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9화 마지막 (32) >
이 새끼… 도대체 뭐야?
-지금 이 자리에서 곧바로 답을 주시기 어렵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지요.
-…….
-궁금하신 점이 생기신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노을빛의 검사님.
‘뭐야? 도대체….’
찰나였지만 위화감을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맛탱이 간 것 같았는데?’
혹시 이지혜가 뿌린 씨앗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떠올려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터무니없는 가설이었지만 이런 가설마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정도로 기괴한 얼굴이었다.
생각해 보면 굳이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까지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게 만들 이유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따로 원하는 게 있어? 아니면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거야?’
공화국과 연합의 비호를 받고 있다지만 리스크가 없지만은 않다. 자신을 드러내고 움직인다는 건 언제나 패널티를 맞을 수 있다는 걸 고려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놈은 대륙의 영웅을 적으로 돌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다가 뒈져 버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는 거다.
그렇다고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루시퍼가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놈에게 악마나 다른 이들이 개입했다는 물증이 없었으니까.
이기영의 자리를 대신해 보겠다는 것 자체가 목적처럼 비칠 수는 있기는 하지만 권력이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그럴 이유도 없다.
머릿속 생각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 아무래도 우리 애들이 오열하는 꼴을 한 번 보니 마음이 복잡해진 것 같다.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인 것인지 아직까지도 녀석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바, 때려치우자. 사실 궁금해할 필요도 없는데….’
김현성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놈이 정말로 대륙을 위하고 있는지는 이쪽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사실 이 새끼가 대륙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고 해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송빌런이 명백히 선을 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고 있는 김현성이 시야에 비친다.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쥔 얼굴, 혹시나 이 새끼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으로도 꼴도 보기 싫어진다.
물론 특성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람 일 어떻게 될 줄 모르자너.’
헌신하면 헌신짝 되는 거 흔한 일이자너.
항상 최악을 생각하고 움직여야지.
만약에 김현성이 나 버리면, 시바,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뒈지는 거지.’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재미있군.”
“오랜만입니다. 벨리알 님.”
“어떤가. 그 인간은… 제법 쓸 만해 보이는 인간이 나타난 것 같던데.”
쓸모는 무슨.
“착각하신 걸 겁니다.”
“어딘가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배제해야 하는 놈이다. 솔직히 송빌런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애초에 내가 그럴 판단을 할 입장은 아니지 않은가.
자기세뇌 때문인지 자꾸만 기분이 업다운 되고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송빌런한테는 살짝 고마운 마음도 있다.
다시 한번 이기영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니까.
대륙 땅을 밟은 이래로 이기영은 양보한 적이 없다. 누구든 내 거에 손을 대면 시바, 죽는 게 맞다.
지혜 누나한테 맡기는 게 합리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솔직히 기다리기 싫다. 누나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겠고….
아껴먹으려고 침 발라 놓은 생크림 위에 딸기에 손을 대는 놈들은 바로바로 처리해야지.
오히려 머릿속이 차가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벨리알 얘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정말로 즐거운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것을 보니 단순히 이죽거리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궁금하지 않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 인간이 궁금하지 않느냐 이 말이다.”
“그다지 궁금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그게 당연하겠지. 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와는 관계없이 그대의 노여움을 샀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대는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시스템이 막고 있다고 한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결국에는 목적을 완수하겠지. 내가 말하는 것은 저 미천한 필멸자를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한 이야기다.”
“…….”
“우리 역시 시스템에 영향을 받는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계약서를 시스템이 공증한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현세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계약되거나 소환된 악마뿐이지만 악마나 신의 노여움을 산 인간이 비참한 꼴을 당하는 사례가 아예 없지는 않지.”
“…….”
“조금은 재미있는 걸 가지고 왔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내게도 여흥이 될 것 같고… 또 뇌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
“지루하던 차에 잘 되었구나.”
재미있어 죽을 것 같다는 벨리알의 얼굴, 이유는 모르겠지만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벨리알 님.”
“감사받기 위해 전한 물건이 아니다.”
벨리알이 꺼낸 것은 작은 구슬.
관심 없는 척 들여다보자 송수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재는 아니다. 지금과 모습이 눈에 다른 것이 보였으니까. 나름 깔끔한 제복을 입고 있었던 녀석의 옷이 너덜너덜해 보이지 않는가.
배경도 다르다. 놈이 자리 잡고 있는 왕국연합이 아닌, 린델.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에 대해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네.’
정확히는 송수경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녀석의 린델 시절, 왕국 연합으로 떠나게 된 계기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근데 이건 또 어떻게 구해왔어? 우리 벨 이사 너무 유능해.
벨리알의 얼굴을 살짝 바라본 이후에는 다시 한번 작은 구슬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 정확히 언제 일어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루하다면 지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 였다.
녀석이 당시에 동료들과 사냥을 나가는 평범한 영상이다. 뭔가 약점 잡을 게 있나 싶어 조용히 구슬을 바라봤지만 그것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대화가 오가고 있기는 했지만… 인상적이지는 않다. 전형적인 초보 모험가들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살아남으려면 해야 하는 일이야. 용기를 가져야지.’
‘알고 있어.’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쉽게 쉽게 판단해 수경아. 파란 길드 이야기는 들었어? 김현성, 이기영, 정하얀…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언론에서는 걔네들 이야기밖에 안 해. 린델의 중심이라고. 기회라고 생각해. 몬스터를 잡고 장비를 맞추면 강해진다. 그게 기본이라고. 우리라고 그 사람들처럼 되지 못한다는 보장은 없어. 우리도 될 수 있어. 그들처럼.’
‘…….’
‘아직도 신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제는 지구가 아니라 이곳이 현실이니까. 심지어 여기에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 신이 존재하고, 그들은 우리를 버렸어.’
‘나도 알고 있어. 그럼 움직이자.’
‘한번 가 보자고.’
풍경이 변한 것은 바로 그때. 허겁지겁 쫓기고 있는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허억… 허억… 허억….’
‘수경아, 도망쳐!’
‘허억… 허억….’
거대한 몬스터 한 마리가 놈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냥을 나가던 모험가가 사고를 맞는 경우인 것 같다.
녀석의 파티 같은 경우에는 제대로 걸린 모양, 상위 모험가나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에게 숲의 중반부에서 쫓기는 경우가 사실 흔하지는 않다.
숲을 헤치며 무작정 뛰고 있는 놈에 바로 뒤까지 몬스터가 바로 쫓아온다.
하의가 축축해진 것은 옵션,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리면서 장비를 버려가며 달리는 모습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오직 살아남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제길! 민철아!!’
‘살려줘! 살, 살려줘!!’
한 녀석이 잡혔는지 그대로 공중에서 몸이 두 동강이 나는 모습,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뛰어나가는 녀석의 모습에는 공포가 들어서 있다.
‘하아… 하아….’
지금과는 너무 다른 모습, 솔직히 그냥 공포에 질린 머저리로 보인다.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누가 저런 상황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동료들의 시체가 바로 옆 나무에 처박히고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상황은 나름 극한 상황이라고 할 만했다.
최근이야 여러 가지로 안전장치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아마 보통의 클랜이나 소규모 길드들은 전부 이런 식이었겠지.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가랏! 힘내! 없애 버려!”
몬스터의 팔이 마침내 놈에게 닿았을 때였다.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괴물의 몸이 갈라진 것. 완전히 두 동강이 난 몬스터의 몸 사이로 한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
어째서 벨리알이 이걸 가지고 왔는지 알 것 같다.
녀석을 구한 것은 바로 김현성이었으니까.
“…….”
무표정한 얼굴,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조용히 몸을 돌리는 모습.
송수경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지 바들바들 떨며 천천히 눈을 뜨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간지는 나…. 진짜. 현성이 멋있기는 해. 그건 인정해.
녀석은 린델을 떠나기 전에 김현성을 만난 적이 있다. 송수경을 수습하는 파티원들과 멍한 얼굴로 김현성이 발걸음을 돌린 곳을 바라보는 녀석이 눈에 보인다.
‘살았다. 제길… 살았어.’
‘수경아. 괜찮아?’
‘방금 누구야? 방금… 파란 길드마스터였어?’
‘어째서 파란 길드마스터가… 여기에….’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파란 길드마스터! 김현성 님!’
송 모 씨의 눈이 확대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김현성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들이 반으로 갈라진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놈의 얼굴이 흥분에 가득 찬 것은 순식간.
아까 전에 봤던 기괴한 표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윽고 녀석이 중얼거린 목소리에는 커다란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메시아….’
‘…….’
‘저, 저 사람이 메시아야….’
“푸… 흡….”
그런 거였어?
그래, 이상하다고 했어.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했다고.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녀석이 김현성을 메시아라고 불렀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다. 꽤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벨리알 역시 슬슬 입꼬리를 올리는 중. 아마 내가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나도 듣고 싶군.”
구태여 숨길 필요도 없다.
“…….”
“…….”
어차피 벨리알의 도움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이 새끼… 푸… 푸흐흐흣….”
“…….”
“이 새끼… 악마랑 계약시킬 겁니다.”
“하핫….”
“이 새끼 악마랑 계약시킬 거라고요. 푸… 푸흐하헤헤헷!”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핫! 역시나 구역질 나는 영혼이로구나.”
“이 새끼 악마랑 계약시킬 거라고… 흐헤헤하하하핫!”
뒤늦게 도착한 베니고어가 괜스레 눈치를 보며 함께 웃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즐거워 보이기는 했다.
“어?”
“하하하하하하하핫!”
“어?”
“푸헤하헤헤헤헷!”
“푸… 힛…? 푸… 푸히히히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