.

김현성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녀석이 하늘을 가리킨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조금만 더 차분히 현재의 상황들을 떠올리자 퍼즐들이 들어맞는 기분이 들어.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믿을 수… 있어?’

내가 저 새끼를 믿을 수 있느냐에 대한 것.

최후의 최후까지 타인에게 선택을 맡기는 게 우리답지 않지만 놈이 정말 우리가 맞느냐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 가면을 쓴 남자가 내 적이라면? 내가 스스로 기억을 지운 것이 아니라 놈이 내 기억을 지운 것이라면? 놈이 뭔가를 꾸미고 있고 내가 놈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고 있는 것이라면? 가면의 영웅이 아니라 빌어먹을 가면 쓰레기라면 어떨 것 같아?

아니.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잖아.’

어차피 내가 뿌린 씨앗이다. 그리고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되든 간에 이 선택이 결코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게 어떤 엔딩으로 향하는 길일지는 알 수 없지만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으니 여기에 걸어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내몰린 셈이다.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자 여전히 위를 가득 메운 이질적인 빛이 시야에 비친다.

뻘쭘하고 머쓱하게 서 있는 세라핌은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녀석이 어떤 선택을 하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김현성에게 뻗친 손이 다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외부 시스템은 인격을 잃어버린 김현성을 원했지만 녀석은 끝끝내 유대감을 되찾았다. 심지어 되찾은 직후, 한바탕 눈물을 뽑아내고 있으니 오죽할까.

저 시스템은 김현성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관리해 줄 관리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내게 있어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사실 커다란 의미는 없다. 어차피 곧 선택을 내려야 했으니까.

‘김현성은 완전해질 수 있어.’

그래, 나도 알아. 네가 뭘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아. 이거 딱 그런 상황이잖아. 그렇지 않아?

소중한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각성하는 주인공 클리셰. 네가 원하던 그림이 이거였잖아. 저 위에 있는 프로그램을 불러낸 것도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어?

촛불은 꺼지기 전에 가장 불타오른다고 했던가. 현재의 내 상태가 가장 불타오르는 상태라는 걸 깨닫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가면의 영웅이 내게 힘을 준 것일지도 모르지. 생각은 길었지만 시간은 찰나.

서둘러 본인의 목을 그어버리려는 김현성의 모습에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만.”

멈출 거라고 생각했지만 우뚝 움직임을 멈춘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기영 씨?”

“해….”

“기영 씨? 흐으윽… 기영 씨. 기영 씨… 기영 씨?”

“그만… 하세요. 그렇게… 하지… 마….”

“괜찮…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 으신 겁니까?”

허겁지겁 달려와 나를 부여잡는 놈이 시야에 비친다. 여기서는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 옳다. 원래 괜찮다고 말한 새끼치고 괜찮은 새끼 없거든.

“네.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활짝 웃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 미소가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무척 숭고한 모습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김현성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녀석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기영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걸, 이렇게 대화를 나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녀석이 모를 리가 없다.

“흐윽… 흐으으윽….”

“그러니… 울지 마세요.”

살짝 손도 잡아줘야 하자너. 그래야 이 새끼가 진정하자너. 바들바들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굳이 감정을 읽지 않아도 녀석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다. 허겁지겁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것 역시 눈에 보인다.

“제가… 제가 다른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네. 이번에는…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방법이에요. 아까… 아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다시 한번 회차를 시작할 겁니다. 이번에는 틀리지 않을 거예요.”

“그럴… 필요 없….”

“네?”

“저는… 이대로….”

빛의 성자의 퇴장으로 나쁘지 않은 무대야. 반의반의 반 정도의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면 솔직히 이런 끝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본래 마무리라는 게 그렇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희생하던 조연이 모든 걸 떠안고 다시 한번 희생하는 그림. 누가 봐도 완벽한 그림 아니야?

“그러니… 믿고… 있겠습니다.”

이런 대사 한 번씩 박아주면서. 그럼 아주 자지러지잖아.

“그동안… 즐거웠….”

그럴 확률은 없겠지만 만약에 이게 정말로 끝이라면 진짜로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 같아.

그동안 정말로 즐거웠다고.

“함께해서… 다행….”

함께해서 다행이었다고.

“흐윽… 흐으으윽….”

“덕분에….”

덕분에 꿀 좀 빨았다고. 아니, 이건 이야기하지 말자. 덕분에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죄송… 합….”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좋겠네. 그동안 심한 짓을 많이 하기는 했어. 솔직히 본의는 아니었는데 내가 너한테 많이 심했던 것 같아. 여러 가지로… 응. 그래. 여러 가지로. 근데 그건 이제 퉁 치자. 그치? 너도 동의하지?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약속한 거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새끼야. 시바. 놀러 가기로 한 것도. 모든 게 끝난 다음에 할 일을 쌓아 뒀는데 모두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네.

“저는… 알고 있… 현성 씨는… 강….”

나는 알고 있어. 너는 결코 약하지 않아. 너는 강해. 외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정말로 강해. 그래서 내가 너를 선택한 걸 거야. 휘둘리기만 하는 병신이 아니라 정말로 강했기 때문에 내가 널 선택한 거야. 너는 그걸 증명했어.

“다른 사람들을… 잘 부탁….”

특히 하얀이랑 덕구는 잘 챙겨줘야 하는 거 알지? 정말로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걔네들한테 몹쓸 짓을 하는 게 될 거야.

길드원들도 잘 챙겨주고 내 아들딸들도 마찬가지야. 지혜 누나랑 희라 누나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카스가노한테도 가끔 들러줘.

“미안해… 하지 마세요. 저는… 하아… 하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한 짓에 대해 너무 미안해 하지 마. 솔직히 어쩔 수 없었잖아.

이게 다 루시퍼랑 저 간악한 세라핌 때문이야. 나는 네가 나를 찌른 게 네 본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동안… 정말로… 고마….”

마무리로 한마디만 더 해주고.

“…….”

“흐윽… 흐으윽….”

“…….”

“하늘… 하늘이… 보고 싶… 어….”

지금이 몇 시야? 지금 너무 하늘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네.

“노을….”

그래. 노을이 보고 싶어. 그게 존엄한 죽음일 것 같아. 이렇게 마무리하고 가면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조용히 미소 짓게 된다. 놈이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었지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이다. 이 새끼가 웃고 있는 것보다 울고 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본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하늘을 뒤덮은 저 이질적인 빛 때문에 내가 바라는 풍경을 볼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워. 나는 노을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싶어.

나 원래 직접적으로 이야기 안 하는 거 알잖아.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지?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거지?

김현성은 아까처럼 울부짖지 않는다. 입술을 꽉 깨문 채로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보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눈 형제의 마지막 부탁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김현성이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하든, 놈은 내 존엄한 마지막을 위해, 친우의 부탁을 위해 내가 원하는 풍경을 바라보게 해줄 것이다.

“현성 씨… 믿고… 있….”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김현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째서 가면의 영웅이 김현성이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루시퍼의 힘이나 베니고어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김현성은 혼자 일어설 수 있다.

“흐윽… 흐으윽….”

녀석은 혼자 일어설 수 있다.

‘일어나.’

그래. 시발. 김현성은 혼자 일어설 수 있다.

‘일어나. 김현성.’

내가 선택한 알타누스의 회귀자는 혼자 일어설 수 있다.

‘일어나 새끼야.’

“약속을….”

“네. 약속을….”

“노을….”

“네.”

이윽고 완전히 몸을 일으킨 녀석이 내게 시선을 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 녀석은 듀렌달을 치켜 올린 채로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쳐 잡았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뭘 하려고 하는 건지 알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김현성의 몸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녀석이 인식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틀림없이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긴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시바… X나 멋있어.’

그 말 그대로 진짜 X나 멋있다고.

거대한 검은색의 날개에 빛이 스며든다. 베니고어가 내린 빛이 아닌 김현성 스스로가 가지고 있었던 붉은 색 빛이 놈의 날개를 변화시킨다.

검은색의 칙칙한 날개 대신 자리한 것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것 같이 느껴지는 찬란한 날개다.

머리 위에 있는 뿔 역시 마찬가지. 뿔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까보다 더욱더 거대한 뿔이 놈의 머리 위에 자리 잡는다. 이 또한 빛나고 있다. 붉은 노을빛이 놈의 모습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하… 하하… 하하하하….”

그 누구의 힘이 아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아니.

‘이거 우리 필살기자너.’

소중한 형제가 내린 우정의 힘이자너.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노을빛의 검을 하늘 위로 뻗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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