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5화 마지막 (8) >
“이제는 27군단이 아니지 않습니까. 새롭게 태어난 대륙은 벨리알 님을 유일무이한 만 마의 지배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네가 보낸 계약서의 내용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부족한 비전을 믿고 제의를 수락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기는 했을 거야.’
당연히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나름대로 궁지에 몰렸던 상황에 있었던 베니고어와는 다르게 벨리알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대륙 이외에도 몇 개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벨리알이 의외의 결정을 했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사업체들을 완전히 버릴 생각은 없었지만….
‘솔직히 기대도 안 했자너.’
베니고어처럼 초대한 것이 아니라 계약서를 따로 보낸 것 역시 그런 이유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계속해서 히죽거리는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지만 구태여 먼저 나서서 벨리알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운명 공동체가 된 것이나 다름없기도 했고….
사실 녀석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테니까.
여러 곳에 분산 투자를 하는 것 보다는 똘똘한 한 곳에 직접 투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
어쩌면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의 침공의 배후에 벨리알이 있었다고 발표한다는 딜이 마음에 들었을지도 몰라.
확실한 것은 벨리알의 태도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
별것 아닌 행동이기는 하지만 인간형으로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부터가 나를 배려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뭐라 형용할 수 없게 느껴졌던 악마의 모습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경계심을 풀게 하거나 호감을 주기 쉽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아마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 저 모습이리라.
‘안경은 왜 쓴 거야?’
동업자한테 똑똑해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니지?
그런 시답지 않은 이유일 것 같지는 않다. 아티팩트를 변형해서 가져온 거일 수도 있고…. 뭔가 필요한 이유가 있기야 하겠지만 이것 역시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동업자가 함께해 준다는 것 하나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베니고어가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본래부터 악마들을 혐오하고 있었던 천사들, 아니, 빛덩이들은 대놓고 녀석을 둘러싸고 있다.
디아루기아의 반응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을 경계하고 있었고 은색의 빛은 최선을 다해 벨리알을 공격하고 있다.
저걸 공격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필사적으로 반짝거리며 몸통 박치기를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처구니없지만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이기영 후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쟤, 쟤는 또 왜 온 거야?”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는 겁니까? 악마군단장을 끌어들이다니요.”
디아루기아 너까지 그러지 마.
“날 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본래 있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면 되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서 자리에 앉으시죠. 벨리알 님. 베니고어 님도 진정하세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오랜만이구나. 베니고어.”
“악마와는 말을 섞지 않을 거야.”
“지금 섞지 않았나.”
“안 들려. 하나도 안 들리거든? 하나도 안 들려요.”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베니고어.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너와 나는 계약으로 묶인 사이가 아닌가.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네가 그렇게 부정한다고 해도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네가 더 잘 기억하리라고 생각하는데….”
“그, 그건….”
“벨리알 님의 말대로입니다. 베니고어 님. 계약의 연장선입니다.”
“저번에… 했던 그거?”
‘그래, 우리 저번에 주작했던 거, 그거. 그때 신성이 얼마나 쌓였는지 기억하고 있지?’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성과를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고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는 법입니다. 그 균형을 맞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같은 대륙을 놓고 일하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부서가 다르니 마주칠 일도 많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흑과 백을 나누고 서로 대립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공통된 이익을 위해 함께 일하는 공동체야말로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대륙의 미래입니다.”
“벨리알은 악, 악마잖아.”
“벨리알 님이 대륙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륙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를 찾게 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감당해야 할 두려움과 공포가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어둠은 대륙을 밝게 비추는 햇볕이 될 것입니다. 이미 베니고어 님께서 겪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그 신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대륙은 눈 깜빡할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발전할 거예요. 5년에 한 번 주기로 이벤트를 열어도 100년 동안 대륙을 관리할 만한 예산을 얻을 수 있다고 저희 측 재무팀에서도 판단하고 있습니다.”
슬그머니 디아루기아를 바라본다.
“…….”
억지로 시선을 피하고는 있지만 계속해서 바라보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네. 정확히는 132년입니다. 겨, 겨, 겨, 겨우 5년으로 132년을 벌 수 있는 거로….”
“수고했어요. 루팀장.”
“…….”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내가 그래도 체면이 있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베니고어 님. 벨 이사님의 합류는 우리 자회사가 더 커다란 시장으로 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
“벨 이사님, 현재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몇 개쯤….”
“글쎄… 하나하나 세어보지 않았지만…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 우리 한번 함께 눈을 감아봅시다. 그리고 한번 떠올려 봅시다.”
“…….”
“…….”
“우리 대륙의 이야기가 아니라 벨리알 님이 가지고 계시는 타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곳은 이미 황폐화되어 있는 대륙일 겁니다. 꿈과 희망도 없고, 모든 것을 악마들에게 유린당한… 이미 어둠으로 잠식당한 대륙일 겁니다. 인간들은 꿈을 꾸는 것을 포기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대륙이지요. 흔히 말하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이라고 가정합시다.”
“더, 더러운 악마들… 이 비열한….”
‘너 왜 이렇게 몰입했어….’
“신들조차 포기한 대륙입니다.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한 대륙이에요.”
“아, 안 돼… 포기하면 안 된다구.”
“아무런 희망도 없는 그 장소에 다시 한번 27군단이 나타납니다. 벨리알 님이 악마의 군세를 이끌고 티끌만큼 남아 있는 희망을 짓밟기 위해 강림합니다.”
“나쁜 자식… 나쁜 자식! 이 역겨운 악마 놈들!”
“벨리알 님은 인간들을 향해 외칠 겁니다.”
“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베니고어 뿐이다. 그 찬란하고 빛나는 여신의 눈이 이곳까지 닿지 않는다는 걸 감사해야겠구나. 바스러지거라, 필멸자들이여.”
티키타가 좋네요. 합이 잘 맞아요.
“미안해…. 내, 내 눈이 닿지 않아서 미안해….”
눈을 감고 완전히 몰입한 베니고어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주먹을 꽉 쥔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분한 모양. 심지어 코끝이 찡해진 것 같다.
“인간들은 기도하기 시작할 겁니다. 베니고어시여. 우리들을 구원해 주소서. 저 공포스러운 벨리알에게서 우리들을 지켜주시옵소서.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계십니까. 찬란하고 빛나는 여신이시여.”
“나… 나 여기 있어! 여기 있다구!”
“그리고.”
짝!
“이미 폐허가 된 땅에 아름다운 빛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아아아앗!”
“베니고어의 신화는 그 땅 위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오래토록 황폐화된 대륙에 신화로 남을 것입니다. 새로운 신화의 등장에 기존에 있던 신앙은 무뎌질 것이며 베니고어 님께서는 현재의 대륙뿐만이 아니라 벨리알 님의 손 안에 있는 대륙의 가장 위대한 빛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희망이 되는 것이지요.”
“…….”
“…….”
‘얘 진짜 돈 좋아한다.’
이렇게까지 솔직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천천히 뜬 눈이 흔들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틀림없이 동공이 흔들리고 있다.
자존심 때문에 당장은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있지 않지만 한 번 더 자신을 압박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잘 구슬리면 넘어올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빛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일보 후퇴입니다.”
치고 나와야지 벨 이사.
“알고 있겠지만 나 역시 온건파에 몸을 담고 있다. 인간들이 멸망하고 희망을 잃는 것은 진심으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야. 희망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잃을 것이 없는 인간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지금의 신들이 우리를 부정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현재 차원들의 상태가 지금보다는 나았겠지. 빛과 어둠의 싸움에서 고통받는 것은 인간들뿐이다. 나는 이 오랜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 베니고어.”
“새로운 한 발자국을 위해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베니고어 님.”
“그들이 희망을 얻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 어둠을 밝힐 빛이 바로 베니고어 님이십니다.”
“빛과 어둠의 화합. 우리들이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단을….”
“결단을!”
“…….”
“…….”
“어… 어쩔 수 없나. 그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겠네.”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한 채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모습은 가관, 베니고어의 탄생 비화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원래부터 위 출신인 건가? 아니면 대륙에서부터 위로 올라간 거야?’
후자라면 인간이었을 때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교단에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무언가 비화가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캐물을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본인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일단은 함께 일하기로 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대륙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거네. 그렇지? 이기영 후배?”
벨리알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 것이다.
솔직히 마주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 벨리알의 표정은 왜 베니고어가 악마군단장으로 자리 잡지 않았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으니까. 단언컨대 베니고어는 저 표정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애매한 웃음을 보내며 어쩔 수 없다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이걸 보니 사대천사들이 어째서 기존의 신들을 비판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다 벨리알과 눈이 마주치자 지금 본인이 어떤 모습인지 깨달은 모양.
“탐욕의 악마보다 더 욕심이 많군.”
“…….”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결정된 거지? 그런 거지? 앞으로가 기대되네. 으응….”
“군단의 인사팀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곳이지만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야.”
혼잣말하지 마. 쟤 듣잖아.
“그,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는 거지? 아! 이기영 후배는 이곳에 계속 있을 건 아니지? 일단 대륙을 어떻게 운영할지 회의라도 해보는 게 좋겠네.”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려고 하고 있다.
“이기영 후배는 내려가고 싶을 테니까. 으응. 이해할 수 있어. 나는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겠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신성을 열심히 모은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 가능한 건가? 불가능한가?”
애써 무시하기 어려운 주제.
“그게 가능한 겁니까?”
내가 질문해 봤지만 멍청한 질문 이다. 루시퍼가 나를 되살릴 수 있다면 신성을 사용해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문제가 있다면….
“글쎄… 나도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하지만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 한….”
“…….”
“5만 년 정도만 신성을 모으면….”
뭐?
뭔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베니고어를 바라보자 농담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괜스레 아래로 고개를 내리자 아직도 회의를 진행 중인 이들이 시야에 비쳐왔다.
-무조건 기영 씨를 되살릴 겁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던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개소리야. 내가 상관있어. 현성아.
-그래야지. 형님은 분명히 기다리고 있을 거요.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니까!
나 그렇게 참을성이 많은 성격은 아니야.
‘뭔데 이거 시바….’
솔직히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게….
5만 년 이후에 재회하는 엔딩이었다고?
“…….”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