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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83화 (774/1,590)

< 783화 마지막 (16) >

“준비해야 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

“인간들 역시 본인들 나름대로의 준비를 해야겠지.”

큐브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벨리알이 눈에 보였다. 공중에 반쯤 떠 있는 큐브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시선을 떼기가 힘들다.

“그 말씀은….”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로노베와 계약한 인간이 다시 한번 모든 걸 원점으로 되돌린다는 것 말이다.”

“…….”

“나름대로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건 그런 의미야. 로노베는 27군단 소속이기는 했지만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군단을 가지고 있고, 엄밀히 말하면 이전의 나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자신의 계약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 내가 네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계약 조건이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겠지.”

“흐음….”

“불가능하다고 느껴지지도 않아. 날파리처럼 떠다니고 있는 놈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검과 검의 싸움이었다.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

“…….”

“정말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고 있는 거라면 전쟁에서 승리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이다. 아무런 조건이나 이해관계 없이 상대를 망치는 일만큼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명분도, 이유도, 전쟁이 끝난 뒤의 이해득실이나 후처리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부수기만 하면 된다는 것 아닌가. 아마 그자나 너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역겨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악의에 똘똘 뭉쳐 있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지. 대륙의 인간들 역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야. 나는 저곳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싶지 않다.”

“나, 나도 마찬가지야. 엘룬도 아직 올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구… 위험 부담도 크잖아. 그렇지? 이기영 후배.”

“악마보다 더욱더 악마 같군. 베니고어. 이참에 업종을 바꿔 보는 것이 어떤가.”

“…….”

“…….”

“아무튼 네가 원한다면 접촉을 해보겠지만 그게… 꼭 긍정적인 영향을 불러 오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어떤가….”

‘로노베와의 접촉은 불가능한 건가.’

“아니요. 아직 접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루시퍼가 로노베를 극진히 아낀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건 위험할 것이다.

‘나라도 아끼겠다. 시바.’

한낱 군단원에서 군단장까지 초고속으로 승진한 인재를 아끼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어디에서나 이례적인 사례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로노베를 아끼는 것은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유추해 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가설을 가정해 보자면 이렇다.

‘배후에 루시퍼가 존재할 확률도 있는 건가?’

루시퍼가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을 날려 버릴 수는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로노베와 루시퍼와의 관계일 뿐 지혜 누나와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

사실 이지혜가 루시퍼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도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이 경우에는 루시퍼가 뭘 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둘이 접선한 적이 있다면 서로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기의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루시퍼한테 설득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언제부터 움직일 생각이지?

길다고 말하기에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빌드업을 아예 하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이지혜가 정말로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면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리라.

자그마치 6개월 정도였으니 슬슬 뭔가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대륙이 준비가 되어 있냐고 묻는다면 아니올시다고….’

전쟁의 후처리를 하기에도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상처를 회복하기에는 너무 짧았고, 무엇보다 새로운 위협이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정하얀은 마탑의 할배들과 초보 마법사들을 상대로 자신을 우상화하며 신성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다.

-저, 저, 저는 마법의 신이에요. 그, 그러니까… 마법의 신이 된 것 같아요.

-정하얀 님?

-똑, 똑, 똑바로 들으세요! 저는 마법의 신이에요!

‘그렇게 하는 거 아닌 것 같은데.’

-기도해야 하는 거예요. 신한테는 기도를 해, 해야죠. 소, 소라는 마법의 신 옆에 있는 마법의 천사예요. 아시겠어요?

-정하얀 님… 갑자기….

-아시겠냐구요!

-네… 허허허. 네 알겠습니다. 정하얀 님.

-마법을 쓸 때마다 저한테 기도를 드려야 하는 거예요. 소, 소라한테도 마찬가지고요. 일, 일단 따라오세요. 마법의 신이 어떤 마법을 쓰는지 보, 보여드릴 테니까. 아… 그전에 일단 기도를 드려야죠. 기도하세요.

-아… 어떻게….

-그건 저도 모르지만 일단 기도해요. 진, 진심 어린 기도요.

정하얀을 귀엽게 쳐다보는 마탑 할배들은 일단 그녀가 시키는 대로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신성이 쌓일 리 만무하지 않은가.

물론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위로 올라오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소소한 효과에 웃음이 나오는지 자꾸만 실실 웃고 있는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띈다.

옆에 있는 한소라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중.

-어, 어때 소라야?

-아… 네. 저도… 네….

-마, 마법의 천사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천사 할까?

-아… 네. 생각해 볼게요.

차희라는 온종일 술 퍼마시고 자고 술 퍼마시고 자고 하느라 정신이 없다.

전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드디어 전투가 끝났다는 생각에 긴 휴식에 들어가 있었고 김현성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조각상의 앞에서 보내고 있었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기웃거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다른 방법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

솔직히 지난 시간 동안 꽤 열심히 살아오기는 했다.

조각을 깎고 신전을 지으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끊임없이 움직였겠지만 막상 상자를 까보니 변하는 게 없어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거울 호수로 들어가 보는 걸 생각 중입니다. 기영 씨. 차원의 파도 안에서라면 기영 씨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이른 시간이나 일과가 끝난 뒤에 녀석이 조각상으로 돌아와 혼잣말을 내뱉는 것은 습관 같은 행동이 되어버렸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정신적으로 문제를 겪고 있는 것 같았다.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사용해 어느 정도 바로 잡아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폐인이 되지 않았을까.

“이기영 후배. 차, 차라리 노을빛의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떨까? 이기영 후배가 노을빛의 신에게 위의 상황을 설명하면 되잖아. 이기영 후배의 능력이 있으면 제한적이지만 목소리를 전할 수도 있으니까. 대륙의 위기가 찾아왔다구.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구… 그렇게 말하면….”

“멍청한 짓이다. 지금까지 해놓은 구역질 나고 쓰레기 같은 역겨운 짓거리를 떠올려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뭐라고 이야기를 꺼낼 텐가.”

‘그렇지… 벨리알 말이 맞자너. 지금 와서… 다시 살아나고 싶다고… 좀 그러면 그렇자너… 이미 이빨도 다 털어놨구… 그림도 이상해질 것 같고… 무엇보다….’

김현성이 다른 방법을 찾기에는 힘이 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그걸 기반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현성에게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당장 나 역시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확히 어떻게 해야지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건지에 대한 감을 찾기가 힘들다.

루시퍼와의 내기가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것은 모든 게 안개에 싸여 있는 상황.

김현성이 위의 상황을 아는 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압도적으로 잃는 게 많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녀석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제삼자가 아니라 내기의 주체였으며 내기의 주제였다.

내가 김현성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승부조작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그에 따른 패널티가 뭔지 알 수 없는 것도 이유지.’

사실 이외에도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자잘한 이유가 있기야 하다.

“그, 그럼 내가 신탁이라도 내려야 할까? 지, 지금 여유가 조금 없기는 한데….”

‘잘 모르겠는데….’

아직 일이 터지지 않았으니 어디서부터 틀어막아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사실 ‘신탁 하나로 준비하세요’로 끝내기에는 지혜 누나의 포부가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신탁 날려서 준비하게 만드는 거로 준비가 될까?’

그녀가 뭘 하든지 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외부에서부터 외신이 쳐들어오는 것을 준비하라는 신탁은 수긍이 가겠지만, 이지혜처럼 들어오는 종류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내부에서 커지고 있는 병에 대비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조심할 수는 있겠지만 어떤 병에 대비하라는 건지도 알 수도 없을 것이고 결국에는 뭔가를 준비하기 전에 뒤집힐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얘를 어떻게 말리지?’

손과 발이 필요하다.

대륙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것 같다.

‘복수심에 불타는 가면 쓰레기를 막아야 되자너.’

이 상태로는 이지혜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신탁 몇 번 날리는 걸 개입이라고 한다면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냥 붙어도 될까 말까인데 나이트랑 폰 빼고 게임하는 거나 다름없지.

지혜 누나가 그냥 빌런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가면 빌런이니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괜스레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을 때 다시 한번 벨리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지는 그게 아닌가.”

“네?”

“네 손발이 되어 줄 인간을 찾아야 한다는 것 아닌가?”

“뭐 비슷합니다.”

‘원래는 그게 지혜 누나가 될 예정이었는데. 시바.’

“이야기가 쉬워지겠군.”

‘그게 어떻게 이야기가 쉬워지는 건데?’

“조금 투자금이 들어가기야 하겠지만 일이 터지고 난 이후에 수습하는 것보다는 수지가 맞을 것이다.”

“그, 방법이 뭔, 뭔데?”

베니고어와 벨리알이 눈을 마주치고 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벨리알을 지켜보고 있던 베니고어도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는 중.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보내며 연속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그러네! 그 방법이 있었네.”

‘그게 뭔데? 왜 너희들끼리만 재밌어. 시바, 나도 좀 재미있자.’

“말씀해 주세요.”

“역시 이기영 후배도 아직 한참 멀었네.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너도 방금 전까지 몰랐잖아.’

“생각해 봐. 우리가 인간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퀘스트? 신탁?”

“그렇지. 지금 이 공간에서는 퀘스트를 보내기에도 무리가 있구… 신탁이나 강림 같은 건 아무래도 지속적으로 봐주기에도 힘드니까. 수지에도 안 맞고… 둘 다 정답이지만 내가 원한 정답은 아니네. 지속적으로 대륙을 케어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이기영 후배.”

오랜만에 선배인 척이 하고 싶은지 위풍당당한 모습이 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저 수수께끼에 호응해 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빨리 대답해 달라는 듯 벨리알을 바라보자 베니고어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해줄게!”

“…….”

“용사.”

“아….”

“성검을 내리는 거야. 신의 대리자를 세우는 거라고.”

때마침 조각상의 앞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

“…….”

“제 경우에는 성창이 되겠군요.”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부길드마스터? 아니….

“…….”

-기영아.

조용히 입을 여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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