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2화 마지막 (5) >
‘통쾌하네.’
절망으로 물든 녀석의 얼굴이 보인다. 이런 식으로 세라핌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을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세라핌의 모습이 눈에 띈다.
그동안 수많은 빌런과 얼굴을 맞댔지만 이렇게까지 절망적인 표정을 본 적은 없었다.
의연하고 명예로운 선택을 했던 진청, 마지막까지 분노와 광기를 보여줬던 이토 소우타, 그 밖에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몇몇 녀석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굴복하기 전과 분위기가 너무 달라진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뭐 많은 이유야 있겠지만 내가 지금 녀석의 창조주라는 게 가장 커다랗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물론 녀석의 정신까지 내가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의 세라핌은 내가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놈이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다는 걸 녀석이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처럼 살아가는 삶.
그리고.
창조주 혹은 부모님의 사랑.
어째서 놈들이 이것들에 집착하는지도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놈들의 탄생 배경을 논하기 이전에 나와 율하 역시 비슷한 시기를 겪은 적이 있었으니까.
조금 의외였던 것은 형식적으로나마 자신의 치부를 부정했던 세라핌이 무척 빠른 태세전환을 보여줬다는 것.
녀석이 정말로 원하는 삶에 대한 비전을 슬쩍 보여준 것만으로 세라핌은 완벽하게 굴복해 버렸다.
내가 놈을 입양한 순간부터 반항의 여지는 없었겠지만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굴복했다는 건 의미가 크다.
슬그머니 잔을 내밀자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채우는 모습은 가관, 그 와중에서 파란색 빛은 은근슬쩍 세라핌을 맴돌고 있었다.
‘아. 쟤는 또 왜 저래?’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케루빔.”
“…….”
“너도 참 배알도 좋아. 세라핌한테 뒤통수를 그렇게 맞고도 쟤를 두둔하고 싶어? 너도 남겨지고 싶은 건 아니지?”
“…….”
“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세기의 형제애에 눈시울이 붉어지네…. 네가 세라핌을 얼마나 두둔하고 아끼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네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네 다른 형제들도 가슴 아픈 꼴을 당하게 될 거야. 아주 아주 불행해질 거라니까?”
“…….”
“쓰로누스와 도미니온스에게도 함께 책임을 물을 거야. 네 잘못된 선택이 다른 두 사람의 행복과 미래에도 영향을 끼치는 거야. 그걸 잘 기억하고 행동해.”
“…….”
“용서한다는 선택지는 없어, 케루빔. 나는 그렇게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야. 저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지? 타협한다는 선택지는 없다고.”
“…….”
계속해서 푸른빛이 번쩍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세라핌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이 느껴진다.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세라핌이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아, 아, 아버지시여.”
아버지라고 불러 보라고 조언이라도 해줬나 보다.
“부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제 모든 것을 걸고 아버님께 평생을 감사하고, 봉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이 대륙에 평생을 헌신하고… 흐윽… 제 죄를 가슴 속에 품고”
“나는 네 아버지가 아니야. 세라핌. 그리고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
“…….”
“뭐 하고 있어? 케루빔?”
“…….”
“쓰로누스와 도미니온스가 슬퍼하겠네. 누구 하나 때문에 새로운 기회를 박탈당하게 생겼어. 나한테도 참 손실이 크겠지?”
다시 한번 은색의 빛을 손으로 밀어낸 이후에 말을 잇는다.
당연하지만 케루빔이 이들을 버리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계속해서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쓰로누스와 도미니온스를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세라핌 주변을 떠돌아다녔던 녀석이 이쪽에 합류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닭똥 같은 눈물을 계속해서 떨어뜨리고 있는 세라핌이 시야에 비쳐오기는 했지만 이쪽은 저런 모습이 더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디아루기아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뭔가 할 말은 많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참지 못했는지 천천히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솔직히 제가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조금 그렇습니다만… 다른 목적 없이 본인 기분을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
“저도 지금 많이 초조하고 당황스럽지만 필요 이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악의적으로 괴롭히는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악의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거 맞아요. 화풀이하는 게 맞기는 한데….”
“…….”
솔직히 조금 정곡을 찔린 것 같은 느낌이라 할 말이 없다. 세라핌에 대한 분노 때문에 화풀이를 하고 있다기보다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 상황에 대한 분노하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디아루기아가 이쪽의 상태를 눈치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계속 함께 있다 보니 느껴지는 게 있는 모양, 은연중에 티를 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괜스레 세라핌을 한 번 바라보자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김현성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었던 빌런 주제에 이제 와 피해자인 척하는 모습은 가관.
한 번 발로 차버리고 싶기는 했지만 디아루기아의 말처럼 그다지 생산성이 있는 일은 아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위해 내 미래의 피조물들을 사랑해 줘야지.
절대로 세라핌이 보라고 하는 행동도 아니고 화풀이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 대륙을 관리할 내 아이들을 미리 사랑해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잠깐 동안 밀쳐냈던 은색의 빛에게 손짓하자 허겁지겁 날아 붙어오는 것이 보인다.
“이리로 와 쓰로누스. 우리 쓰로누스. 내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나 봐. 사랑스러운 케루빔도 와야지?”
“치졸한 인간….”
‘그렇게 대놓고 말하지 마.’
“도미니온스 거기서 뭐 해? 우리 도미니온스랑 케루빔 너무 예쁘네. 반짝이는 게 꼭 별 같이 예쁘다. 왜 이렇게 예뻐? 그래. 이리로 와.”
“정말로 치졸한 인간….”
“조금 더 가까이 와도 돼. 쓰로누스. 그래 여기로.”
“지금 당신이 얼마나 치졸해 보이는지 알기는 하는 겁니까?”
“옳지. 우리 케루빔. 아까는 내가 말이 너무 심했네. 너도 이리로 올래? 같이 놀아도 돼. 괜히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아무 눈치 볼 필요도 없다니까?”
최대한 달콤한 목소리로 말해야 하자너.
“정말로….”
하하 호호 행복한 모습을 연출해 주는 것만으로도 세라핌은 부러워 죽는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빛에 볼을 부비거나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주는 행위 자체가 조금 자괴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모르긴 몰라도 세라핌에게는 이 모습이 공원에서 뛰노는 행복한 가족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본인도 여기 와서 행복한 한 때를 같이 누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절망스럽겠지 뭐.
파란색 빛은 여전히 세라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뻐 보이는 것이 눈에 띈다.
‘그래 우리 조금 안 좋기는 했었는데. 이제 새 출발 해야지. 솔직히 너도 좋잖아. 그지? 기생충이라고 그렇게 매도하고 욕할 때는 언제고 기분 좋다고 반짝이고 있자너. 기생충 손짓에 반짝반짝거리고 있자너.’
눈치 없는 은색 빛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달라 붙어오고 있다. 갈색빛은 크게 반응은 없지만 그래도 맞춰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나는 이 빛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하나뿐인 갤러리를 위해서라도 놈들이 행복해했으면 좋겠다.
슬쩍 곁눈질로 놈을 바라보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현실이 놈을 더욱더 슬프게 만드는 것만 같다.
디아루기아의 말처럼 별로 도움이 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뭔가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가는 쾌감 같은 것이 있다.
사이다 한 모금을 들이키는 것처럼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겠는가.
여전히 인간쓰레기를 바라보는 것 같은 디아루기아의 눈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치졸한 행동은 아니지.’
절대로 치졸한 행동은 아니다. 그냥 단란한 한 때를 보내는 건데 뭐.
“대륙을 구한 영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은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세요.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는 게 먼저가 돼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네. 뭐….”
“그래서… 다음 계획은 어떤 겁니까?”
“…….”
“당신이 신이 된다고 칩시다. 그래서 이질적인 빛이 만든 이들을 관리자로 사용하려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되돌아갈 수 있는 힌트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만약 당신이 스스로 기억을 지운 게 맞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도 안배를 해 놓은 게 맞다면… 되돌아갈 방법에 대해서도 분명히 생각해 놓지 않았겠습니까?”
“믿어주시는 거예요?”
“모든 정황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저도 믿기지는 않지만… 일리가 없는 가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솔직히 기억나는 게 없어요.”
“…….”
“저도 뭐라도 힌트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으로써는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특정 행동이나 특정 생각을 떠올리는 게 트리거가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해서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기는 했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네요.”
“방법을 밑에서 찾아야 한다는 겁니까?”
디아루기아의 말에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어느덧 신전에 나와 파란 길드에 모여 있는 이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저한테 말을 걸어준 것은 분명히… 분명히 기영 씨였습니다. 지금도 저희를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맞, 맞아요. 저, 저도 틀림없이 오빠 목소리를 들, 들었어요.
길드원들이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하얀이에게도 메시지를 보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성공하지 못했는데… 내가 모르는 오류가 있었는지 몇 개는 도착한 모양이다.
-그럼 부길드마스터를 살릴 수 있다는 겁니까?
-형, 형님을 살릴 수 있는 거요? 그게 정말인 거요?
아이고, 박덕구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수척해졌어.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기영 씨가 어딘가에서 분명히 도움을 바라고 있을 거라는 겁니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영 씨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래. 나라면 그렇게 말했겠지.
“다른 인간들이 우리를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까?”
“솔직히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뭔가 방법이 있기야 있을 것 같지만… 아! 혹시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이 루시퍼와 내기를 했다는 것도 말했었나요?”
“네.”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네?”
“의도적으로 기억을 되찾지 못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찾을 필요가 없거나 떠올리지 않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지금에 와서는 내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게 무슨….”
“단순히 되살아나는 게 전부였다면 저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컨트롤 프릭 이기영이 정말로 대륙을 관리하고 싶어 하는 게 맞는다면 루시퍼의 눈을 가릴 필요성도 있지 않겠어요? 대륙을 관리한다는 건 독립한다는 걸 의미할 테니… 루시퍼나 다른 악마, 다른 신들의 눈에서도 완전히 벗어난다는 걸 원하고 있을 겁니다.”
“그 말은… 베니고어나 기존 대륙의 신들도 배제해야 한다는 겁니까?”
“배제라기보다는…. 음… 솔직히 저도 초조하기는 합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전부 다 가설이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고,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너무 큰 그림을 그리지 말고 당장 눈앞에 있는 것부터….”
“…….”
김현성 말처럼.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곧바로 행동합시다.”
신성을 떼어내자 천천히 공간이 열린다. 그 안에서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어? 어?”
그 반가운 얼굴도 믿기 어렵다는 듯 손가락질을 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 뭔가 수척해진 얼굴이다.
얘네들이 잠을 자는지는 모르겠지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은 상태, 손에 있는 서류 더미가 눈에 보인다.
방금 전까지 업무를 해결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리라.
한차례 커다란 사건이 끝난 이후에 바쁜 것은 아래에 있는 이들뿐만이 아니었을 테니까.
“이, 이기영 후배?”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은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베니고어 여신님.”
“여기가 어디… 여기가 어디야?”
“지금 일하고 계시는 곳에서 얼마나 받으시면서 일하고 계십니까?”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