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0화 마지막 (13) >
‘그래, 시바. 고맙기는 하다. 우리 단짝이었자너. 잊은 거 아니었자너.’
조혜진의 저런 반응이야 고맙다. 얘가 나랑 시간을 보내는 걸 즐거워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이쪽을 생각해 주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베스트 프렌드라니까.’
하지만 미소가 지어지지는 않는다. 조혜진의 반응이 즐거운 것과는 별개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얀이도 가만히 있는데 왜 그러는 거야, 진짜….’
말 그대로 정하얀도 잠자코 있는 상황이었다. 영혼의 단짝이 자신이라고 주장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반대로 무척이나 온화한 모습을 유지해 주고 있다.
박덕구와 정하얀이 있는 자리에서 신탁을 내렸으니 본인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만, 평소의 정하얀이라면 한 번쯤 고집을 부릴 만하지 않았던가.
지금 정하얀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하얀이를 본받으라고….’
사실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신탁이 뜻하는 인물이 김현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는 완전히 관심을 꺼버렸다.
김현성이 내 영혼의 단짝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한 것이리라. 정하얀보다 얘네가 더 난리를 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 어떻게 하지….”
계속해서 기다리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자 조혜진은 괜스레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중, 눈을 뜬 채로 조각상을 올려다보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에는 아직도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시바….’
조혜진이 조용히 조금씩 조금씩 위치를 옮기는 것이 눈에 보인다. 조금이라도 조각상에 가까워지면 뭔가 반응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대놓고 김현성의 옆으로 다가가 ‘길드마스터가 아니라 저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용기는 조혜진에게 없었다.
아니, 아마 그 누구라도 용기를 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척이나 엄숙한 종교적 행사에 돌발 행동을 한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자신이 영혼의 단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김현성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싶다는 마음도 마음이거니와 애초에 조혜진은 남의 눈에 튀는 행동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다.
조각상에서 반응이 없자 신도들은 더 열렬한 기도를 보내오는 중. 찬송가는 더욱더 커졌고 강림을 기다리는 축제가 다시 한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천천히 해가 지는 시간대라 하늘이 색을 바꾸고 있었지만 완전히 해가 지기 전까지는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해가 저물 때까지는 무조건 내가 등장하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못 내려간다니까. 진짜로….”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몇 분이 더 지난 이후, 너무 반응이 없자 실망한 군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아쉬워하는 이들도 보였고, 교단에서 파견된 사제들은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아직까지 파란 길드원들이 열을 맞추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가운데 조혜진만 유독 앞으로 삐져나와 조각상 쪽으로 붙고 있다.
김현성 이 새끼는 여전히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듯한 얼굴이다.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기영 씨… 제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그래 목소리가 들리기는 들리는데.’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대답하기 조금 그래.’
다시 한번 로자리오를 꼭 쥐고 기도를 올린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들어오는 기도는 저곳에 모인 인파들의 기도들을 모조리 튕겨내고 가장 앞 열에 설 정도로 열정적이다.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부디….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사제단은 대놓고 대책회의를 하는 중. 일을 크게 벌인 만큼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는 거겠지.
조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제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쩌면 신탁이 뜻하는 영혼의 단짝이 노을빛의 검사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교황님께 소식을 전하기는 하셨습니까?
-네. 하지만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실 거라는 말씀 밖에는… 믿음이 확고하신 것 같았습니다. 교황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다른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망한 신도들을 달랠 방법을 찾아야지요. 제 생각에도 신탁이 뜻하는 영혼의 단짝은 노을빛의 검사가….
-아마 노을빛의 검사가 맞을 겁니다. 그가 주장한 게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뭔가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께서 연달아 강림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무언가 공물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흔한 예는 아니지만 엘프들의 경우에는 엘룬 님께 공물을 바친다고 하더군요.
-이기영 님께서는 욕심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공물이라니요. 현세에서도 물욕 하나 없으셨던 분께 공물이라니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말조심하세요! 베리놈 사제! 그분의 화를 사게 될 겁니다. 노하실 게 분명합니다! 베니고어의 아들에게 공물이라니! 공물이라니요!
-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말실수를….
사제단 쪽으로 다가간 조혜진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은….
-물론 부길드마스터께서 욕심이 많으셨다는 말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챙기기보다는 남을 도우시는 걸 즐기시기는 했지만… 제 기억에 부길드마스터께서는 가방을 모으시는 소소한 취미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따로 장식장을 두실 정도로 매번 같은 가방을 수집하셨습니다.
-허허… 그런 일이….
-길드마스터께서도 그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항상 선물을 해주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가 그분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허…허허….
-…….
-뭔가를 담아두고 싶으셨던 것 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들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보관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정말로 소박한 취미라는 생각도 듭니다. 새삼스레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분께서도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요. 홀로 대륙을 지키시고 모든 짐을 떠안으신 분이 아닙니까. 마음속과 머릿속에 있는 커다란 압박감을 떨쳐 낼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게… 그게 고작 가방 수집이라니….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베리놈 사제님.
-…….
-이기영 님께서 현세에서 보낸 시간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게 고작 가방 수집이었다니… 그 소박한 취미가 그분을 달래주던 유일한 탈출구였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눈물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진짜 사제라는 놈들은 진짜 무섭다니까. 와….’
어떻게 인간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관하기 위해 가방을 수집한다는 생각까지 나온 건지 모르겠다.
‘말조심하고 행동 조심해야 돼. 시바.’
영혼의 단짝 발언으로 이 사달이 난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실제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진심 어린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제들의 모습은 가관, 그 와중에 조혜진이 뭘 노리려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길드마스터가 최근에 같은 종류의 가방을 입수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바, 그 와중에 또 샀다고? 아니, 김현성 정신 나갔어?’
-아! 그걸 전해드리면 되겠군요.
-네. 그렇지 않아도 전해드리는 게 어떨지 여쭙고 싶었던 참이었습니다.
-당연히 전해드려야지요. 당연히요.
-제가 길드마스터께 직접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조혜진 님.
“진짜 미치겠다, 시바.”
진짜 미치겠다, 이 새끼들. 시바.
조혜진 얘는 도저히 영혼의 단짝이 자신이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에 선택한 방법은 공물을 전해주는 척하며 김현성의 옆에 서성거리는 것, 조금이라도 조각상 가까이에 닿으면 내가 반응할 거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나쁜 작전은 아니었지만 가방을 공물로 받아먹는 신이 되고 싶지는 않다.
조혜진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지 하얀 천으로 공물을 가리기는 했지만 천천히 다가오는 조혜진의 모습을 본 김현성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부족한 게 뭐였는지 깨달은 듯한 얼굴, 어째서 저걸 깜빡했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저런 이미지였다고?’
-기영 씨에게 드릴 것이 있습니다.
‘주지 마…. 시바, 주지 말라고.’
애초에 튀어나갈 수도 없지만 내가 저걸 받고 튀어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파란 길드 이 새끼들이 단체로 나를 먹이려고 작전이라도 짜놓은 것 같다.
굉장히 성스러운 물건이라도 들고 오는 양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기는 조혜진, 신께 보내는 감사의 선물일 거라고 웅성거리는 갤러리들.
생각이 있는 신이라면 이 타이밍에 등장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문제가 있었다면….
한소라의 몸이 덜덜덜 떨려오고 있었다는 것 하나.
‘아… 하얀아… 시바… 아….’
영혼의 단짝이 김현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한 정하얀이었다.
‘아… 아니야. 아….’
자신도 아니고, 박덕구도 아니고, 김현성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영혼의 단짝이 누구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자신이 모르는 제삼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제2차 박미진 사태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표정이 굳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위험을 감지하는 한소라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지금 이대로 놔두면 틀림없이 크게 한 번 터질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 조혜진은 김현성에게 공물을 넘겼고 둘 모두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다.
조혜진은 자신이 왔으니 이제 내가 나타날 거라는 믿음이었고 김현성은 공물로 내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믿음이었다.
원숭이가 아기 사자 들어 올리듯 공물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김현성, 그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이빨을 뿌득거리기 시작한 정하얀.
드높이 울려 퍼지는 찬송가. 천천히 지는 해. 환호성을 지르는 신도들, 바람 잡기 시작한 사제단과 언제 일어났는지 박수를 보내고 있는 박기리 삼 남매.
쟤네들이 제일 나쁘다. 엘레나는 왜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잖아. 왜 우는 거야 도대체, 시바.
모든 게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만 같다. 장담하건대 마지막 전투보다 지금 이 상황이 더욱더 참기 힘들다.
옆을 바라보자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는 베니고어의 얼굴이 보인다.
‘얘는 또 언제 왔어.’
틀림없이 비웃음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시바….’
“쉽지 않다니까. 대륙을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이기영 후배.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참… 나도 실수할까 봐 말 잘 안 하잖아. 너무 실망하지 마… 원래 신입들은 대부분 그런다니까.”
‘…….’
“물, 물론 이기영 후배는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직 신입이기는 신입인 모양이네. 아직 애송이야. 푸… 푸히힛. 내가 이것저것 가르쳐서 올바른 길로 이기영 후배를 인도해야겠어. 표정 좀 풀어 이기영 후배. 원래 실수하면서 배운다고 그랬잖아. 그렇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괜스레 고개를 숙이니 아래의 상황은 더욱더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중,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결국에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이기영 님이시다….
-이기영 님께서 강림하셨다!
-정말로 강림하셨다고!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베니고어의 아들이다!
-신이시여 언제나 항상 저희를 굽어살피소서.
-신이시여! 대륙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당신께… 평생을 당신만을 위해 기도하겠나이다.
-절대로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
-기영 씨?
“…….”
-기영 씨….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녀석.
뭐라고 입을 열어야 이 손해를 복구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