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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85화 (776/1,590)

< 785화 마지막 (18) >

조금 진정했는지 숨을 몰아쉬는 조혜진이 보였다. 으스러질 정도로 손에 꽉 쥔 창이 괜스레 눈에 띈다.

손에 놓는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창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그녀답지 않다고 느껴진다.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로서는 무척 적절한 행동에 흐뭇해졌지만 티를 낼 수 있을 리 만무, 현재의 상황을 설명할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기 때문이다.

조금 사무적인 관계가 되어 일을 처리하면 어떨까 싶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긴밀한 협조가 필요한 일인 만큼 내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다.

-후우….

다시 한번 숨을 내뱉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약한 미소가 서려 있다.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창이 내려온 이후 이기영의 용사로 선택받았다는 사실보다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게 좋았겠지.

-부길드마스터…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뭐 어떻게 되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지금 일어난 일 그대로 혜진 씨가 제 대리자로 선택받은 겁니다. 제가 어마어마한 빛의 힘을 사용해 성스러운 창을 내렸고 혜진 씨는 그걸 받아들였죠.”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찾은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요. 굳이 그렇지는 않은데….”

‘그거 너 아니라니까.’

-잘 지내고 계신 겁니까? 지금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겁니까? 정말로 신이 된 겁니까? 돌아오기는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 조각상 안에 있을 때의 그 느끼한 말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고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얘 말이 왜 이렇게 빨라?’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천천히 좀 합시다, 천천히 좀. 제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일단 체스판이나 좀 가져오세요. 제 방에 있는 거로… 그거 현성이가 선물해 준 거로 가져와요. 아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네요. 어차피 굳이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을 필요가 없는데….”

-지금 이 상황에 체스가 눈에 들어옵니까? 흐윽….

‘아니, 얘 또 왜 울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체스를 두지 않는다는 이야기 때문에 내가 한 판 땡기자고 하자는 줄 아나 보다.

‘아, 그런 거 아닌데.’

일단 심심한 게 첫 번째이기도 했고, 그냥 앞으로의 대화가 조금 원활하게 진행됐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게임 좀 하면서 대화하면 차분해 지고 좋자너. 오랜만에 옛날 생각도 좀 나면서 추억에도 좀 젖어주고 막 그런 거 있잖아. 그렇지?

-부길드마스터의 방 열쇠는 길드마스터께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제 방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니, 일단 이건….

“물어볼 게 뭐 있습니까. 일단 비밀로 해요. 어차피 드러나기야 하지만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일을 키우면 안 될 것 같으니… 전 대륙에 공표하고 싶은 건 아니죠?”

-사실 별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그보다 부길드마스터 갑자기 이 시기에 이런 걸 내린다는 건….

“용사가 나타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대리자가 필요하기도 했고… 아, 일단 빨리 갑시다. 궁금한 건 천천히 이야기해 드릴 테니까.”

입술을 깨물며 몸을 옮기는 조혜진이 눈에 보였다.

조금은 불만스러운 모습. 뭐,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워낙 많은데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아 짜증 나기야 할 것이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계속해서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당장 내일 아침만 돼도 신전 안에서 일어난 기현상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물을 겁니다. 제가 손에 들고 있는 창에 대해서도 묻겠죠.

“설마 제가 그걸 모를까요. 그냥 제게 선택받았다고, 신의 대리자가 되었다고만 말하면 대충은 알아들을 겁니다. 아! 일단은 말을 맞추는 게 좋겠네요. 자세한 내막은 설명하지 말고 그냥 선물을 받았다, 정도로만 설명하면 될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끝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혜진 씨가 노력해 봐야죠. 아무튼 그립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조혜진은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리웠겠지.

자주 앉았었던 작은 테이블, 거의 항상 체스판이 올려져 있었던 거로 기억한다.

와인 한잔하고 수다 떨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고, 아무 말 없이 게임을 하기도 했었지.

지금은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았지만… 조혜진이 주섬주섬 서랍에서 체스판을 꺼내 놓으니 정말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와인 한 잔… 아. 죄송합니다.

“네. 지금은 못 마셔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 그래도 잔은 두 개 올려놔요. 기분이라도 좀 내면 좋을 것 같으니까.”

-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본래 잔을 세팅하고 와인을 고르는 건 내 일이었지만… 여기서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 전부 맡기는 게 좋겠지.

-뭘… 마시는 게 좋을까….

구석에 쌓여 있는 빈 병들이 많이 보이는 걸 보니 그동안 많이 마셨던 모양.

적당한 걸 한 병 가져온 이후에 잔을 채우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즐거워 보였다.

조혜진이 어째서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잃어버렸던 일상을 되찾은 것 같은 느낌이겠지.

아까까지만 해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눈에 띌 정도로 흥이 오른 것 같다.

-이게 좋겠네요. 어차피 부길드마스터는 마시지 못하겠지만… 말은 움직일 수 있는 겁니까?

“멍청한 질문이네요. 당연히 혜진 씨가 제 말도 움직이셔야죠. 일부로 다른 곳으로 옮기지는 마세요. 질 때 지더라도 치졸하게 그러지 말고 패배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라는 이야깁니다. 아시겠어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시작하죠. 일단 폰부터 움직이겠습니다. 실력이 얼마나 퇴화했는지 봅시다.”

-이제야 부길드마스터와 편하게 둘 수 있겠네요.

‘얘 봐라.’

조혜진도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내 말까지 함께 움직이는 게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할 텐데 판에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

잔을 부딪치려 올리다가도 대상이 없다는 걸 깨닫고 머쓱하게 웃기는 했지만….

“그냥 가져다 대요.”

반대편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조금 느신 것 같습니다. 거기서도 가끔 두시는 겁니까?

“일없습니다. 재능이죠, 뭐. 재능. 이 게임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가면 재능의 영역으로 뒤바뀐다는 거 아닙니까.”

-그 입은 여전하군요.

“하하하.”

-그래서….

“네.”

-이제 말해줄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글쎄요…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쩌다가 돌아가신 겁니까? 아니, 돌아가신 게 맞기는 한 겁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네요. 일단 육체적으로는 죽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인간 이기영은 틀림없이 죽었어요. 아, 제가 죽은 이유 듣지 못하셨어요?”

-듣기는 했지만….

“현성이 말대로 현성이가 찌른 게 맞습니다. 아! 충격받으실 필요는 없네요. 당시에 현성이는 정신계열 마법에 혼란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고, 사실 본의로 찌른 것도 아니니까요. 솔직히 제가 원하기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었나요? 제 희생이 있어야 대륙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저는 제가 현성이에게 찔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게 승리하는 조건 중 하나였고요. 어떻게 그걸 알았냐 묻는다면,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냐고 물어보신다면 이야기가 조금 더 길어지겠지만. 아무튼, 저는 제가 그런 일을 당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성자가 대륙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이야기라는 겁니다. 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대륙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거예요. 저는 계획된 가이드 라인을 따라간 것뿐이에요. 문제가 있다면….”

-…….

“제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거라는 걸 몰랐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라는 게 어떤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이런 상황 말입니다. 위쪽으로 올라갈 줄은 몰랐다 이 말이에요. 사실 제가 멍청해 보일 수 있는 판단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 말이에요.”

-…….

“믿음에 대한 근거는 제가 계획한 것이 틀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 하나였습니다. 사실 거의 확신하고 있었거든요.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제가 제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아직도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악마와 계약을 했었던 것 같았습니다. 현성이가 저를 찌를지 찌르지 않을지에 대한 내기요.”

-네?

“현성이가 저를 찌른다면 루시퍼가 외신을 상대하는 것에 힘을 보태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슨….

“이후에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죠. 죽어가면서 깨달았어요. 노을빛의 영웅은 루시퍼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일어나 이질적인 하늘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에는 감이 잡히지 않더라고요. 한 가지 확실한 건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애초부터 그녀의 개입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악마의 손아귀에서 대륙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 외부의 개입에서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 그게 제 목적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네?”

“제가 제한적으로 대륙에 소통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이유입니다. 특성이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현성이, 그리고 오늘 막 제 대리자가 된 혜진 씨가 유일한 소통 창구예요. 조각상에 모습을 드러내 신탁을 내리거나 강림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으로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부담이 큽니다.”

조용히 창을 바라보고 있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말문이 막힌 모습이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눈에 띈다.

사실 내가 한 말을 전부 이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나도 내가 열거한 저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이해는 하는 것 같네.’

-루시퍼라는 악마와 접촉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피하고 있는 겁니까?

“비슷합니다.”

-계약의 내용이 길드마스터가 부길드마스터를 찌르는 것일 수도 있고, 그 보상이 외신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부길드마스터의 부활이라면… 필연적으로 루시퍼에게 도움을 받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네. 맞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조금 다른 가능성이지만 그 이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시퍼의 도움을 받는다면 루시퍼가 대륙에 개입하게 된다는 겁니까?

“네. 그것도 맞습니다.”

-자력으로 돌아올 방법을 찾고 계시는 거였군요.

“네.”

-그… 그 방법은….

“아직 찾고 있는 중입니다. 분명한 건 제가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저를 믿어요. 제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발생한 것은 어디까지나 제 착오지만 그 착오까지 계산에 들어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제가 돌아오는 건 확정되어 있는 이야기고, 루시퍼의 도움을 받는 일 따위는 없을 거예요. 지금 이 상황도 기억을 잃기 전의 제가 의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정말입니까?

“네, 안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시간을 벌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뒀더라고요. 저는 이걸 돌아갈 방법을 찾고, 루시퍼에게 엿을 먹일 준비를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 물론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래쪽의 도움도 필요한 일이에요.”

-그래서 제게 창을 내리신 겁니까?

“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막아줘야 하는 게 있거든요. 사실 큰 전쟁이 끝나자마자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지만 누군가가 대륙을 완전히 부숴 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네?

“사실 혜진 씨도 아는 사람이에요.”

-…….

“이지혜.”

-그게 뭔….

“회귀라는 거, 들어봤습니까? 맨 처음으로 모든 걸 되돌리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위에서 봐도 제대로 보이지가 않고… 뭐 아무튼 간에 이겁니다. 지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일들, 우리가 그걸 함께 막아보자는 거죠.”

-그게… 그게 무슨 소리… 지혜 씨가… 말입니까? 아니… 갑자기 왜 지혜 씨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 눈에 보인다.

‘아….’

무척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 이지혜가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말도….

“막지 않으면 정말로 모든 게 무너질 겁니다.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에요.”

-지혜 씨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습니다. 혹시 잘못 알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 뭔가 개연성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이 누나 이미지 관리 잘하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

“아마 여기에도 악마가 관계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단 틀린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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