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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93화 (784/1,590)

< 793화 마지막 (26) >

‘제정신이 아니네. 시바 새끼들이… 이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주제도 모르는 새끼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제대로 들려오지 않는다.

잠깐이었지만 킹갓지혜님께서 옳은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떠올리게 될 정도.

많은 미친놈들이 미친 짓을 해오는 걸 봐왔지만 이 정도로 짜증이 밀려온 적은 오랜만이다.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니 커피를 들고 서 있는 세라핌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아버지.”

“누가 네 아버지야?”

“말씀하신 대로….”

얼마나 짜증이 밀려왔으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커피를 땅바닥에 부어버릴 정도로 손에 힘이 빠진다.

“다시 가져오겠….”

“꺼져. 세라핌.”

-뜻을 모아야 합니다. 대륙을 지켜야지요. 고 이기명 명예추기경님의 뜻이 아닙니까.

그 와중에 제일 짜증 났던 것은 이름 모를 녀석이 내 이름을 팔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새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 미친 생각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건지, 이 행동의 근거가 어디서부터 온 건지는 이해가 된다.

운이 좋으면 순진한 새끼들 몇몇 꼬여내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정도로까지 일이 잘 풀릴 거라고는 장담 못 하겠지.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가장 불가능한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떠올려 보면 의외로 답이 쉽게 나온다.

이 새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본인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잠깐 동안 동족 혐오가 느껴져 현타가 찾아오기는 했지만 본래 위에 있는 놈들이라는 건 그런 법이다.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강함을 가지고 있는 모험가들을 이놈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를테면 김현성, 차희라, 정하얀, 라파엘, 그 외 기타 등등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을까.

개인의 힘으로 국가나 도시를 상대할 수 있는 괴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마왕을 해치운 뒤에 버림받는 용사 클리셰가 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위기에는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군이지만 평화로운 시기에는 터지기 쉬운 폭탄처럼 비칠 것이다.

본인들이 아득바득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빼앗지는 않을지, 단순한 분풀이나 혹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영향력을 끼치지는 않을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사회를 망가뜨리지는 않을지 하는 걱정을 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인간을 초월한 이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시스템 자체가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과도기니까.’

이들이 위로 올라오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준비가 필요한 시기였다. 말하자면 인간들과 부대낄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전보다 더욱더 강한 기관이 필요합니다. 이전까지의 대륙 관리 위원회에서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될 테지만 의미가 있는 변화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길고 힘든 싸움에서 이겼는지 생각해 보세요. 대륙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 아닙니까?

-…….

-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대로 고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성자 그 자체나 다름없는 그분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저 새끼가 아무리 아부를 한다고 한들, 내 입가는 1㎜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우리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준 영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 말입니다. 이종족, 공화국, 교국, 중립국, 왕국연합과, 연방, 그리고 대륙의 영웅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새로운 구심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필연적인 선택이며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하지만….

-네.

-대륙이 커다란 위기를 맞은 현시기에… 아주 좋은 제안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대륙의 영웅들께서 우리의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여기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한들, 그분들께서는….

-아마 손을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대륙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종족과 시민들을 대표할 뿐이지 않습니까. 이는 대륙 시민들의 뜻이며 우리 영웅분들께서는 시민들의 손을 뿌리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새끼는 어디서 튀어나온 새끼야?’

초월적인 이들도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주도적으로 회의를 이끄는 녀석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온다. 햇빛이라고는 한 번도 쐬지 않았을 것 같은 놈. 비실비실하게 생겨 가지고 입만 터는 꼴은 눈꼴시려 참을 수가 없다.

파란의 이설호가 나를 처음 봤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왜 그 꼰대 할배가 나를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봤는지 이해가 된다.

‘어디 출신이야?’

마음의 눈으로 보니 한국식 이름이 눈에 띈다.

‘근데 왜 저기에 앉아 있어? 린델 출신 아니야?’

내가 본 적 없는 녀석이니 정계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거고… 솔직히 전쟁 전에는 저런 놈이 있었는지도 몰랐으니 최근에 합류한 녀석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 막 이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한 햇병아리 같은 새끼.

‘신진 길드야? 아니면 국가 정상이랑 연줄이 있어? 도대체 쟤가 여기 왜 앉아 있는 거야?’

“저거 누구예요?”

-왕국연합 출신입니다. 유니온 길드의 길드마스터 송수경입니다.

“한국인이네요. 저거 린델 쪽 인사 아니에요?”

-튜토리얼 던전은 린델을 거친 것이 맞습니다만 왕국연합으로 이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그러니까 부길드마스터가 돌아가신 이후에 조금씩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얼마 전에는 메르한 왕국에서 작위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유니온 길드는 내실이 있는 탄탄한 길드이긴 하지만 사실….

“여기에 초대될 정도는 아니라고요? 메르한 왕국 발로 들어와 있다는 거 맞죠?”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욕심이 그득하네. 아주.’

성향은 숨어 있는 분석가. 마치 녀석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은 성향이었다.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게 놈의 진짜 모습이라면 놈이 왕국연합으로 이적한 이유도 뻔했다.

‘린델은 안 될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

린델에서는 자기 꿈을 펼치기가 힘들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미 교국에는 거대하게 자리 잡은 세 개의 길드가 있었고 신입 길드나 새로운 이가 위로 올라가기에는 힘든 구조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새로운 곳에서 제대로 된 꿈을 펼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테고 결과적으로 놈의 생각을 들어맞았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 보니까. 시바.

메르한 왕국에서 작위를 받았고 길드도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다.

어디 그것뿐이랴, 대륙 정상들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녀석이 얼마나 뿌듯해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녀석이 감각이 있다는 것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난 맨몸으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이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 내가 있을 때도 알게 모르게 활동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눈에 띄면 위험하다고 느꼈던 건가.’

송곳을 꼭꼭 숨기며 감추고 있었고 본인이 나설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기영의 죽음을 기회처럼 느꼈을 테니 그동안 다져왔던 기반을 이용해 표면적으로 자신을 드러냈고 결과적으로는….

-부길드마스터의 모습이 보인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평가는 두말할 것도 없고요… 부길드마스터의 빈자리를 메워주고 있는 인사라고들 하더군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그래, 시바, 이렇게 됐겠지.’

이미 이야기가 된 것이 틀림없다. 교국의 인사를 제외한, 아니, 심지어 몇몇 교국 인사들마저 놈에게 한 표를 던지는 듯한 분위기.

근처에 앉아 있는 오스칼과 중립국의 프리스티나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정치 싸움에서 커다란 성과를 얻지 못한 것 같았다.

공화국은 물론이거니와 이종족들도 마찬가지. 저 사기꾼 새끼의 간사한 혓바닥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말도 안 되는 안건입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대륙인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스칼 님. 이전의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는 이미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에베리아가 멸망했을 때,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대륙인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자고 하는 것이 어째서 잘못된 일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기관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방식이 잘못됐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것은 대륙을 구한 영웅들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커다란 힘에는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명언이 아닙니까. 결정적으로 말씀드리건대 저는 결코 영웅들의 자유를 침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감히 그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

-누가 감히 그분들을 강제하고 통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오스칼 님. 이기영 님조차도 그들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기관을 만들고 대륙인들의 염원을 담은 뜻을 그분들께 전달할 뿐입니다.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안을 드리고 그분들이 움직이기 편하게, 대륙을 위해 움직이는 것에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를 해드리는 것뿐이란 말입니다. 아까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대륙인들을 대변할 뿐입니다.

-여론으로 그들을 통제하자는 말처럼 들립니다만… 이 안건이 정말로 옳은 안건인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오스칼 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이런 일이 터졌을 때, 에베리아 사태가 터졌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겠습니까.

-…….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정신을 계승한 새로운 기관이 필요합니다. 이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천천히 강단으로 나오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허… 시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혹시나 지금 본인들이 실수하는 것은 아닌지, 둠현성의 콰직 맛을 본 것 같은 몇몇 놈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이윽고 커다란 여신의 거울에 놈이 준비한 자료화면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솔직히 이전의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와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안에 포함된 인사들, 교국과 중립국 인사들로 꾸려진 이전과는 달리, 공화국과 왕국연합의 인사들로 채워져 있는 인사표가 눈에 보인다.

물론 균형을 맞추기 위해 교국의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구색 맞추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모든 권한은 저 거지 같은 새끼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다.

오스칼과 린델의 길드마스터들도 표정을 구기는 중, 완전히 교국을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들어가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내가, 시바, 대륙에 투자한 게 저 새끼들 잘 먹고 잘살라고 투자한 건 아니자너. 우리 새끼들 잘 먹고 잘살라고 투자한 거자너.’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대륙은 다시 한번 하나가 될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난 대륙은 영원토록 안전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함성이 터져 나온다.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관리하고자 하는 영웅들의 명단도 눈에 들어온다.

노 빛의 검사 김현성.

대마법사 정하얀.

용병여왕 차희라.

회색빛의 용사 라파엘.

그리고….

신창 조혜진.

공화국의 오호대장군을 비롯한 교국 8좌. 대륙의 내노라하는 영웅들까지. 전부 다 나열되어 있다.

‘오호대장 뭐시기를 공공재로 사용한다고 현성이까지 공공재로 사용하겠다고? 트레이드가 돼? 옥수수랑 다이아몬드랑 바꾸자는 심보 아니야? 이 새끼들아.’

-나아갑시다. 새로운 미래로. 명예추기경님이 지키고자 하는 대륙을 다시 한번 우리 손으로 지켜냅시다. 그분 없이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걸 대륙의 신이 되신 그분에게 보여 줍시다!

짝짝짝짝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나 없이 해보겠다고, 시바.’

회의가 끝날 때까지 박수 소리는 사그라 들지 않는다.

조혜진은 계속해서 얼굴을 구기고 있다.

이미 몇몇 이들이 모여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송수경이라는 놈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본인의 인맥을 과시하는 중, 이윽고 조혜진을 발견한 녀석이 눈에 띄게 밝은 얼굴을 하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륙의 위기를 맞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기분 좋은 얼굴, 솔직히 이 적폐 새끼가 진심으로 대륙을 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회의가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조혜진 님.

-…….

-저를 원망하셔도 좋지만 대륙을 위한 결단이었다는 사실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륙의 평화는 대륙인들의 염원이 아닙니까. 파란 길드 마스터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시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제는 그만 잊고… 일어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현재 어디에 계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용건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직접 전해드리겠습니다.

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딱히 다른 용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안건에 대한 설명도 설명이거니와… 그저 그분을 직접 뵙고 말씀을 전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것을 잃으시지 않았습니까.

-…….

-영혼의 단짝과도 같은, 마치 형제와도 같은 친우를 잃으셨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어쩌면….

-…….

-어쩌면… 제가 혹시 명예추기경님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

-…….

“그래 새끼야. 그래에… 대륙 한번 멸망해 보자.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 이 새끼야.”

-…….

“나 없이 시바 얼마나 잘하나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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