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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87화 (778/1,590)

< 787화 마지막 (20) >

약간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긴장이라기보다는 궁금증이 일어난다. 지혜 누나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할지, 어떤 일부터 벌일지 제대로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후보로 꼽은 곳이 있기는 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게 없다. 일단….

‘교국이나 린델은 아닐 거야. 그렇지?’

인류의 전력이 집중된 곳에 곧바로 폭탄을 던질 정도로 무리수를 던지지는 않겠지, 뭐.

대륙은 넓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굳이 위험부담이 높은 장소부터 공략한다는 리스크를 떠안기는 싫어할 것이 분명하다.

선공권을 누나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아주 사소한 눈덩이를 천천히 굴릴 수도 있고, 시작부터 커다란 폭탄을 던질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도에도 그려지지 않은 장소에서부터 일을 키워나갈 수도 있다.

급하게 뛰어오고 있는 엘레나의 얼굴에는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뛰어오고 있는 표정이 눈에 띈다.

조혜진 역시 창을 꽉 쥐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중, 김현성도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 새끼 보내야지.’

웬만하면 이번 일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으니까. 이윽고 조혜진과 김현성 앞에 멈춰 선 엘레나는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뭐라 계속해서 말을 내뱉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올라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길드마스터… 하아… 하아….

요 정도 타이밍에….

[노을빛의 검사.]

라고 말을 거니 깜짝 놀라는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들려온 목소리 때문인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잠깐…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말씀드릴 것이….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노을빛의 검사?]

잠깐 동안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아니, 고민할 필요가 있어?’

-길드마스터?

시간 없자너. 내가 불렀는데 시간 없자너. 그렇지? 거기서 엘레나랑 이야기할 시간 있냐구? 조금 있으면 목소리가 끊길지도 모르는데… 내가 먼저자너. 그렇지?

[노을빛의 검사? 노을빛의 검사?]

-죄송합니다. 엘레나 님. 하실 말씀이 있으면 혜진 씨에게 먼저 부탁드립니다. 이후에 꼭 전해 들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목소리가… 기영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 네.

-잠시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엘레나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은 없다. 아마 지금 일어난 일 때문에 내가 김현성을 호출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신전을 향해 뛰어가는 녀석을 보니 괜스레 한숨이 튀어나왔지만 기분이야 좋다.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기고 신전을 박차고 들어갈 줄 알았던 녀석이 멈춰선 곳은 신전의 정문.

문 앞을 서성이고 있던 김현성이 갑작스레 허리춤에 달린 듀렌달을 땅바닥에 내려놓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왜 갑자기 자기 검을 내려놓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김현성의 허리춤에 자리해온 신화 등급의 검은 너무나도 쉽게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나 여유 없어… 이 새끼야… 검 내리려고 부른 것도 아니라구….’

나도 웬만하면 이 새끼 기분 좋으라고 하나 내리고는 싶었지만 지금 당장 검을 내릴 여유가 없다.

어차피 김현성을 대리자로 선택하지 않더라도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인해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만약 무리해 검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듀렌달은커녕 율리에나, 아니, 그것보다 더 구린 싸구려 철검이 한계일 것이다.

-기영 씨? 기영 씨?

[노을빛의 검사. 목소리가…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네. 들립니다. 듣고 있습니다.

[노을빛의 검사의 도움이….]

-네? 기영 씨?

[필요… 합니다. 그대의… 그대의 도움이….]

-기영 씨? 기영 씨!!

[노을빛의….]

어디로 보내야 할지 아직 결정된 것이 없으니 일단은 여기서 연결이 끊긴 척. 빛나고 있던 조각상에서는 빛이 조금씩 사그라든다.

여기까지만 해도 석상의 앞을 떠나지 못할 테니 지혜 누나가 터뜨린 일이 녀석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갑작스레 초조해진 녀석의 얼굴이 눈에 띄지만 당장 김현성에게 집중할 여유는 없다. 계속해서 소리치고 있는 녀석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리자 다시 한번 조혜진과 엘레나가 시야에 비친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여기에 집중해야지.

-아마 길드 마스터께서도 이 소식을 듣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엘룬 님의 옆에 계시는 이기영 님께서 이 사실을 모르실 리가 없을 테니….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 무슨 일이야? 시바.’

-에베리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네?

‘엘프 왕국부터야?’

-세계수가….

-네.

-세계수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방금 전해 들었습니다. 에베리아 왕국을 유지하고 있는 세계수는 사실상 소실 상태이며… 복구가 불가능 한 수준으로….

엘룬 눈에서 피눈물 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확한 경위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지만… 파란 길드밖에는 이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할지… 흐윽… 오라버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아니, 왜 맨날 무슨 일 터지면 세계수부터 터지고 그래?’

대륙의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 단골손님이 다시 한번 고통을 받고 있단다.

이걸 지혜 누나가 벌인 일인지 잠깐 동안 고민하기는 했지만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누나도 클리셰 좋아하니까.

대륙 파멸의 시작을 알릴 신호탄으로 세계수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해.’

1회 차 에서도 세계수를 품고 있는 에베리아 왕국은 가장 중요한 요새 중 하나였으니까.

공화국과의 전쟁에서도 세계수의 방어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지혜 누나가 이 일을 멀리 보고 있다면 세계수를 처리하는 것은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 누나가 거기까지 손을 뻗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겠지.

‘아니, 시바, 어떻게 한 거야?’

단순한 성벽이 아니라 천연의 요새나 다름없는 장소가 바로 에베리아 왕국이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던가.

외부에서 마법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리적으로 무작정 들어갈 수도 없다.

대놓고 병력을 끌고 가면 왕국의 병력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혜 누나에게 그럴 병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수 살라트처럼 세계수의 뿌리에 서식하고 있지 않은 한, 엘룬의 나무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전쟁이 끝난 이후, 모두가 평화에 절어 지냈다고는 하지만 나로서도 그곳에 영향력을 끼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이 누나 진짜 어떻게 한 거야?’

뭔가 방법이 있었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 문제가 아니다. 이 건으로 인해 찾아올 수 있는 상황들이 더 문제겠지.

-일단… 저는 왕국으로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조혜진 님.

-함께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한 이후에…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하얀 씨를 호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지만….

-엘레나 님의 일입니다.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혜지니 멋있죠.

엘레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대화를 주고받는 중. 조금 의외의 상황이 펼쳐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방금 전의 엘레나에 이어 김미영 팀장까지 발걸음을 옮겨온 것. 아까도 그랬지만 얘 표정도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실장님.

-네. 김미영 팀장님.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조용히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엘레나의 얼굴은 초조해 보인다. 김미영 팀장이 자신의 눈치를 살핀 것을 보고 필연적으로 에베리아 왕국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현재 에베리아 왕국에서 방문객들을 억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

-…….

-각 국가와 길드에서는 에베리아의 억류되어 있는 이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는 실정입니다. 교국 내 길드에서는 이 사태의 해결을 위해 삼대 길드가 나서주기를 촉구하고 있으며 현재….

‘시바… 이 누나 시바… 누나….’

-모든 통신망은 완전히 차단된 상태입니다.

‘아….’

-오스칼 님께서는 엘레나 님을 통해 엘리오스 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고 계시지만….

-제가 이야기해 보겠어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을 게 분명해요. 에베리아 왕국에서… 억류라니요….

-부탁드립니다. 엘레나 님.

‘이 누나… 진짜….’

-어떻게 된 겁니까 이게….

갑작스러운 상황에 소곤거리기 시작한 조혜진. 저 중얼거림은 틀림없이 나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설마….

“아니요. 지혜 씨가 에베리아 왕국에 들어가 통신을 차단하고 방어벽을 세운 게 아니겠네요.”

-…….

“지혜 씨가 아니라 에베리아 왕국의 엘프들과 엘리오스가 방문객들을 억류하고 있는 걸 겁니다. 왕국을 인간들에게 개방한 이후에 생긴 사건이니 외부로 들어온 이들 중에 용의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죠. 통신망을 차단한 것 역시 세계수가 소실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싫어서고요. 왕국이 인간들을 억류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죠?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래 버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조혜진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그녀 역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세계수가 소실된 사태 이후에 펼쳐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가정하고 있지 않을까.

단순히 엘프들의 수호신을 잃었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물론 그 사실이 가장 중요하기는 하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모든 사건의 시작일 테니까.

하지만 그 외에도 연관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무한한 자원을 전달해 주는 비보가 아니었던가.

이전과는 다르게 엘프들이 인간들의 삶에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걸 떠올려 보면 제법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 이미 그들은 인간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린델은 물론이거니와 대륙 어디에서도 그들의 물건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그들의 자원이 유통된다.

그들의 문화는 대륙 곳곳에 뿌리내렸고 크고 작은 곳에 쓰이고 있다. 린델에도 엘프타운이라고 불리는 장소까지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많은 길드가 엘프들과 교역을 맺고 있다. 갑작스레 거래가 끊긴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이미 이것 하나에 밥줄을 달고 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클랜과 길드 역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길드와 클랜은 국가에 일을 처리해 달라 목소리를 모을 것이고 국가는 그들을 무시하기 힘들겠지.

아니, 애초 교국이나 공화국, 왕국연합은 물론 여러 중소도시가 가장 먼저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일에 불만을 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째서 교역과 통신망을 차단한 거냐고 묻겠지 뭐.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세계수가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엘프와 인간은 친구다.

상호협력하는 관계이며 함께 대륙을 지킨 영원한 우방이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인간과 엘프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면 영원한 우방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의외로 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지혜 누나의 목적은 세계수가 아닐 것이다.

물론 세계수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겠지만… 진짜 목적은 세계수를 이용해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일 것이다.

그 방아쇠가 무엇인지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엘프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

오랜 역사가 그들에게 가르쳐 준 교훈.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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