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6화 마지막 (19) >
-부길드마스터?
“…….”
-만약 부길드마스터의 말이 사실이라면 길드마스터에게 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부길드마스터. 부길드마스터?
“그 이야기는 어제 전부 끝난 이야기잖아요. 이른 아침부터….”
-아. 죄송합니다. 피곤하실 텐데….
“아니… 그렇게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별로 피곤하지는 않았다.
-어제 대화가 끝나고… 조금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약 부길드마스터의 말대로 지혜 씨가 악마에게 이용당하고 있고, 대륙의 위기가 다시 나타난 것이 맞다면 길드 차원에서 일을 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악마가 관련된 문제가 아닙니까.
“현성이는 몰랐으면 합니다.”
-…….
“…….”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알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정말로 알고 있기를 바라고 계신 거 맞아요? 괜히 애 하나 심란하게 만들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게 내버려 두세요. 이런 말 할 게 아니라 일단 최대한 빨리 업무 처리부터 합시다. 당장 재정 문제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틀어막을 수 있는 부분은 막아봐야죠. 길드 망하게 생겼다면서요.”
-길드 업무가 바쁜 것은 맞지만 이런 상황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드리는 말이에요. 체스 룰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잖아요. 이지혜가 백이고 저희가 흑이라니까요. 선공권을 가지고 있는 쪽은 그쪽입니다. 당장 처리할 수 있는 일부터 처리하는 게 맞아요.”
-그럼… 길드마스터에게는 뭐라고 보고를 하면 되는 겁니까? 어차피 알게 되실 겁니다. 정말로 부길드마스터가 말씀하신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러니까 현성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충 부활 떡밥이나 뿌리면 된다니깐요.
-길드마스터는 결코 이 문제를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분명히 좌시할 것이다.
기왕이면 소식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 버릴 테니까. 아마 일이 터질 때 즈음이라면 김현성은 내가 내린 가짜 퀘스트를 해결하느라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물론 대륙의 위기를 나 몰라라 하지 않겠지만 정말로 대륙 전체가 전란에 휩싸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일이 절정으로 치닫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이 선다.
김현성이 개입해 이지혜의 목을 날려버리는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정말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를 테니까.
가면의 영웅은 한 사람이 아니다.
녀석이 이지혜가 여단 쓰레기라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까.
‘차라리 적대하면 다행이야.’
제2차 회귀 대작전을 김현성이 알게 되면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예상하기 어렵다.
가능성은 희박하고 이루어질 가능성도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여단에 합류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까.
이지혜가 그걸 승낙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또 모르지.
‘여단 현성이는 오바자너.’
둠현성, 둠둠현성, 둠둠둠현성 별별 현성을 다 봐오기는 했지만 단현성은 진짜로 오바자너.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라도 회귀하고 싶어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정말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다.
“정보를 제한해야 해요.”
‘김현성이 가질 수 있는 정보를 제한해야지. 아직 본인이 위로 올라올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걸지도 몰라.’
이미 김현성은 신격화되어 있는 상황이다. 몇 가지 절차만 걸치면 위로 올라올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회귀에 대한 것도, 이지혜에 대한 것도, 신성이나 신격에 대한 것도, 김현성이 알면 일을 꼬이게 할지도 모른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거다.
‘나머지 일은 내가 다 처리할 거자너.’
현성이는 신성 좀 팍팍 벌어다 주고….
생각해 보니 정보를 제한한다는 표현은 조금 잔인한 표현인 것 같다.
김현성이 일에 집중할 수 있게 쉽게 성심성의껏, 전력을 다해 내조한다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리는 표현이겠지.
괜히 이것저것 알게 되면 다른 길로 새기도 하고 별것 아닌 유혹에도 쉽게 빠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대륙과 파란 길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본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맞아요. 웬만하면 혜진 씨 말도 재고해 보겠지만 이건 진짜 선택의 여지가 없다니까요? 현성이는 따로 할 일이 있고, 제가 직접 지시할 겁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아, 그러고 보니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혜진 씨. 접니다.
‘이 새끼 너무 일찍 왔는데.’
어제 새벽에 찾아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길드 직원들에게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을 테고…. 조혜진과 내가 짧게 말을 맞춰 녀석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니까.
숨길 수 없는 일이니 간단하게 보고한 것이다. 늦은 밤이라는 걸 고려해 당장 달려오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렇게 오래는 참을 수 없었나 보다.
-네. 곧 나가겠습니다. 길드마스터.
-네.
조혜진은 김현성을 볼 수 없었겠지만 김현성은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혼의 단짝 사건 이후로 나온 자그마한 단서였으니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긴장하지 말고 말 맞춘 대로만 하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조혜진의 모습.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 뒤를 돌아 거울을 확인하는 조혜진의 모습을 보니 아직까지 김현성이 좋기는 좋은가 보다.
내가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인지 잠깐 부끄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잠깐 머리를 슥슥 만진 조혜진은 평소처럼 문을 열었다.
-길드마스터.
-네. 혜진 씨. 이른 아침부터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길드마스터. 마침 저도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으니까요. 제가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아… 네. 일단 밖으로 나가시죠.
-네.
시선이 창에 고정되어 있다.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창을 뚫어지게 쳐다봐. 구멍 뚫리겠다.’
함께 걸으면서도 힐끗힐끗 창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니까….
-네. 어제저녁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창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고 제가 부길드마스터의 대리자로 선택됐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조각상 앞에서 어떤 말씀을 했는지 말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냥 평소와 같은 기도였습니다. 하루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리던 중이었습니다만….
-그렇군요. 혹시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아마 조금씩이나마 신탁이 내려올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어쩌면 단서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네.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 같지 않은 산책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집무실로 들어가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만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다 보니 집무실에서도 멀어지고 있었다.
아침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결국 김현성과 조혜진이 멈춰 선 곳은 파란 길드의 야외 훈련장.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살짝 몸을 앉힌 이후에 다시 대화를 재개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혜진 은근히 거짓말에 재능 있자너.’
준비한 대로 착착 말을 하는 모습은 나나 지혜 누나와 다르지 않다. 왜 우리가 조혜진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준비한 대사를 그대로 내뱉고 있는 모습, 호흡에는 한 치에 흐트러짐도 없었다.
-어쩌면 우리의 목소리에 응답해 주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직은 뭐라 말씀드릴 수 있는 단계가 아니기는 하지만 부길드마스터 역시 방법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느껴졌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역시 돌아오고 싶어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 것도 느낄 수 있는 겁니까?
-아… 네. 자세히 설명드리기에는 어려운 감각입니다. 신의 대리자라는 것은….
-잠깐 제가 창을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왠지 이럴 것 같았자너.’
본래대로라면 저런 말은 실례가 될 수 있는 발언이기는 하다. 대륙의 상식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파란 길드에서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은 부탁, 조혜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창을 넘기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긴장한 것 같은 김현성의 표정이 보인다. 잠깐 침을 삼켜 넘긴 이후에는 천천히 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될 리가 없지?’
파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파동이 창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조혜진의 머리카락과 김현성의 망토가 순식간에 휘날렸을 정도.
주인 이외의 사람이 창에 손을 대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리라.
일반인이었다면, 아니, 대륙에 내놓으라고 하는 모험가라고 하더라도 몸이 튕겨 나갈 정도의 반탄력을 견디고 있는 모습.
김현성 이 새끼가 아주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 눈에 보인다. 절대로 창에서 손을 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으직으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김현성이 밟고 있는 땅이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저렇게 몸이 꺼지고 있는 와중에도 창을 놓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솔직히 자신을 거부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길드마스터?
-잠깐…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살펴보는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결국에는 마력과 신성까지 밀어 넣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뭐야. 시바, 왜 아파. 왜 아파? 왜 아프냐구….’
전신에서 저릿한 고통이 느껴졌다는 것이었다.
‘잠깐 하지마. 시바. 막 억지로 제압하려고 하고 막 그러면 안 되지. 시바. 하지마. 하지마.’
“아아아악!”
입술을 꽉 깨물면서 어떻게든 제압하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니, 시바, 제압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찍어 누르려고 하는 것 같다.
‘아니, 시바 제압하지 마. 개새끼야, 야! 시바… 아….’
결국 이 어처구니없는 이벤트는 조혜진이 창에 다시 손을 뻗은 이후에야 마무리됐다.
‘시바… 시바….’
-…….
-좋은… 창이군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 녀석이 갑작스레 연무장 한쪽에 비치되어 있는 창을 집어 들었다.
천천히 창을 뻗는 모습은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마치 시위하는 것만 같지 않은가.
나도 창을 쓰는 게 가능하다고, 검보다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꽤 수준이 높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새끼 못하는 게 뭐야?’
실제로 간단히 몸을 푸는 동작임에도 익숙함이 느껴진다. 창술에 조예가 깊은 조혜진도 김현성을 인정하는 눈치, 나야 잘 모르지만 조혜진이 저런 표정을 보내는 게 맞다면 수준이 높은 정도가 아닌가 보다.
-예전에는 잠깐 사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이라 익숙하지는 않지만요.
-아… 네.
-잠깐… 잠깐 딱 한 번만 다시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주지 마요.”
-죄, 죄송합니다. 길드마스터.
-한 번만… 더 부탁드립니다.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창이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한 번 그러고 싶지만….
-아쉽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상황 진짜 머쓱해졌자너.
김현성 지도 자기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자각은 있나 보다. 아쉬워하는 얼굴 너머로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자리 잡는 것을 보면 말이다.
둘 모두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뻘쭘한 상황, 잠깐 동안 지속됐던 어색한 침묵을 깨준 것은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엘레나였다.
‘왔나 보네.’
무슨 소식을 가지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다. 당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시작됐어?’
이지혜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