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8화 마지막 (31) >
회귀자 사용설명서는 신화 등급의 특성이다. 사실상 이레귤러에 가까울 정도로 대륙의 법칙을 위반한 종류의 특성이었다.
회귀자 사용설명서뿐만이 아니라 신화 등급이라는 게 본디 그렇다. 일정 부분 시스템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고,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을 정도였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나 특성에 기능이 서술되어 있다면 그 기능을 제재할 수단이 없다는 거다. 조혜진이 가지고 있는 부러지지 않는 창이 그렇다.
아이템 설명에 부러지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면 그 창은 절대로 꺾이지 않는다.
휘거나 녹거나, 부식될지언정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다. 물론 예외야 존재한다. 등급 안에서도 상위와 하위의 개념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특성이라는 것에 기인한다.
김현성과 나는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절대로 끊기지 않는다.
나는 녀석의 모든 걸 읽을 수 있어야 했고, 내 목소리가 녀석에게 닿지 않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다른 이레귤러가 없는 한은 말이다.
‘시바… 이게 뭔데?’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
“시바, 김현성 이 멍청한 새끼! 세라핌 개새끼! 가면 쓰레기 진청 새끼!”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흥분하면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게 끊길 일이 뭐가 있지?’
시스템의 개입? 내가 룰을 위반했다는 것 때문에 패널티를 내리는 건가?
아니면….
더 상위의 이레귤러와 충돌하고 있는 건가.
회귀자 사용설명서보다 더 상위의 존재나 힘이 나와 김현성의 연결을 방해하고 있다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주변에 모든 통신 수단을 차단하는 신화 등급의 아티팩트를 송수경이 가지고 있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건 아닌데….”
저 머저리가 그런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거니와 신화 등급의 물건이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힘이 이걸 방해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연결이 끊긴 건 아니야.’
김현성의 금안은 아직 그 빛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으니까. 단지 목소리가 닿지 않게 됐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김현성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녀석의 거대하고 사소한 정보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게 조작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녀석과 내 연결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괜스레 의자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뭔가 우물쭈물하는 세 개의 빛이 떨고 있는 게 보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눈치를 보던 은색 빛은 굳게 마음을 먹은 듯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눈에 보여 손등으로 팍 하고 쳐낸 이후에 다시 한번 자리에 몸을 앉혔다.
‘혜진이한테 처리해 달라고 해야 하나?’
아니, 조혜진이랑은 연결이 되어 있는 건가? 전부 다 끊긴 건 아닌가?
순간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생겨난 것은 당연지사.
“혜진 씨?”
-…….
“혜진아?”
-…….
“야. 조혜진.”
-네, 부길드마스터? 들립니다.
‘시바, 얘랑은 안 끊겼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곧바로 하고 싶은 말이 쏟아져 나온다.
“내 말 들어봐 혜진아. 송수경 그 개애애애애새끼 있잖아?”
-네?
“아니… 아니다. 조금 이따 다시 연락할게.”
‘끊기지는 않았어.’
지금 당장 송빌런을 처리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 가지 가능성 때문에 쉽게 입을 열 수가 없다.
‘시스템한테 제재당하고 있는 거일 수도 있으니까.’
일종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내 발언이 송수경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말처럼 들렸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목소리를 듣는다면 김현성이 곧바로 검을 꺼내 들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믿습니다와 피눈물까지가 마지노선, 녀석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선을 넘었다는 건가.’
혜진이한테 사람 하나를 죽이라고 말한 건 왜 제재를 안 받은 거지?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이유야 많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정확한 것 하나는 현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완전히 잃어버리거나 시스템에게 자격을 박탈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 거야.’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망원경으로 녀석들을 바라보자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파란 길드마스터. 바쁘시다는 것도, 여유가 없으시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상황이 너무 위중한 터라….
-…….
-간단히 식사라도 하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
옆에서 뭐라 뭐라 끊임없이 재잘거리던 녀석이 멈춰선 곳은 평소에 나와 김현성이 자주 들렀던 식당이었다.
계속해서 입을 열지 않았던 녀석이 조용히 건물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 것이 귀에 들려왔다.
-식사를 할 기분은 아닙니다.
-아… 죄송합니다.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당황하고 있는 송 모 씨의 얼굴이 보인다. 저 얼굴을 보니 올라왔던 짜증이 조금은 내려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 새끼 엿 같겠네.’
대화를 꺼내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분위기와 빌드업이 기본이 아니겠는가.
다짜고짜 용건을 말하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김현성이 송수경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김현성이 대화하기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은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 완전히 낚인 건 아니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 놈에게 손을 뻗은 이유도 이해가 가기야 한다.
이기영 조각상의 피눈물 사태가 대륙의 위협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했고, 사실 송빌런이 이야기한 것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해가 된다고 해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라는 것은….
무슨 길바닥 한가운데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모습, 김현성이 마력으로 주변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그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아직 형 배신한 건 아니구나. 현성아. 그래도 시바, 배신한 거야.’
기왕이면 저 새끼가 말실수를 해줬으면 좋겠다. 빨간 불에서도 멈추지 않는 김현성을 강림시켜줬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적절한 선을 지키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내 이름이 김현성의 트리거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부정적인 워딩을 최대한 조심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유지를 이어받았다거나, 이미 죽었다 같은 워딩은 다시 되돌아오실 장소나, 그분을 위한 단체로 바뀌어 있었다. 남들이 보면 이놈이 내 신도인 줄 알 정도였다.
녀석의 말을 듣고 있던 김현성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중,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감정이 요동치는 게 느껴지기야 한다.
그만큼 김현성이 걱정되기도 했고… 이 새끼는 이런 데 젬병이었으니까. 얼씨구나 하고 놈의 제안을 덜컥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야.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지.’
-그래서 파란 길드마스터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통제하거나 압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아닙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사랑하시는 대륙인들이 안심할 수 있는 대륙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저희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는 대륙을 구한 영웅분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
-현재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가지고 있는 정보들을 토대로 여러 가지 이상 현상에 대해 조사 중입니다. 임무를 제안해 드리거나 하는 방향으로… 명예추기경님에게 비한다면 죄송스러울 정도로 부족하겠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대륙을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해서는….
-…….
-노을빛의 검사님이 필요합니다. 부디 저희들의 구심점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겉으로 포장하는 솜씨가 여우 같기야 했다. 차라리 조혜진이나 김미영 팀장을 통해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뻔했다.
‘너 이 시바, 진짜 이거에 낚이는 거 아니지?’
나쁜 이야기로 안 들리니까 얼씨구나 꿀이다 하고 받아먹는 거 아니냐고. 아니, 애초에….
‘김현성 그런 거 싫어하는데, 시바.’
구심점 어쩌구 중심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우리 애 정신건강에 좋지만은 않다.
아니나 다를까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얼굴, 다행히 크게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현성이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다시 한번 짐을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놈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잠깐 동안 어지럼증이 느껴진다. 내가 느낀 것이 아니라 김현성이 느끼는 것이다. 애써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짐을 다시 한번 들어올려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기영 님께서 사랑하시는 대륙을….
-…….
-노을빛의 검사님이….
-…….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분을 위해서….
호흡이 계속해서 거칠어진다. 주변을 둘러보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수행원들이 김현성과 녀석을 둘러싸고 있다. 지금 김현성의 눈에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는 얼굴들이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순간적이지만 스트레스가 치솟은 것 같이 느껴진다. 김현성이 떠올리고 있는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으로 이미지화 된다.
천천히 죽어가는 나.
피 묻은 검.
폐허가 된 주변.
뛰어오고 있는 길드원들과 울부짖고 있는 박덕구의 모습.
계속해서 머리를 붙잡고 중얼거리고 있는 정하얀과 소란스러워진 장내.
나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눈을 감을 직후부터 녀석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박덕구 이 새끼는 몸이 으스러지도록 나를 껴안고 있는 중, 어쩌면 박덕구 이 돼지 새끼가 나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저 과정에서 어디 한 군데는 부서졌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제발… 흐으으윽… 제바알… 우리 형님 좀 살려주쇼. 우리 형님 좀 살려주쇼….’
누구한테 살려달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중.
찬란한 노을빛이 떠 있는 풍경은 어딘가 슬퍼 보인다.
‘흐으으윽… 눈 좀 떠보라니까! 눈 좀… 흐으윽… 흐으으윽… 제발 데려가지 마. 제발… 우리 형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쇼… 제발… 이렇게 데려가면 안 된다니까… 이렇게 데려가지 말아주쇼….’
정하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호흡이 거칠어 지고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 모습.
박덕구에게 안겨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내 몸을 보고 있는 하얀이의 눈에 시퍼런 분노가 가득 찬 것은 순식간이다.
한소라가 제때 와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무슨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났을지도 모르겠다.
한소라한테 안겨 엉엉 울고 있는 모습.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지 계속해서 뻐끔대고만 있다. 저러다 숨넘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끄윽… 끄으윽… 끅… 끄으윽….’
김현성이 이 모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녀석이 제대로 주변 사물을 인식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은 틀림없이 이 모든 광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숨을 거둔 내 입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성자의 미소, 대륙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 미소를 김현성은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현성의 표정 변화에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송수경이 시야에 비친다.
송수경의 표정은 뒤틀려 있다.
단순히 권력에 대한 욕심뿐만이 아니라, 어딘가 확실하게 뒤틀린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