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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82화 (773/1,590)

< 782화 마지막 (15) >

-전부 다 죽일 거라고.

“…….”

‘뭐야. 이 누나 왜 이래….’

“…….”

‘이 누나 지금 장난하는 거지? 뭐 이렇게까지 해? 뭐야, 무서워. 그러지 마.’

다시 한번 봐도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다.

‘얘가 왜 갑자기 여기서 튀어나와?’

제발 좀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 저런 모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최종 빌런 같은 모습을 원한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함께 있는 이들이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카스가노 유노와 선희영, 틀림없이 내가 알고 있는 그녀들이다.

물론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선희영의 얼굴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 들어서 있다. 마치 1회 차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카스가노는 평소 같은 표정이었지만 평소보다 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읽기 어렵다.

커다란 망토 같은 것으로 몸 전체를 두르고 모두가 같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

멀리서 보면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들 외에도 몇몇 인물들이 더 보이기는 한다. 이지혜의 옆을 지키고 있는 하연수. 쟤는 저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딜 가든지 간에 꼭 데리고 다니는 인선이었으니까.

약간 의외였던 것은 조금은 생소한 얼굴들이 보였다는 것. 아니, 생각해 보니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쟤네 어디서 봤더라.”

라고 자기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진 것도 잠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1회 차 여단.’

내 기억이 맞다면 뒤쪽에 병풍처럼 서 있는 저 쌍둥이들은 1회 차 여단 멤버가 맞을 것이다.

그 옆에 있는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다리 한쪽이 없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온전한 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분명히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본 기억이 있다.

당시에 봤던 녀석 중,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녀석은 키가 크고 빼빼 말랐던 녀석, 가장 기분 나쁜 기운을 풍기고 있었던 녀석이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와 녀석만 있었다면 내가 1회 차 여단을 보고 있나 하는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지혜가 어떻게 저 3명과 연결고리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이상하지도 않지, 뭐.’

소수의 인원으로 대륙을 벼랑 끝까지 내몬 놈들인 만큼 재능 하나는 기가 막히지 않았을까.

카스가노가 정보를 전해줬을 수도 있고. 음지에서 활동하던 녀석들이니 이지혜가 건져냈을 수도 있다.

1회 차와는 역사 자체가 바뀌었을 테니 놈들의 성향도 바뀌었을 것이고….

아! 키가 크고 빼빼 말랐던 놈 같은 경우에는 교화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해 제거하지 않았을까. 아마 정진호 그놈과 비슷한 종류의 녀석이었을 것이다. 성악설을 믿게 만드는 전형적인 쓰레기 말이다.

그 밖에는….

‘라파엘은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이지혜와 같이 행동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 아니면 그냥 이 자리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뭐가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현재 이지혜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는 것. 흑화를 해도 제대로 했는지 표정이 완전히 굳어 있다. 나 역시 그녀가 저 정도로 인상을 구긴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이 누나 왜 이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 해. 솔직히 딱 보면 척 아니야? 감 오는 거 아니냐구.’

상식적으로 내가 슬픔과 죄를 사할 사람은 아니자너. 아무 조건 없이 걍 뒈질 사람은 아니자너. 누나가 더 잘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정말로 내가 저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렇지? 정말로 희생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 물론 희생한 게 맞기는 해…. 아마 카스가노도 옆에서 뭐 열심히 말했겠지.

이기영 님은 스스로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느니, 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하셨다느니, 최대한 막으려고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느니, 뭐 그런 이야기 했을 거야. 그래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석상에서 지껄인 개소리들이 진심으로 지껄인 소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로노베와 계약한 그녀가 위쪽에서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리가 없다.

‘누나 다 알면서 그러는 거잖아. 그냥 겁주는 거자너… 빡쳐서 그냥 화풀이하는 거자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누나를 왜 불렀겠어….’

제발, 그럴 가능성이 높다. 위쪽에서 문제가 있으니 아래쪽에서 도움을 주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나도 누나한테 제대로 된 계획을 알려주지 않고 일을 시행했으니 너도 한번 엿 먹어 보라는 느낌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 아닐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괜찮으세요? 언니?

-…….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만약 이지혜가 진심이라면.

정말로 대륙을 처음으로 다시 되돌릴 생각이라면….

“어떻게 하지?”

-시작할까요?

“뭘 시작해. 아무것도 시작하지 마.”

이걸 김현성이 감당할 수 있나?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이지혜를 김현성이 막아낼 수 있나.

머릿속으로 잠깐 고민을 해봤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무력, 여단의 무력과는 별개로 지금의 김현성이 지혜 누나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조금 저급하게 이야기하면….

‘개 발릴 거야.’

내가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를 높게 평가하는 것과는 별개로 김현성은 지혜 누나를 감당할 수 없다.

사실 여단도 필요하지 않다. 여단은 그녀의 몸을 보호하고 그녀의 계획을 조금 더 빠르게 앞당길 수 있는 장치일 뿐이다.

약간의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이지혜는 여단 없이도 일을 진행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이지혜가 대륙에 개판을 친다면 어떨까. 아마 이런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 않을까.

‘일단 김현성이 나를 찔렀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겠네.’

베니고어넷이나 여신의 거울은 막스로 인해 통제되고 있으니 그런 소문을 퍼뜨리기 쉽지 않겠지만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현성이 나를 찔렀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할 것이다.

파란 길드와 김현성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 테고 김현성을 완전히 고립시킬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정하얀과 김현성을 싸움 붙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

김현성과 대륙을 분리시키는 게 첫 번째 과제. 솔직히 저걸 보면 그녀의 첫 계획이 어렵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제가 살리고 말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답해 주세요. 기영 씨. 대답해 주세요!

-노을빛의 검사님.

-길드마스터….

-제길… 제기랄… 흐윽… 대답해 주세요. 제발… 희망이 있다고… 가능할 거라고 대답해 주세요.

아직도 저러고 있자너….

저 새끼는 지 인생 최대의 위기가 왔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이미 꺼져버린 석상을 향해 소리치고 있는 중.

본래의 김현성으로도 쉴 새 없이 뒤통수를 처맞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진대 저렇게 멘탈 나간 현성이 뒤통수를 어루만져 주는 것 정도야 얼마나 쉬울까.

재정 문제를 포함해 여러 가지 문제를 떠안고 있는 파란 길드도 방패막이 되어주는 데 한계가 있고 결국에는 내부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베니고어 교단과 이기영 교단을 이간질할 수도 있겠지. 국가와 국가 사이의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도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이지혜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너도 한번 아무것도 모르는 게 얼마나 엿 같은지 느껴보라는 의도라면 이미 성공했자너. 그러니까 그만해. 누나. 진짜 불안해.’

-언니?

-…….

-언니….

‘누나 왜 울어. 울지 마.’

-병신 같은 새끼.

‘이 누나 연기 장난 아니자너. 진짜로 장난 아닌 것 같은데….’

-이 병신 같은 새끼.

‘알고 있는 거지? 다 알고 있잖아.’

-나도 몰랐었지 뭐예요. 오빠.

“…….”

-그래. 내가 이렇게 화가 날 줄은 정말 몰랐었다고. 이렇게 기분이 엿 같을 줄은 정말 몰랐어. 솔직히 그냥 잊어버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오빠도 나랑 똑같을 거야. 그렇지? 비슷한 상황이었으면 분명히 같았을걸?

“…….”

-감히 내 걸 건드렸는데.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줄 알았어요? 정말로 내가 그렇구나 하고 수긍할 줄 알았던 건 아니지? 이렇게 전부 다 끝내고 가면 룰루랄라 행복한 삶을 즐길 줄 알았냐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

“…….”

-대가를 치러야 돼. 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어서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일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야. 네가 무슨 정신으로 이런 개 같은 엔딩을 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라고. 중요한 건 이거 하나야. 내 걸 건드린 새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거.

“…….”

-잘 들어. 내 사랑.

“…….”

-네게 바칠게.

“…….”

-이게 누구의 희생으로 얻어진 평화인지도 모르는 저 썩어빠진 새끼들의 비명을 바칠 거야.

‘쟤네 알고 있는 것 같아. 누나.’

-오빠를 찌른 저 새끼의 시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폐허가 된 대륙 위에서 너와 춤을 출거야.

“이 누나 진짜 몰라?”

천천히 등을 돌리는 이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단 멤버들이 천천히 그녀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될 거야.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린 상태에서 다시 한번 만나게 되겠지?

“아… 시바….”

-재미있겠네. 그렇지 않아?

“진짜….”

조용히 가면을 올려 쓴 그녀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사랑해. 동생. 내 소울 메이트.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가면 안의 얼굴이 비틀려 있다.

-나중에 보자.

그렇게 그녀는 순식간에 어디론가 꺼져 버렸다. 망원경으로도 잡을 수 없는 것을 보니 로노베의 도움을 받은 모양이다.

“시이바….”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온다. 정말로 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혀 올 지경.

왜 내가 지혜 누나로 인해 개판이 날 대륙의 운명을 걱정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슬쩍 옆을 둘러보니 베니고어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직감한 모양이다. 계속해서 실실 웃고 있었던 전과는 다르게 상당히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어, 어떻게 해? 이기영 신도?”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접촉을 해야 하기는 하는데….”

“저 여자가 날뛰면 어떻게 하지? 이기영 신도가 좀 말려봐야 하는 거 아니야? 어? 할 수 있지? 할 수 있는 거지? 나… 나… 희생하기 싫어 이기영 후배. 나는 알타누스가 아니라구. 아직 못해본 것도 많고….”

“…….”

“이럴 게 아니라 엘룬한테 빨리 이, 이쪽으로 합류하라고 해야겠네. 지, 지금은 일손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니까. 어려운 문제는 잠깐 날려버리고 으응… 나는 여기에 조금 더 집중할게….”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베니고어님.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준비는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준비?”

“아마 뭐가 됐든 간에 일을 진행하기는 할 것 같습니다.”

“뭐?”

“저를 도와주려는 의도건, 대륙을 부술 의도이건 간에 일을 벌이기는 할 거예요.”

“아….”

“수습할 준비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내려갈 준비라고 해도 되겠네요.”

그 말 그대로.

솔직히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떤 방향이 됐든 간에 그녀는 나를 되살릴 거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녀가 또 보자고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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