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1화 마지막 (34)(삽화) >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모습은 가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은 예상했지만 내 생각보다 더 궁지에 몰린 모양인 것 같았다.
-누구냐고!
달다.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니 달콤하다.
놈이 곧바로 악마의 손을 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실실 삐져나왔다.
내가 조금 꼬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하지만 악을 배제해야 한다는 빛의 사명은, 시바, 내게 끊임없이 엔돌핀을 불어 넣고 있었다.
‘정의를 집행하는 중이자너.’
빛은 절대로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아. 모든 것은 대륙을 위해서지.
‘내가 바로 대륙이다.’
의자의 팔걸이를 붙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 머리를 계속해서 매만지고 있는 것을 보니 자기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아마 나름대로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방금의 목소리가 뭔지, 어째서 자기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의아해하고 있겠지.
일차적으로는 본인에게 쌓인 피로가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최근에는 특히 사건 사고가 많았으니 환청을 들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본래 악마와 계약을 맺는 이들이 비슷하게 시작하는 편이니까.
아마 진청 역시 벨리알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천천히 야금야금 녀석의 정신을 마모시키며 접근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기왕이면 녀석이 빠르게 악마와 계약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찬물로 얼굴을 씻은 이후에 거울을 보는 모습, 암실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뭘 봤는지 흠칫거리고 있다.
-이게… 뭐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시 한번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들어가 있다.
놈은 바보가 아니다. 이렇게까지 힌트를 줬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는데.
‘뭐가 이럴 리가 없어. 다 그런 거야. 처음에만 조금 힘들고 나중에는 다 적응되고 그래.’
-이럴 리가….
때마침 등장하는 갤러리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깜짝 놀란 송수경이 그들을 경계하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송수경 님.
-잠깐… 잠깐만….
-상태가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만… 사제라도….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는….
-훈련을 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더 이상 무리하지 않으시는 편이… 조금은 휴식을 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깐만 혼자 있겠습니다.
-네?
-모두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인 같지 않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는 갤러리들, 빛이 희미한 공간 안에서 웬 놈이 허억허억거리고 있으니 소름이 돋을 만도 하다.
어쩌면 빌런 송이 타 신전의 조각상을 찾아가 문제를 알아보려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녀석은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뻔하지 뭐.”
놈이 다른 신에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말할 리가 없지 않은가.
몸에 악마가 들어선 것 같다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간다고 하더라도 악마를 몰아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녀석의 자질을 걸고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뭐.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놈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녀석은 노을빛의 신도니까.
덜덜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황급하게 자리를 나서는 꼴은 가관,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하는 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녀석은 반응하지 않는다.
본인의 방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는 곧바로 문을 잠가 버린 이후에는 커다란 책장을 툭툭 두드리고 있다.
비밀 방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 이후에 한참이나 내려간 녀석의 눈앞에 비친 것은 작은 석실, 작은 촛불 몇 개가 밝혀주고 있는 방 안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시야에 비쳤다.
‘이 싸이코 같은 새끼. 시바 내가 이럴 줄 알았자너.’
-신이시여. 메시아시여.
한 자리에 들어서 있는 커다란 조각상이 보인다. 녀석이 직접 깎았는지 어색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니, 언뜻 보면 괜찮게 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한소라가… 다르기는 다르네.’
일반인과 장인의 차이가 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김현성이 보이기는 하지만 저걸 김현성이라고 부른다는 것 자체가 우리 회귀자에 대한 모욕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몸은 그나마 훌륭하게 깎은 것 같았지만 얼굴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본래 신전의 조각상이라는 건 신성함을 담아야 하는 법인데 신성함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다.
‘혼이 실려 있지 않아. 노력이 부족하다구.’
그 외에도 몇 가지 물건들이 눈에 띈다.
노을빛의 신을 형상화한 것만 같은 로자리오, 녀석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 놓은 것 같은 성경, 정체 모를 물건들까지 신줏단지 모시듯 모셔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게 다 뭔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잘나가는 조각가에게 의뢰라도 맡기고 싶었겠지만 이런 걸 누구한테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날개 달고 빛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녀석을 향해 올라오는 신성이 완전하게 정돈된 것은 아니다.
노을빛의 신은 아직 현세의 껍질을 벗지 못했고 정하얀처럼 스스로를 신격화하지도 않는다.
신앙과 믿음 사이에 있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지.
대부분의 대륙인들이 김현성에게 보내는 신성은 완벽한 신앙과는 거리가 있고… 김현성이 자격을 얻지 못했다는 것도 그런 의미였으니까.
이 새끼가 하고 있는 행위는 대중들에게 또라이 짓으로밖에 비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다른 시점으로 볼 수도 있겠지.
송수경에게 노을빛의 신화를 정립하고 직접 종교를 만들게 하는 방향도 생각할 수 있겠지. 본래 신화나 종교라는 게 다 그런 식이니까.
하지만 거기에 녀석의 자리는 없다.
‘내 거야. 시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노을빛의 신은 내가 만들었고, 내가 완성 시켰다. 노을빛의 교단을 만드는 것 역시….
“내가 할 거야. 새끼야.”
내가 할 거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내 손 안에서 이루어져야 돼.
어떻게 해. 지혜 누나. 나 컨트롤 프릭 맞나 봐.
-메시아시여. 당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사악한 이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 역시 아닙니다.
-…….
-제 믿음이 변함이 없다는 사실만 알아주십시오. 제 믿음은 결단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더러운 이들이 거짓된 목소리로 속삭인다고 한들, 저에게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것 같아?’
-언제나처럼 제게 힘을… 저에게 힘을 내려 주시옵소서. 제가 이 거짓된 목소리를 이겨낼 수 있게 힘을 주시옵소서.
‘힘은 개뿔.’
그냥 아무런 힘도 없는 조각상에다 대고 중얼거리는 꼴이 우습게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 솔직히 비유웅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손을 모으고 있었던 녀석이 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 자신의 기도가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조금은 안심한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띄지만 그거야말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행위에 가깝다.
녀석의 약한 틈을 파고들어 간 악마는 여전히 놈의 마음속 싶은 곳에 눌어붙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놈이 약해질 틈을 노리고 있다.
사실 틈이라고 말하기에도 그렇지. 이 새끼는 애초부터 궁지에 몰려 있었으니까.
“혜진아 준비됐어?”
-네. 준비는 됐지만… 이미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본부 앞입니다. 훈련 차 온다는 허가를 받았고, 예리도 데리고 왔지만….
“걍 적당히 맞춰 주라고 해요. 어느 정도까지 하나 보게.”
-예리 표정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딱 원하는 그대로의 상황이네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아, 그리고 하얀 씨가 실마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까?”
-아직 확신하고 계시지 못한 것 같지만 틀림없이 포탈을 역추적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이상한 포교 활동만 아니라면 조금 더 빨랐을 것 같았지만….
“일단 계속 진행하라고 말씀해 주세요.”
-하얀 씨가 실마리를 잡으면 지혜 씨와 만날 수 있는 겁니까?
“네. 애초에 그러려고 한 건데요. 뭐. 사실 이상한 포교 활동 아니더라도 시간이 더 걸리기는 했을 겁니다. 이지혜가 퍼즐을 조금씩 조금씩 뿌리고 있는 것 같아서요. 이상 현상이 있었던 곳에서 발견된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준 거 맞죠?”
-그게 아니었다면 시간이 더 걸렸을 수도 있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주려면 한꺼번에 좀 주지.’
-확실히… 아직 남아 있는 지혜 씨의 의식이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는 게 맞다면 다행이겠지만….
“지혜 씨는 잘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일단 들어가요. 예리랑 이야기는 다 끝낸 거 맞아요?”
슬쩍 시선을 돌리니 좋지 않은 표정을 보이는 김예리가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억지로 왔다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만 같다.
‘그래. 얘도 짜증 나겠지.’
우리 꼬맹이. 파란에서 성장한 우리 꼬맹이. 김예리. 싫어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나 좋아하자너. 집 나간 회귀자 대신해서 내가 키워주다시피 했자너.
조금 과장하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이야 박덕구 안기모와 몰려다니지만 초기에도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까 파티의 어머니 이기영이 얼마나 그녀를 챙겼는지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내가 죽은 이후에 가장 슬퍼한 사람 중에 김예리가 끼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갑자기 나타나 내 자리를 꿰차려고 하는 빌런을 김예리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할 뻔 자. 성질머리대로라면 단검으로 난도질을 해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친했던 조혜진과도 조금 서먹해진 듯한 모습, 가기 싫다고 말했을 텐데 억지로 끌고 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싫다고. 말했는데. 언니.
-부길드마스터의 뜻이야. 예리야. 지금은 아무 말 하지 말고 일단.
-마음에 안 들어. 자기가 뭐라고. 신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니 뭐니. 짜증 나.
뒤에서만 이러지 말고 앞에서도 표현을 하지 좀.
-그 사람. 훈련을 내가 도와준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
-그런 걸 할 수 있는 건. 아저씨밖에 없을 거야. 흉내 내기 하는 것 같아서. 짜증 나.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지금의 김예리에게는 이 상황이 계모나 계부가 등장한 것 같은 상황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내 추측이 맞다는 걸 말해주는 것처럼 김예리는 괜스레 단검을 잡고 빙빙 돌리고 있다.
심지어 조혜진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송수경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을 정도, 대놓고 짜증을 부리고 있었지만 송 빌런 입장에서도 그런 김예리를 두고 볼 수밖에 없었으리라.
녀석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김현성과 김예리는 클래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녀가 김현성의 밑에서 힘을 키웠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실제로 길드 내에서 김현성과 가장 움직임이 비슷한 사람을 꼽으라면 모두가 김예리를 꼽을 정도로 그녀는 김현성과 닮아 있었다.
이를테면 사전연습이라는 거다.
물론 김예리가 그런 녀석을 배려해 줄 리 만무.
‘우리 애가 좀 세.’
송 빌런과 함께 간단한 모의전을 치른 이후, 귀에 꽂혀 있는 수신기를 집어 던지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퉤!”
‘침까지 뱉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너무 예의 없어 보이자너.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심지어 집어 던진 수신기를 발로 콱콱 밟고 있다. 누가 봐도 감정이 실린 것 같은 발놀림이라 뭐라고 표현할 수조차 없다.
거칠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적개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얘 어떻게 해. 삐뚤어지고 있자너.’
“최악! 최악!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이이!!!”
뒤늦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