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9화 마지막 (22) >
-무슨 소리를….
깜짝 놀란 것 같은 조혜진의 얼굴이 보였다. 눈에 띄게 당황한 것만 같은 표정이다.
물론 그런 그녀보다 더 당황한 것은 엘리오스 쪽, 솔직히 저 자리를 피해 도망쳤어도 이상하지 않은 순간이었다고 본다.
“스카웃 제의를 해보는 게 좋겠군.”
엘레나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감탄의 박수를 보내던 벨리알은 누군가와 연락을 취하기 시작.
그만두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아침 드라마에서 눈을 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가벼운 침묵이 내려앉은 자리를 수습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게 가슴 아프다.
드라마 애청자로 유명한 황정연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고, 엘레나도 딱히 이 상황을 수습할 생각이 없다.
자신이 아직까지 뭘 잘못했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는 것을 보니 얘도 정신이 없기는 없는 모양이다.
-지난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제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웅크려 새장을 만든다고 한들,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오라버님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문제를 숨기는 것은 결코 이로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일로 얻은 교훈을 벌써 잊으시다니요! 오라버님의 그 꽉 막혀 있는 성정을 본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리 중요한 순간에도 자신의 고집을 주장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구석으로 몰아넣고 패네. 시바. 와….
-…….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말싸움 같았지만 내 눈에는 아예 저항할 의지를 잃어버린 상대를 코너로 몰아넣고 두들겨 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릴 때부터 늘 그런 식이었지요. 혼자서만 떠안고 삭힌다고 한들,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엘레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번과 같은 선택을 하실 겁니까? 병사들에게 말씀하셔야지요! 어서 명을 내리세요! 우리들을 포박하고 억류하라고 말씀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라버님께서 연모하는 조혜진 님도 에베리아 안에 꽁꽁 묶어두실 작정이십니까!
‘두 번 말하지 마. 시바…. 다시 한번 상기시키지 말라고.’
-우리도 이전과도 달라졌고 인간들도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오라버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함께 힘을 합쳐 대륙을 지켜낸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인간을 믿지 못하다니요! 조혜진 님 역시 인간입니다. 인간이란 말입니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제발 그만해….’
-하아… 하아… 하아….
-…….
-길을 비켜 주세요. 이 문제는 에베리아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수의 소실은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엘레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파란 길드원들도 서로 눈을 한 번씩 마주친 이후에 엘레나를 뒤따라 나선다.
당연하지만 이미 일어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엘리오스가 폭주한 엘레나를 막을 수 있을 리 만무.
그녀가 엘리오스의 멘탈을 잡고 무자비하게 구타한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말이 틀린 게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이미 다른 수단이 없지 않은가.
‘파란 길드원들을 억지로 제압한다는 선택지?’
하얀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에베리아가 중력에 짓눌려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뭐. 엘레나가 자신을 지나칠 때 조용히 한마디 건네는 것이 녀석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 역시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 지난 전쟁으로 인해 더욱더 잘 이해하게 됐다. 엘레나.
-…….
-그들이 뭘 할 수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어디까지 강하게 만들 수 있는지… 말이다.
-제 동료들이 있는 한 그들의 칼날이 엘프들을 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단호한 발걸음으로 가볍게 녀석을 지나치는 모습이 꽤나 멋있게 보인다.
조혜진 역시 눈치를 보며 엘리오스를 지나치려고 하는 중. 아까의 사태에 대해 입을 닥치고 있기 뭐 했는지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게 시야에 비쳤다. 누가 봐도 어색한 얼굴이다.
-무… 무례를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엘리오스 님. 하지만 이 사안이 정말로… 막중한 사안이라는 것만은 알아주셨으면….
-아닙니다. 저야말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많이 당황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괜찮습니다. 엘레나 님이 무언가 착각하신 게 분명할 테니까요. 엘리오스 님이… 하… 하하…. 네. 말도 안 되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건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엘리오스 님께서도….
-딱히.
-네?
-제가 조혜진 님에게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게. 딱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이 시바 새끼….’
-네….
‘이 개새끼.’
엘룬 쓰레기의 아들답게 혓바닥을 놀리는 게 심상치 않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심지어 미련 없다는 듯이 뒤를 돌아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가관.
조혜진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느껴진다. 잠깐 동안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제 자리에 서 있는 모습, 마음이 흔들렸다기보다는 깜짝 놀란 것처럼 보였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시바. 어이가 없어서 헛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뭡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둘이 뭐 언제 만난 적은 있었어요?”
-아니요. 딱히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만나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같이하는 정도로만… 물, 물론 다른 사람들도 함께였습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음습하고 음흉하네요.”
-…….
“뭐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의미 없기는 하지만 그다지 건강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두라고요. 친구로서 하는 말입니다. 제가 쟤랑 몇 번 술 마셔봐서 알아요. 음흉한 구석이 있습니다.”
-부길드마스터가 관여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냥 친구의 조언이라고 생각하시고 흘려 들으세요. 저도 이런 시기에 이 건에 대해서는 오래 이야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단 빨리 들어갑시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해야죠.”
-…….
“빨리요.”
-네.
다른 길드원들보다 한발 늦게 에베리아에 발을 들이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혹시나 일에 집중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었는데 그건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 천천히 에베리아를 둘러보고 있는 조혜진이 눈에 보인다.
가장 먼저 입장한 엘레나는 이미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다른 길드원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야 이미 망원경으로 에베리아의 모습을 확인했지만 이전과 너무나도 달라진 풍경에 약간은 충격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커다란 세계수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엘프들의 모습은 없다. 불에 탄 것인지, 아니면 썩어 문드러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괴한 모양으로 뒤틀려 있는 것으로 모자라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다른 엘프들의 표정은 모두 불안감과 걱정으로 물들고 있다.
‘하….’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억류되어 있는 인간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
엘프들에게 일어난 불운과 그들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엘프 측에서도 최대한 인도적으로 그들을 억류하고 있는 모양, 강제성을 띄기보다는 협조를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을 해주셔야 할 겁니다. 저희 길드에서는 결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기나 해? 이건 대륙법 위반이야. 이 개새끼들아!
-아, 시발… 중요한 미팅이 있었는데. 제기랄….
-지금 하고 일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담하건대 당신네들 종족 전체가 책임져야 할 겁니다.
분탕질을 치고 있는 놈 몇몇 위험 종자들은 확실하게 강압적으로 붙들고 있다.
-파란 길드다!
-파란 길드가 왔다! 정하얀 님! 정하얀 님! 저희 좀 도와주십시오!
심지어 갑작스레 등장한 파란 길드를 향해 소리까지 치고 있는 모습, 우리가 이 사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우리 관심사는 아니다.
-조혜진 님!
쟤네들이 저리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가기야 한다. 타의로 이곳에 억류되어 있다는 게 반갑게 비칠 리는 없었을 테니까. 아, 몇몇 종족 우월주의 발언을 내뱉고 있는 놈들만 빼고 말이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시바 아직도 저런 새끼들이 있어?’
조혜진 역시 불편한 눈으로 놈들을 바라보고 있기야 하다.
-너희들이 지금 누구 때문에 여기서 잘 먹고 잘살고 있는지 알기나 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냐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 더러운 엘프 새끼들….
‘저 새끼는 그냥 뒤져야겠는데.’
-조혜진 님! 조혜진 님!!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조혜진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은 가관, 얘가 인상을 이렇게까지 찌푸리는 모습을 참 오랜만에 본다. 날 처음 만났을 때 같은 얼굴이었다.
“한마디 해주세요. 혜진 씨.”
-파란 길드는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해 드릴 수 없습니다.
-…….
-대륙의 커다란 손실을 조사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불편을 겪고 계시는 것은 이해하지만 에베리아 왕국에서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세계수의 소실은 에베리아 왕국뿐만이 아니라 전 대륙의 손실이며… 믿고 싶지는 않지만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 중 몇몇이 저지른 일일지도 모르는 가능성도 결코 위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곳에 계신 분 중 용의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물론 가능성은 낮지만… 어디까지나… 절차적인 부분으로써.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미쳤어?!
‘뭐야. 이 새끼… 너 미쳤어?’
-오호라… 이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겠구만… 이 시발 것. 파란 길드 이 잡것들이 더러운 엘프들과 붙어먹었다 이거지… 아직도 파란이 옛날 파란인 줄 아는 모양입니다. 여러분.
‘…….’
-그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공화국의 거대 길드와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감이 올 것 같냐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그저 그런 사람들로 보이는 건 아니지? 거래처 전부 다 끊기고 싶어? 대륙의 영웅이면 영웅답게 행동하란 말이야! 이 정신 나간 년아!
조혜진이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게 보인다.
나도 눈깔이 돌아갈 것 같다.
‘하… 시바…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제대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길드가 개판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파란이 이 정도까지 바닥으로 떨어졌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어딜 가나 미친놈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적어도 예전에는 이런 미친놈들이 미친 소리를 대놓고 하지 못 하는 환경이었다고 기억한다.
파란 길드가 가지고 있는 문제 때문인 건가? 김현성이랑 정하얀이 있는데도 이런 미친놈이 나온다고?
김현성은 명함만 길드마스터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서 그래? 은퇴설도 살살 돌고 이러니까?
아니면 정하얀이 마탑으로 이적한다는 소식 때문에? 재정 파탄 나고 시바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벌이고만 있으니까? 아니면 내가 뒈져서 그런 건 아니지?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조혜진이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얘가 뒷감당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는 시바 뒷감당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걸 모를까.
-…….
“…….”
“저 새끼 죽여. 혜진아.”
-네?
“저 새끼 죽이라고.”
-지금 무슨 말씀을….
“아니다. 죽이지 말고 겁만 줘요. 참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너는 참을 필요가 없어. 왜 참으려고 그래? 진짜 시바 가관이다. 내가 어디 가서 길드 부심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저런 놈들한테까지 무시당할 정도로 땅바닥으로 추락했다고 생각하니까 어이가 없네. 시바. 공화국? 공화국?”
뭐 어디서 일회용 엑스트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놈한테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부터가 당황스럽다.
‘김미영 팀장은 이런 새끼들 안 조지고 뭐 하고 있었어?’
사실 김미영 팀장을 탓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런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이가 갈린다.
-하지만….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이윽고 입술을 꽉 깨문 조혜진이 천천히 녀석의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돼지 멱따는 비명을 내지른 단역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중, 뭔가 다른 피드백이 올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녀석의 표정이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더러운 미소를 담고 있었던 얼굴은 어느덧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뒤바뀌기 시작,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리고 있다.
몸 전체가 떨리는 것으로 모자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결국에는 바닥을 적셔주기까지 하고 있다.
캑캑거리며 호흡이 아까보다 더 뒤틀리고 있다. 조혜진이 녀석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해봐.
-켁… 콜록… 켁….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
‘너무 약한데.’
하지만 조혜진이 가지고 있었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기야 하다. 어차피 저 새끼는 내가 처리하면 되는 거니까 뭐.
-조용히 질서를 지키며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통제에만 따라주신다면 여러분들의 안전에 해가 생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너무 약해.’
이지혜가 그리고 있던 그림이 그려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붉은 용병은 문을 닫고 있고, 검은 백조도 침묵하고 있다.
파란 길드는 땅바닥까지 떨어졌으니 결국에는 린델의 3대 길드가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는 거다.
카스가노 유노가 이끌고 있는 길드도 해산.
교국이 하향 패치 됐으니 숨어 있던 벌레들이 기어 나오는 중일 것이다.
물론 대놓고 튀어나오지는 못하고 있겠지. 전술 김현성을 처맞고 싶은 놈들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각자의 이익을 위해 은밀히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일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윽고 들려온 소식에는 지금까지의 가설을 재고해 볼 수밖에 없었다.
-터, 터질지도 몰라요.
-…….
-콰앙! 하고 터질지도 몰라요. 남아 있는… 저거… 터지면… 일, 일대가 전부 날아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