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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73화 (764/1,590)

< 773화 마지막 (6) >

“어? 어?”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베니고어 님.”

“여기가… 어디야? 아니… 그것보다… 어? 어? 어… 진짜로 이기영 후배야? 진짜?”

“네.”

“어… 이, 이기영 후배… 끄윽… 끄으윽… 이기영 후배에….”

‘뭐야. 얘 왜 이래?’

“이기영 후배에… 끄윽….”

‘뭐야?’

팔을 벌리며 다가오고 있는 베니고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쪽을 껴안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

얘가 깜짝 놀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극적인 반응을 보여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런 반응이 좋냐 나쁘냐를 묻는다면 좋은 쪽이기는 했지만 이쪽이 정말로 그리웠기 때문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 있었구나. 이기영. 후배. 끄윽… 나, 나는 믿고 있었어. 모두가 이기영 후배의 존재가 사라졌다고, 대륙이, 아니, 차원이 이기영 후배를 견디지 못해 아예 밖으로 뱉어버렸을 거라고 엘룬이 말했지만 나는 이기영 후배가 이렇게 버젓이 존재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구. 끄윽….”

계속해서 울먹이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그 울먹이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꽈악 하고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이쪽을 껴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눈물을 질질 흘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계속해서 끄윽 끄윽 소리가 들려온다. 얘도 은근 정이 많은 타입인 모양이다.

“이기영 후배에… 끄윽….”

‘이제 그만 좀 해.’

뭔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베니고어 님?”

“이렇게 다시 보게 돼서 정말로 다행이야. 끄윽…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해. 많이 도움을 주지 못해서 너무너무 미안해.”

‘아니, 그렇게 미안할 건 없는데.’

자꾸 이러니까 조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제야 떨어지나 싶었지만 살짝 몸을 떨어뜨린 이후에 세라핌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다시 한번 내 얼굴을 확인하고,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빛을 본 이후에는 손바닥으로 푸른색 빛과 은색 빛을 쳐내기 시작.

“너희들! 너희들이 감히! 또?”

조막만 한 손바닥으로 빛들을 찰싹찰싹 쳐내고 있는 모습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파리나 모기들을 잡는 것 같다.

“여기가 어디라고! 당장 떨어지지 못해? 이기영 후배한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테니까! 이기영 후배! 내 뒤로 와! 내가 지, 지켜줄게!”

‘얘 진짜 왜 이래. 뭐 잘못 먹고 왔어?’

“너희가 이곳에 이기영 후배를 가두고 있었구나! 못, 못된 놈들! 이 추악한 피조물들! 이 더러운 괴물들아!”

‘대놓고 추악한 피조물들이라고 하면 얘들 상처 받자너… 더러운 괴물도 좀 너무했어….’

“너희들이 이기영 후배를 괴롭히게 내가 내버려 둘 것 같아!!”

‘아니, 진짜 얘 왜 이래….’

한 손에는 화려한 디자인의 방패가. 나머지 한쪽 손에는 성스러운 창이 소환된다.

‘뭐야. 저건… 방패는 처음 보내.’

베니고어의 방패.

신전에 있는 도서관에서도 저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들은 바가 없다. 애초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솔직히 눈이 휘둥그레지는 광경이기는 했다.

솔직히 얘가 싸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멋있기는 하다.

‘아무리 봐도 전투형은 아닌데….’

겉모습은 그럴듯하지만 뭔가 자세를 잡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한다. 생각해 보면 벨리알과 싸웠던 것도 전부 연기였으니까.

조금 더 내버려 둘까 싶기도 했지만 한 대륙의 신을 자처할 만큼의 신성이 창끝에 모이는 걸 확인한 이후에는 급하게 그녀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힘 조절을 못 해서 이 공간을 날려 버리면 안 되니 말이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베니고어 님.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아주세요. 이제 이들은 적이 아니에요. 아. 한 놈만 빼고요. 아마 궁금하신 게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일단은….”

“…….”

근황 정도는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곧바로 일 이야기부터 하면 조금 정 없어 보이자너.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끄윽… 그으윽….”

“잘 지내고 계셨어요?”

“이기영 후… 후배에….”

아, 시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갔자너.

괜스레 입꼬리를 올리며 등을 토닥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끄윽 끄윽 소리가 줄어들 때 즈음에 본격적으로 입을 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너무 힘들었어. 진짜! 진짜로 너무 힘들었다니까! 위에서는 자꾸 뭐라고 하지. 손에 신성은 없는데 처리해야 할 일들은 많지! 지원도 안 해 주면서 이래라저래라! 제대로 쉬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서… 끄윽… 이기영 후배는 어디로 갔냐고 계속 압박하는데 내가 진짜… 서러워서….”

“힘들었겠네요….”

“응. 다들 비상이야. 바깥 신이 벌려놓은 균열을 닫는 것도 문제고… 갑자기 예전에 신성을 빌려줬던 얘들마저 찾아오는 바람에… 정말로 다들 배려라는 게 없다구. 우리 쪽이 힘든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찾아와서 바로 갚으라고 하는 거 있지?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몇 백 년 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것도 기다리기 힘드나? 소송하겠다고 으름장도 내놓더라니까? 이런 상황에서 분쟁까지 일어나면 우리가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알면서!”

“그러게 말이에요.”

“그 와중에 엘룬은 다른 곳으로 이직 준비한다고 하는 거 있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는지… 진짜. 이기영 후배가 너무 보고 싶더라고….”

‘생각보다 쉽게 풀리나.’

“뭐. 그것도 이제 옛날이야기지만… 이기영 후배가 왔으니까. 이제 만사 해결이지. 기,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것 좀 같이 봐줄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산이 딱 이 정도거든. 더 이상은 다른 지원도 없고… 솔직히 여기에서 더 축소해야 할지도 몰라. 따지고 보니까 여러 가지로 밀린 것도 많았어서… 이번에 벌린 거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들어온 게 얼마 없어서… 노, 노을빛의 신에게 많이 들어갔을 거야.”

‘그거 나한테 들어왔어. 그나저나 우리 현성이는 벌써 노을빛의 신 됐자너.’

“아! 그, 그러고 보니까 이기영 후배도 많이 받았겠구나? 이, 이기영 후배. 이럴 게 아니라 잠깐… 목마르지 않아? 아니면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내가… 선배가 돼서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혹시 괜찮으면 투자 좀 할 수 있을까? 이기영 후배도 알다시피 지금 대륙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고…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앞으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잖아. 이기영 후배가 조금만 도움을 주면 두 배, 아니, 세 배로 되돌려 줄 수 있어!”

절대로 빌려주면 안 될 것 같다.

“저도 베니고어 님의 얼굴을 보면 투자하고 싶지만 그다지 비전이 있는 것 같지는 않네요.”

“그, 그런 말 하지 말구… 이기영 후배. 비전이 왜 없어! 이기영 후배가 있는데 비전이 없을 리가 없잖아.”

“저도 베니고어 님을 믿고 있어요. 만약 베니고어 님께서 온전히 대륙을 관리하고 계신다면 당연히 베니고어 님께 투자해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위쪽에서 떼 가는 게 많은 걸 알고 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대로… 내야 할 세금도 많고… 결국에 대륙이 잘 된다고 한들, 소위 말하는 윗분들만 배부르게 하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서….”

“…….”

“그동안 베니고어 님이 이 대륙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오지 않아요?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손이 저릴 정도로 펜을 움직였지만 남는 게 없지 않습니까. 여전히 대륙은 가난하고, 베니고어 님도 가난합니다. 제대로 된 업데이트도 할 수 없잖아요. 예산이라고 날아오는 것도 쥐꼬리 정도고… 일하면 일할수록 벌리는 게 아니라 손해 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솔직히 투자한다고 해도 원금이나 제대로 회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확신이 없습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떻게 봐도 비상식적인 구조로 보입니다.”

베니고어를 포섭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기존에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더 쉬워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본래 독립이라는 건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는 생각이 아니었던가.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더욱더 그렇다.

베니고어야 신입도 아니고 한 대륙을 책임질 정도였으니 여러 가지로 더러운 꼴도 많이 봤을 테고, 현재 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구태여 이 시스템 안에서 놀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느끼고 있겠지.

얘도 바보가 아니니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슬슬 눈치채지 않을까.

슬쩍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보인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

그리고 누가 봐도 관리직으로 쓸 것처럼 대기하고 있는 사대천사, 아니, 삼대천사들이 다시 한번 조용히 내 얼굴을 바라본다.

베니고어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불가능해. 이기영 후배. 나도 이기영 후배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저도 간단한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제가 베니고어 님을 원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대륙은 새로운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질적인 빛을 열고 새로운 노을을 연 우리 현성이를 보세요. 본래 새로운 신화라는 건 이렇게 탄생하는 법 아니겠어요?”

살짝 불안해하는 베니고어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어떤 걸 상상하는지 알 것 같다. 아마 베니고어 교단이 점차적으로 쇠퇴하는 걸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고 던진 말이었으니 의도대로 된 것 같아 기쁘기는 했지만 쟤가 저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기분이 미묘해지기도 한다.

뭐 당연한 현상이다. 지금 당장은 베니고어 교단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몇백 년이 지난 이후에도 베니고어 교단이 여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대륙에 새로운 신화가 자리를 잡으면 기존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던 것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질지도 모른다.

심지어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시기를 조금 더 가속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하지만 굳이 그런 슬픈 방법은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대륙을 위해 만들고 싶지만 베니고어 님이 없는 대륙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 이기영 후배….”

“베니고어 님 없이는 해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기영… 후배에….”

‘뭐야. 왜 그래. 베니고어.’

“나, 나 사실은… 사실은 이기영 후배가 쓰레기라고 생각했었어.”

“…….”

“교화의 여지가 없는 타락한 영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끄윽….”

“…….”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럼….”

“그래도….”

자꾸만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연봉이라든지, 수익 배분이라든지, 뭔가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야 될까 싶기도 했지만 아마 본능적으로 꺼림칙하다고 느끼는 상태로 들어간 것 같다.

‘이거 안 되나.’

내가 베니고어였어도 쉽게 마음을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베니고어는 테두리 안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벗어날 생각도 없었다.

나름대로 본인의 커리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직장을 바꾸라기보다는 가치관을 바꿔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진다.

물론 내가 아는 베니고어라면 떨어지는 신성에 혹하기야 하겠지만….

“60 대 40으로. 제가 60이고 베니고어 님이 40입니다.”

아니 솔직히 좀 많이 흔들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앞으로 이후 백 년간 베니고어 님께서 받으실 신성은 약… 이 정도가 되겠네요.”

동공이 흔들리는 게 실시간으로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추가 조건 사항은 제가 지금 보내드린 문서에 전부 적혀 있어요.”

문서를 읽고 있는 손이 덜덜덜 떨리는 게 보이기는 한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모습도 시야에 비친다.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할 것 같다. 나와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지만 조금 더 진심을 담아서 말해보는 게 어떨까.

“제가 자회사를 세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자회사를 세우는 거예요.”

“…….”

“진심으로 베니고어 님이 함께해 주셨으면 합니다.”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일단 이빨을 털어놔야 하니 말이다.

‘긴 싸움이 될 것 같은데….’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으니 준비를 다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괜스레 디아루기아 쪽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조금 쉬시면서….”

“할… 할게!!”

‘어?’

“할 거야! 할래! 무조건 할 거야! 이기영 후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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