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6화 마지막 (9) >
‘아무리 그래도 5만 년은 아니지.’
“그럼 회의는 이걸로 마무리하면 되는 거지? 그렇지? 우리 또, 또 언제 모일까? 일단 이 공간에 내 사무실을 만들어 놓는 게 좋겠네! 아! 그리고 로렌이랑 다른 얘들한테도 한번 연락을 넣어볼게.”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일해 보자구. 이기영 후배! 이제 시작이니까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방금 전에 끝마쳤던 회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바, 5만 년은 아니자너.’
5만 년 발언이 충격적이었는지 가까운 자리에 있던 디아루기아도 뭐 씹은 표정을 보내오고 있는 중.
당연하지만 디아루리아가 생을 마치는 것을 이곳에서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소 창백해진 얼굴은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을 보내고 있는 베니고어의 얼굴과 무척 대비되는 표정이었다.
아마 나 역시 디아루기아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 정도는 아닐 거야.’
베니고어가 계산한 것보다는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신성이 벌어들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걸 가정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 건지는 쉽게 계산할 수 없었지만 한 번의 강림에도 어마어마한 신성을 소모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의 계산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나도 돌아가 보겠다.”
“고생하셨습니다. 벨리알 님.”
‘정확히 어느 정도지? 얼마나 기간을 줄일 수 있지?’
1만 년? 아니 최대한 줄인다면 몇천 년까지는 단축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몇백 년이 걸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걸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얘들을 이쪽으로 부르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신성을 얻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결정적으로 파란 길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정말로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계획을 빠르게 실행한다면 만 년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디아루기아 님.”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생각 중이에요.”
루시퍼와 했던 내기의 보상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영을 살리는 거?’
아마 이게 맞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숨어 있는 공간을 만든 이유는 그녀에게 보상받지 않기 위해서겠지.
루시퍼에게 보상을 받아 대륙에 다시 진입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녀가 대륙에 개입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자력으로 부활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으리라.
삼대천사를 관리직으로 만들고, 완전히 대륙을 외부와 독립시키고 벨리알과 베니고어를 포섭해 스스로 신성을 버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건가?’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아니, 도대체 왜 기억을 지워야 했던 거야?’
계획하고 있는 것을 루시퍼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모든 일을 그녀가 모르게 진행해야 했으니까.
‘그럼 지금은? 어차피 지금은 루시퍼의 시선이 닿지 않고 있잖아. 만약에 정말로 내가 스스로 신성을 벌어 아래로 내려가는 게 맞다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할 이유가 없어. 여기서 5만 년 동안 버티는 게 엔딩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까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어차피 루시퍼랑 마주칠 일이 없는데….’
어쩌면 할 일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쉽게 생각해 보면 다시 한번 내가 루시퍼와 접촉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루시퍼를 만나야 되는 건가.”
“네?”
“루시퍼를 만나야 돼….”
아직까지 기억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루시퍼를 속이기 위해서라면 해답이야 뻔하지 않은가. 그녀와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보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지.
내가 기억을 잃는 게 어떻게 그녀를 속이는 것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해답은 루시퍼에게 있다.
문제가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 내 가설이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물증들이 부족하다는 것.
아니,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심증 말고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위험한 도박이다. 확률이 높은 도박에 주사위를 던지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지만 현재의 내 판단이 맞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루시퍼를… 말입니까?”
“그게 첫 번째 단서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연락을 취해봐야 하나?’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정보가 부족하다. 최소한 뭔가 힌트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놓친 게 뭐가 있지? 아니, 지금 곧바로 놓친 걸 확인해 본다고 해서 뭔가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내가 이 공간을 만든 이유는 준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대륙을 관리와 되돌아갈 준비를 위해 만들었을 것이다.
현시점에서 모든 준비가 끝났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제 막 벨리알과 베니고어를 포섭한 시점이었고 내 손으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다.
루시퍼를 만나는 것은 나 스스로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기반이 다져진 이후가 될 것이다.
5만 년을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아주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도움이 필요해.’
누나.
이지혜는 뭘 하고 있는 거지. 만약 소식을 들었다면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거 아닌가.
망원경으로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이 없다. 계속해서 그녀를 찾아봤지만 얼마나 꼭꼭 숨었는지 단서조차 보이지 않는다.
선희영과 함께 떠났을 테니 그녀를 대상으로 찾아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보였었는데. 시발.’
“도대체 어디로 꺼진 거야?”
한낱 인간이 빛의 망원경을 피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로노베를 통해서 연락을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지만 로노베의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벨리알이라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절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로노베는 27군단 소속이 아니다. 그녀가 루시퍼 쪽에 붙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대화 창구가 필요해.’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유지되고 있고 김현성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지만 그것뿐이다. 조금 더 직접적인 연락 창구가 필요하다.
베니고어를 통해서 신탁을 내리는 방향도 있지만 아무래도 위쪽의 눈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괜스레 아래를 내려다본다.
아직까지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파란 길드원들이 시야에 비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던 엘레나도 파란 길드로 돌아온 모양,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까보다 인원이 더 불어나 있다. 현성이와 박덕구, 조혜진. 안기모와 황정연, 김예리. 우리 하얀이, 한소라. 박리안. 알프스. 김창렬. 유아영. 김미영 팀장.
이지혜를 따라나선 선희영을 제외하면 모든 길드원이 모여 있었고 모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보기 좋은 풍경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미 회의 내용이 꽤 진행됐는지 어느 정도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정리하자면 부길드마스터가 대륙을 관장하는 신이 되셨다는 거군요.
-네.
-그리고 우리가 부길드마스터를 다시 데려올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고요.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형님이 정말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래도 조금 힘이 나는 기분이요. 거, 분명히 지금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부길드마스터님이 정말로 돌아오는 걸 원하시고 계실까요?
당연하지.
-원하고 계실 겁니다. 분명히요.
당연히 원하고 있다.
정하얀과 한소라가 귓속말을 주고받는 게 들려온다.
-이건 소라한테만 이야기해 줄게. 만약에 오빠가 안 내려오면 내, 내가 위로 올라갈 거야. 소라도 같이 갈 거지?
-아… 네. 정하얀 님. 물론 저도 같이 가야죠. 가능하다면….
-시, 시간은 조금 걸릴 것 같아. 소라까지 데려가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걸. 힘들지만 참을 수 있어. 물론 오, 오빠가 먼저 내려오면 갈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소라도 같이 올라갈 준비를 하자, 알겠지?
위로 올라오라는 메시지를 보낸 적은 없지만 힌트를 얻은 것만 같다. 본인에게 신성이 쌓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한소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조금은 창백해진 눈치였다. 저 위로 올라가자는 표현이 함께 죽자는 말로 들려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 네. 그래도 저희가 올라가는 것보다는 부길드마스터를 데려오는 게 더 쉽지 않을까요?
-으… 응. 그게 좋지. 난 그냥 혹시나 해서 말한 거야. 소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 하, 하고 있으라구….
-…….
저 상황을 보니 다시 한번 웃음이 나온다. 아까까지만 해도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다.
엘레나와 조혜진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본래 사제였던 엘레나의 입장에서는 위로 올라간 신을 다시 불러오는 게 맞는지, 정말로 내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원하고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만약에 이기영 님께서 내려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하시면… 엘룬 님의 곁에 있고 싶으시다 하시면….
-…….
다시 한번 생각해 봤지만 역시 내려가고 싶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현성이한테 메시지 한 번 더 보내야지.
뭔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지만 쉽사리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
나도 제대로 감을 잡을 수 없으니 오죽할까. 얘네들이 방법을 찾는다는 건 기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
-뭐 쓸데없는 말 할 필요 없다니까. 형님은 분명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소. 그냥 우리는 방법이나 찾으면 되는 거요.
-저도 덕구 씨 말에 동의합니다.
-나도.
박기리 삼 남매.
-신을 다시 아래로 불러온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지만요. 여러 가지 책을 기억하고 있지만 비슷한 내용이 떠올리지 않네요. 베니고어 교단에 있는 서적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게 좋겠어요.
아마 황정연의 기억력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저도 뭔가 도울 수 있을 게 있는지 알아볼게요.
유아영이랑 김창렬은 사실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근데 너네 왜 그렇게 붙어 있어.
아래쪽 역시 단기간에 결론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건 내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일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게 좋으려나.
막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단은….
-네.
-신전을 먼저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
-조각상을 만든다면 기영 씨와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요. 신전은 거, 우리한테 맡겨주쇼. 전진기지도 우리가 만든 거 아니요.
-나랑 기모 아저씨랑 덕구 아저씨 셋이서 만든 적이 있으니까. 도움. 될 거야.
그래도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좋지 않겠어?
-조, 조각상은 소, 소라가 만들면 되겠다.
얘는 전문가 맞아. 인정해.
-허가를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예산은….
김미영 팀장 행동력 빨라.
-예산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드의 자금을 총동원하셔도 됩니다. 자금이 부족하다면 제가 따로 방법을 찾겠습니다.
-…….
-연줄이 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에요.
거기가 혹시 가로쉬앤캐쉬나 미주사랑은 아니지? 역시 쟤는 안 돼. 시바.
평소와 같은 모습들에 잠깐 동안 다운됐던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다.
‘그래. 차근차근 하나씩 해야지, 시바. 괜히 먼저 나서서 초조해할 필요 없자너.’
아래쪽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신전이 지어진답니다. 디아루기아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