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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800화 (791/1,590)

< 800화 마지막 (33) >

송빌런을 딱히 뭐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굳이 명명하자면 노을빛의 신도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의 행동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시점이었다. 어째서 쥐죽은 듯이 살았던 녀석이 움직인 것인지도 이해가 간다.

김현성을 메시아, 신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이야 뻔하지 않은가.

현재 김현성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걸지도 모르지. 되다 만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위엄 넘치고 항상 위에 있으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김현성이 이기영의 죽음 이후에 흔들리기 시작한 것처럼 비쳤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본인이 완성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놈의 생각을 쥐어뜯어 볼 수 없었지만… 정황상 들어맞는 부분이 많다.

화면 속에 송빌런은 자신감 없어 보였고, 대륙에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그사이에 제법 많은 일이 일어났겠지만 놈이 움직이자 마음먹은 것은 오롯이 김현성 하나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걔를 신으로 만든 줄 알아?’

회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만들었다.

‘누가 김현성을 완성시켰는지 아느냐고.’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 내가 이룬 것에 불순물을 묻힌다는 것 자체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는 한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이 일부 사라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베니고어의 말처럼 놈과 내 차이를 실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크게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놈은 별 볼 일 없었고… 나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녀석과 내 스펙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 미안해질 지경이었으니까.

‘내가 더 유능해.’

근데 꼭 이런 대결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애가 이기기는 하더라.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아침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꼭 흙수저로 시작한 애들이 승리 하자너. 막 꿋꿋하게 살아가고 아무 능력도 없는 애가 승리 하자너. 근데 그건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일이야.

천천히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삼색이들을 한 번씩 쓰다듬어 주니 이놈들도 기분이 좋은지 뱅글뱅글 떠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보여왔다.

동시에 망원경 한쪽으로 보이는 송수경 역시 시야에 비친다. 무척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나름 꿋꿋해 보이기야 했다.

-웨일즈브 평야에서 언데드들과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으며….

-지원 병력을 보내겠습니다.

-정하얀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뿐더러 몇몇 거점 도시에 문제들이 생겨나 병력이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최소한 그리폰이라도 지원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하얀 님의 소재는 현재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하얀이 바빠.

-원인은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겁니까?

-역병이 터진 곳을 중심으로 언데드들이 빠르게 불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은 초기 진압이 가능한 상태로 보이지만 신성력에도 효과를 받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우리 지혜 누나는 잘한다.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지역을 봉쇄하세요.

-네. 명령에… 아아아악!

보고를 받고 있던 놈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우리 팀 여단 쌍둥이들. 가면을 쓴 채로 서 있는 모습이 망원경에 들어왔다. 아마 송빌런은 볼 수 없겠지.

-죽었어?

-아니, 죽지는 않았어.

-마법사 맞지?

-응.

-수준은.

-영웅 등급 정도.

-끌고 가자.

-언니가 좋아할 거야.

-누나가 좋아할 거야.

믿음직스러운 우리 쌍둥이들. 왠지 모르게 나도 1회 차 때 너네 좋아했을 것 같아.

우리 가면의 영웅 패밀리. 사이코패스 살인마한테 구박받으면 내가 막 실드도 쳐주고 그랬을 것 같다고. 쌍둥이들 건드리지 말라구.

어쩌면 그 반대였을 수도 있고.

머리를 짚고 있는 송빌런의 모습을 보니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인 것 같았다.

‘뭐 벌써부터 저러고 있어. 아직 시작도 안 한 것 같은데.’

송빌런의 무능함을 꾸짖고 기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몇 개의 소도시에서 문제가 생긴 것뿐이고 작은 평야에서 문제가 생긴 것뿐이다.

에베리아가 멸망했다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보고조차 올라오지 않았을 사소한 문제였다.

주변 던전이 문제를 일으켰을 수도 있고 새로운 던전이나 새로운 보스몬스터가 출연했을 수도 있다.

해당 지역의 모험가들이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는 거다.

안정화 되지 않은 지역이라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이런 현상들이 전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

자랑스러운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송수경으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영웅들을 떼거리로 운용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기는 해.’

소 잡는 칼을 닭 잡을 때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어찌나 우리 지혜 누나가 신출귀몰 한지 야금야금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을 보면 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나도 사방에서 새는 물줄기를 막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지혜 누나가 얼마나 센 줄 알아?’

크게 맞았다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놈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였다.

몸도 떨어져 있고, 딱히 그녀가 이 상황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혜 누나가 내 일에 힘을 보태고 있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어야 구슬리기가 쉬우니까. 누나가 활약하면 활약할수록 내가 움직이기 쉽다는 거지.

-공화국에 연락해서 해당 지역 수습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조사단도 함께 파견하겠다는 전언도 부탁드립니다. 사제보다는 연금술사나 마법사들로 구성된 조사단으로… 네. 지역 모험가들에게 정보를….

-…….

-휴우… 관련 조사보고서는 최대한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노을빛의 검사와 이야기는….

-네. 나쁘지 않게 끝난 것 같습니다. 제법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아서… 어제도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고요. 아마 오늘 내로 연락을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구조의 개편이나 요구사항들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어쩌면 김현성 님의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수도 있고요. 이 문제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최근 조금씩 일이….

-네. 동의합니다. 보좌관님. 아직까지 커다란 성과가 없으니.

잠깐 동안 여신의 손거울을 바라보다 통화 버튼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 녀석이 눈에 보인다. 답답하겠지.

-파란 길드마스터.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송수경입니다.

-…….

-파란 길드마스터?

-김미영 팀장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니 그쪽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아… 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파란 길드도 바쁘네.’

잠깐 눈을 감은 뒤에 김미영 팀장과 연락을 하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필기까지 해가며 열심히 합의점을 찾아가고는 있지만 이런 통화로 중얼거리는 협상이 마무리될 리 만무, 의견 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별다른 성과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쉬운 이야기다.

김현성이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며 곧바로 관리위원회에 발을 들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얘가 그렇게까지 멍청할 리가 없지 않은가.

본인이 해결하기 복잡한 상황이라 판단해 김미영 팀장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파란 길드에게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공화국과 왕국연합을 중심으로 꾸려진 인사단의 구조조정과 애초 계획했던 영웅들의 관리 시스템에 수정 사항을 요청했고, 녀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 끼게 됐다.

언론을 이용해 여론전을 펼치는 것은 여전했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현성은 여론에 휘둘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문제점은 김현성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 하나.

녀석과 김미영 팀장이 나눴던 대화는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는 뭔지, 에베리아가 정확히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세요.’

일하라고 할 때는, 시바, 가방 쇼핑이나 다니더니 일하지 말라니까 갑자기 일하려고 하는 심보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대화였다.

‘또 우리 길드와 제가 움직여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제 입장에 대한 것은 생각하지 마시고 김미영 팀장님의 의견이 어떤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현재로서는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대체 수단이 없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전 대륙의 모든 집단이 그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인프라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파란 길드는 혼자 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제가 그자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건….’

‘어쩌면 기영 씨가 그걸 바라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어 하신 대륙입니다. 돌아오셨을 때를 위해서라도 온전한 풍경을… 에베리아의 세계수를 바라보며 웃으며 커다란 나무라고 말씀하셨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일이 터진 이후에 얼마나 슬퍼하셨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조각상에서 흐르고 있는 눈물은 아마… 네… 그런 의미였을 겁니다. 상처받은 에베리아와 엘프들 때문에 흐른 눈물… 제게 믿는다고 말씀하신 것 역시 이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일 겁니다.’

‘…..’

‘구태여 혜진 씨에게 창을 내린 이유 역시… 아마….’

‘네?’

‘제가 혼자 짐을 드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허탈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지.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신 것 같습니다. 제게 무너질까 불안한 마음과 현재의 상황을 해결해 줬으면 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팀장님.’

시선을 돌리자 길드 직원들과 회의를 나누고 있는 김미영 팀장의 눈에 보였다.

돌파구를 찾았다고 생각했는지 열심히 입을 열고 있는 김미영 팀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공화국과 왕국연합이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김현성을 중심으로 한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추진하자는 생각이다.

내가 김미영 팀장이더라도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대륙은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영향력에서 온전할 수 없었으니 김현성으로 단체 하나를 먹어보겠다는 계획.

현실성이 없지도 않다. 김미영 팀장의 능력이야 내가 보증하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쟁점은 여러 가지로 놈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

한숨을 푸욱 내쉬며 전술 김현성 훈련장으로 가 헬멧을 썼지만 그 연습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애초에 능력도 없었고 기다리고 있던 전직이나 특성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와중에도 놈은 토악질을 하며 스스로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제길….

거칠게 헬멧을 집어 던지며 험한 말을 쏟아내는 녀석.

나는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내 손을 잡아라. 필멸자여.”

최근 절대로 빠뜨리지 않은 일과였으니까.

-어?

“내 손을 잡거라, 필멸자여. 그리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

-누… 누구야. 당신. 누구야!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정확히는 녀석의 안의 파고든 악마가 내 말을 전하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달콤한 기분이 들기야 했다.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네 두 손아귀에 안겨주마. 어리석고 아둔한 필멸자여. 자아… 내 손을 잡아라아아아아.”

바이브레이션도 좀 섞어주니 주변을 황급하게 둘러보는 빌런송의 시야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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