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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96화 (787/1,590)

< 796화 마지막 (29) >

X나 애절했어. 시바.

내가 생각해도 진짜 애절했다. 뭔가 다급하게 느껴지기도 하면서도 그리움에 사무치는 듯한 목소리.

절대로 내가 보내는 믿음을 배신할 수 없게 만드는 목소리라고 할 수 있으리라.

조금 불안한 감이 없진 않았지만….

‘이제는 믿을 때도 됐어. 시바.’

우린 시바 신뢰로 똘똘 뭉쳤으니까. 이제 곧 신물도 내릴 거자너. 솔직히 지금 당장 내리는 게 맞나 싶기도 한데… 일단 준비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고… 뭐라도 준다는 거 자체가 중요했으니까.

솔직히 그동안 내가 차가웠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던 것 같기도 했다. 괜스레 허벅지를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을 때였다.

“이기영 후배? 이기영 후배?”

“아… 네. 베니고어 님. 죄송합니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일한 거야?”

“비슷합니다.”

“너무 일 열심히 한다. 우리 이기영 후배. 이러다가 몸이라도 상하면 어떻게 해? 그래도 조금 쉬면서 해야지. 몸이 재산인데. 안 그래?”

“네. 베니고어 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아까 엘룬 섭외에 대해서 말씀하시던 도중이었죠?”

“응! 아주 아주 순조로워 이기영 후배. 사실 엘룬이 조금 강경하게 나오기는 했는데… 막 윗선에 알린다고 으름장 내놓고 그랬다니까. 근데 알지? 이번에 세계수 소멸되고 엘프들 완전히 길바닥에 나앉았잖아. 조각상도 전부 사라지구 신전도 완전히 없어져서… 엘룬이 뭘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야.”

“아… 네.”

“엘프들 어떻게 할 거냐고 살짝 겁주니까 바로 조용해져서 무릎 꿇고 싹싹 비는 거 있지?”

‘굳이 무릎 꿇리고 빌게 할 필요가 있었어?’

신뢰로 똘똘 뭉쳐 있는 김현성과 나 같은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베니고어가 가능할 거라고 호언장담했을 때부터 뭔가 싸 하기는 했지만 얘도 진짜….

‘악마 그 자체자너.’

어쩌면 신계에서 베니고어를 스카우트해 간 이유가 적대세력이 더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것은 아닐까.

“이제 와서 빌어봤자 늦었다고 하니까. 막 치맛자락도 붙잡구… 내가 다 난처해져서 혼났다니까.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그렇게 뻣뻣하게… 쯧. 아무튼 안심해도 돼. 이기영 후배. 엘룬은 내가 확실하게 교육시켜 놨으니까. 아마 여기에 와서도 별문제 일으키지 않을 거야. 아, 그리고 로렌은 같이 하기로 했어. 여기로 데려와도 괜찮지?”

“네. 다음 회의 때부터 함께 하면 좋을 것 같네요. 연방도 어느 정도 복구가 되고 있는 것 같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나눌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기왕이면 엘룬도 같이 데리고 오세….”

“문제는 상부야.”

“네?”

“알잖아. 아직 확실한 건 아니기는 한데 상부에서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더라구… 아니, 의심이라기보다는 빨리 노을빛의 신을 올려보내라고 닦달하고 있다니까. 일단 계속 노을빛의 신이 거절 의사를 밝히고 있다고 둘러대고 있기는 한데… 내가 무능하다고 생각하는지 자기들이 직접 접선할 거라고 막 그러는 거 있지?”

“그건 조심해야겠네요. 계약을 진행 중이라고 둘러대는 게 좋겠습니다.”

‘현성이가 여기 올라오면 말짱 도루묵인데.’

“누구 보고 무능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지금은 내가 이렇게 당하고 있지만 기회만 되면 전부 다 혼꾸녕을 내줄 거야.”

“…….”

“…….”

‘얘 살짝 취한 상태인 것 같은데….’

엘룬을 무릎 꿇린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개가 조금 뻣뻣하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 본인이 거물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얘 어떻게 해….’

아무래도 벨리알과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일반적인 가정의 부모님들이 나쁜 친구를 사귀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기영 후배는 조금 어때? 잘 막아낼 수 있겠어?”

“그거야 현세의 인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기는 해요. 근데 피해가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이 건에 대해 이야기 좀 나누고 싶었는데… 피해복구에 들어가는 예산을 조금 늘려야 할 것 같아서요. 재무팀장님이 알아서 잘 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죠 디아루기아 님?”

“…….”

“그렇다네요.”

“끄응…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산도 빠듯한 편인데… 나도 따로 신탁을 내리는 게 좋을까. 상황을 지켜보는 게 더 낫겠지? 의외로 인간들이 더 잘 이겨낼 수도 있고, 이지혜라는 인간의 속내가 밝혀진 것도 아니니까.”

“타이밍 보고 신탁 한 번 내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 신경 거슬리게 하는 놈이 한 명 있는데….”

손날로 목 쪽을 긋자 단호하게 고개를 돌리는 베니고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 돼. 이기영 후배도 알고 있잖아. 신이 직접 인간의 죽음을 사주 내리는 것은 금기라구. 만약 정말로 사주 내린 신탁으로 현세의 인간이 목숨을 빼앗기면 시스템한테 패널티를 받게 될걸. 시스템이 우리의 독립을 거부할 수도 있어.”

생각해 보니 대륙의 시스템에 대해 파악하기 시작했을 때 일찍이 결론을 내린 기억이 있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이기영 후배가 대륙의 암 덩어리 시절, 아니, 그런 오해를 사고 있었을 때… 벌써 신탁이 내려가지 않았을까. 아! 물론 내가 신탁을 내린다는 소리는 아니구… 엘룬이나… 로렌이나… 다 이기영 후배랑 사이가 좋지는 않았잖아.”

어째서 윗놈들이 나에 대한 신탁을 직접적으로 내리지 않았는지에 대한 결론이었지.

“뭐 그럼… 악마는 가까운 곳에 있다. 내지는 선한 얼굴을 하고 사람을 속이는 악마의 존재에 대해서 한 번 언급해 주세요. 지금 당장은 아니고 제가 타이밍 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어. 그, 그래도 너무 그런 식으로 가면 안 좋아. 이기영 후배. 인간을 질투하거나 시기해서, 혹은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재수 없다고 쓱싹 해버린 신들의 끝은 대개 좋지 않거든. 이기영 후배도 성숙해져야지. 현세의 인간들은 현세의 인간일 뿐이니까. 우리는 이제 어엿한 신인데. 그에 걸맞은 격을 가지고 있으니까. 높은 격을 지닌 자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하지 않겠어?”

단언컨대 엘룬을 무릎 꿇린 베니고어에게 품위나 품격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면 전부 교육받는 내용이기는 한데… 뭐! 어쩔 수 없지. 이기영 후배는 특이 케이스니까. 선배 된 내가 차근차근 알려주는 게 좋겠어!”

‘빨리 내려가고 싶네.’

“그럼 오늘도 파이팅 한 번 하자. 다 같이 손 한 번 모으고. 자! 재무팀장도 이리와!”

“…….”

“하나, 둘, 셋!”

“파이팅….”

“파이팅!!”

“파, 파….”

한심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다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는 디아루기아. 그리고 한층 더 의기양양해진 얼굴의 베니고어.

아무래도 얘 자신감의 원천이 이거였던 모양이다. 허리를 쭉 펴고 콧김을 뿜는 모습, 한쪽 손에는 커피를 움켜쥐고 언제 썼는지 뾰족한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저러다 사고 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슬그머니 샘솟기는 했지만 엘룬과 로렌이 한배를 타기로 했으니 어느 정도는 커버쳐 주겠지.

“그럼 특이사항 있으면 연락해, 이기영 후배!”

“네.”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쟤가 있어서 다행이기는 해.’

베니고어를 영입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도움이 되기는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모르고 있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도 그랬지만, 솔직히 이런 부분에서도 도움이 된다.

‘확실히 신이기는 신이야.’

격에 대한 발언도 그랬고, 현세와 위쪽을 분리해야 한다는 마인드 자체가 쪼금 성숙하게 느껴진다.

‘그래. 뭐 굳이 길가에 치이는 돌멩이 같은 애한테 신경을 쓰고 그랬을까. 높은 격을 지닌 존재로서의 품격이 있는데.’

놈이 빛과 정의의 철퇴를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니라 인간들의 몫이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김현성 이놈의 뚝배기를 부숴 버리지 않을까.

발로 의자를 밀어 책상으로 이동한 이후에는 다시금 김현성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

‘오늘 이것 때문에 온종일 설렜자너.’

아침드라마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미 신전에 도착한 지 제법 오래됐는지, 조각상 앞에서 초조해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당연하지만 얼굴은 이미 울상이었고 심지어 조각상의 피눈물을 닦아 낸 것 같기도 했다.

회의 때문에 의도적으로 끊어놨던 목소리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도중,

-괜찮으신 겁니까? 기영 씨? 그쪽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신 겁니까?

-…….

-제발 대답해 주세요. 너무 불안합니다. 너무 불안해요.

-…….

-믿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세요.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장 해결하겠습니다. 아니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위쪽에서 곤란을 겪고 계신 게 맞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해 주세요!

-…….

-제가… 제가 멍청하다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기영 씨… 무슨 일이 있는지, 원하시는 게 뭔지 설명해 주세요.

-…….

-제길….

도착한 이후에 꼬박 하루를 쉴 틈 없이 소리치는 모습은 살짝 걱정되기도 했지만 우리의 유대감이 변함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석상에서 뭔가 변함이 없자 허겁지겁 검을 붙잡고 신전의 밖으로 향하려고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신전에서는 피드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는 모양,

‘슬슬 올 때 됐자너. 아니 이미 기다리고 있었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신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놈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둠 맛 좀 봐라.’

신전의 밖으로 나간 김현성을 바라보고 황급히 달려오는 송가 놈과 빌런 무리들, 이 장면을 보고 싶었다.

‘아주 가관이네. 가관이여.’

꼴에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는 이제 막 도착한 듯 본인의 그리폰까지 옆에 대령해놨다.

누가 봐도 작위적이다. 그리폰 위에 있는 라이딩 보조 장비의 로고도 잘 보이게 세팅해 놓은 모습, 저런 작위적인 모습에 걸려들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시바, 빡 돈 현성이 눈에 그런 게 보일 것 같아?

-파란 길드마스터. 처음 뵙겠습니다.

-…….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송수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무례를….

-…….

-이렇게 뵙게 돼서 너무나도 영광입니다. 시기가 좋지 않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예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녀석 따위는 보이지 않는 듯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 신전의 부지 안이 아니었다면 냅다 뛰거나 날개를 펼치지 않았을까.

-노을빛의 검사님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

‘시바, 현성아. 형 감동했어.’

아예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다. 이빨을 으득 깨물며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시바….

-파란 길드마스터! 파란 길드마스터!

점점 표정의 여유가 없어지는 쥐새끼 같은 여우 새끼. 뭔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인다.

본인이 그리고 있던 그림은 이게 아니겠지. 하지만 시바, 우리 현성이는 친우의 피눈물에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고.

-노을빛의 검사님! 잠깐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그나마 선을 지키던 놈이 데드라인에 발을 들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영화 속 주인공 마냥 팔을 쫙 벌린 채로 김현성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

눈빛에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겠지만 실제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

한편으로는 조금 불안해지기야 한다. 이 새끼가 그래도 의외로 무른 구석이 있어서 매몰차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

하지만 불안감은 불안감에 불과했던 모양.

김현성은 자리에 멈춰 녀석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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