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3화 마지막 (36) >
“그대 역시, 이기영 그자와 같은 것을 원하고 있었어.”
-피드백 감사합니다. 김예리 님. 다음 훈련 때는 꼭 참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방금까지 제가. 무슨 말을 했었던 건지. 송수경 님께서는. 제대로 이해하신 게 없으신 모양이네요. 저는….
-죄송합니다만 잠깐 피드백 내용에 대해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조혜진 님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여러분을 위한 식사와 연회가 준비되어 있으니 거절하지 마시고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다른 약속이 없으시다면 이곳에 머무르셔도 괜찮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
-집으로 가자. 불편해. 언니.
-제의는 감사하지만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많은 터라….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군요. 제 보좌관들이 바깥까지 안내해 드릴 겁니다. 다시 한번 수고 많이 하셨고… 그럼, 이틀 뒤에 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이틀 뒤에 얼마나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언니?
-예리야.
-왜?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김예리 독하다.’
끈질기게 극딜을 넣는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귓속말로 조혜진에게 속삭이고 있는 모습이 무섭다.
들리지 않게 소곤대고 있기는 하지만 누가 봐도 들으라는 것마냥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베니고어 교단의 수행사제도 뚜껑이 열리고 이성을 잃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하는 도발 수위였지만 지금 빌런 송에게는 그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흠칫 놀랐던 이전과는 다르게 내 목소리가 끊기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이기영 그자와 같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말이 신경 쓰여 참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
조혜진과 김예리에게 축객령에 가까운 멘트를 날린 이후, 뒤처리를 보좌관들에게 맡긴 것만 봐도 녀석이 어떤 상태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김예리와 조혜진을 무시한다기보다는 그녀들을 챙길 여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알맞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놈이 둘을 홀대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권력 맛 한 번 보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아니면 정신이 없는 거야?’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 예리좌가 이 판을 흔들었다는 것 하나다.
‘예리야, 네가 캐리한 것 같아.’
-기분 나쁜 사람이야. 짜증 나. 쓰레기.
-오늘 고생 많았어. 예리야.
-…….
-언니는 괜찮은 거야?
-그럴 리가 있겠니.
관리위원회 본부를 나서는 와중에도 기분 나쁘다는 표현을 확실하게 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참을 수가 없다.
‘네가 대륙을 구한 거야.’
송수경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김예리의 독한 멘트들이 녀석의 자존감을 깎아내린 것은 맞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놈이 이쪽의 손을 잡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중간중간에 저질렀던 핵심 멘트들이 놈의 심장에 틀어박히지 않았을까.
자신의 무능력함을 실감한 것과는 별개로, 본인이 노을빛의 신에게 선택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절망했을 수도 있겠지.
옆에 서고 싶다거나 인정받고 싶다거나, 함께 하고 싶다거나, 뒤따르고 싶다거나, 따위의 희망 사항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 자신은 절대로 선택받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안 그래도 궁지에 몰려 있었던 놈의 정신을 다시 한번 밑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쪽은 적당한 합의점만 제시해 준다면 계약은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왜?
놈에게도 시간이 없었으니까.
커다란 폭탄이 터지기 직전이라는 걸 녀석이 모를 리가 없다.
예상대로 조혜진과 김예리를 내보낸 이후에 녀석은 다시 한번 황급하게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 안에 있는 비밀신전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잠재적으로 악마라고 가정하고 있었던 이와 대화하는 장소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에는 다시 한번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긴 이후에 조용히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신 누구야. 누군데… 자꾸.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필멸자여.”
-누구야.
“네가 원하는 것을 선물해 줄 수 있는 존재.”
-어떻게 내게… 말을 걸 수 있는 거지?
“그대의 간절함이 내게 닿았기 때문이다. 그래. 신을 향한 그대의 간절함이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였지.”
-너는 악마야. 더러운 악마 자식.
“어째서 나를 악마라고 부르는가. 필멸자여.”
-…….
“신이 아니면 악마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대의 아둔함을 증명하는 행동일 뿐이다. 그대가 나를 악마라고 부른다면 악마가 되는 것이고 신이라고 부른다면 신이 되는 거겠지. 두 가지 모두를 부정하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다. 이름 모를 초월적인 존재라 생각한다면 초월적인 존재가 될 것이고, 그대의 조력자라고 생각한다면 조력자가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로울지는 그대가 판단해야 할 문제. 내게 답을 요구하는 것만큼 멍청한 행동이 없지. 무슨 말을 듣고 싶은가. 내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것인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그대가 알고 있는 것보다 세계는, 이 대륙을 관리하고 있는 의지는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인간의 시각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대에게 나를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대는 조금 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악마가 아니라는… 겁니까.
“나는 대륙 그 자체이며 대륙 안에 깃들어 있는 의지다. 신이나 악마라는 말로는 나를 정의할 수 없다. 나는 그대에게 나를 섬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를 숭배하고, 경배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혼을 팔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대는….”
-노을빛의 신도입니다.
“노을빛의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라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금이지만 대화할 분위기가 마련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쪽을 경계하는 것은 여전해 보였지만 마지막 멘트가 결정적이었던 모양,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맹렬하게 돌아가는 머리가 보이기는 했지만 나와 대화를 할 생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게 느껴진다.
여전히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대에게 나의 존재를 믿어 달라 청한 적이 없다. 내 손을 잡을지 잡지 않을지는 순전히 그대의 의지이며 그대가 거절한다면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 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대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기영과 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 말씀하신 건 무슨 의미였습니까.
“그자 역시 나의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한다면 이야기가 빠르겠지.”
-네?
“그자 역시 나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필멸자여.”
-그랬던 건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가관. 이제야 수긍이 된다는 듯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사실 그렇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이기영의 업적은 망원경과 마음의 눈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그걸 모르고 있다면 내가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도움을 받거나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고… 굳이 여러 가지 가설을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애초에 이 새끼는 이기영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노을빛의 신화에서 빛의 아들을 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빛의 아들의 업적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었으니, 아마 후자 쪽에 무게를 싣고 있을 것이다.
“그는 노을빛 신의 옆에 서고자 했다.”
-…….
“그의 발자취를 밟고 싶어 했고, 그와 함께 걸어가고 싶어 했지. 그것은 일그러진, 추악한 욕망이었고, 어린아이의 순수한 동경이나 꿈같은 감정이기도 했다. 나를 깨운 것이 바로 빛의 아들, 그자의 의지였다. 나는 그자의 욕망과 꿈에 의해 다시 몸을 일으켰고 빛의 아들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지. 동등하게 옆에 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노을빛의 신의 선택을….”
-…….
“받았지.”
침을 꿀꺽 삼켜 넘기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것은 신앙이었으며 존경의 표현이었다. 한낱 인간이었지만 신의 옆자리에 서고 싶다는 진실 된… 마음이었지.”
-이기영 그자는 무엇을… 어떤 것을 받았습니까.
“필요한 것. 그자가 원한 것. 그대 역시 같은 것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그대가 원했을 때의 이야기다만….”
고민하고 있는 얼굴은 무척 재미있다. 본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마 녀석은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중일 것이다.
그만큼 내가 녀석에게 던진 먹이는 달콤했으니까.
‘신의 옆에 설 수 있다.’
라거나.
‘그에게 선택받을 수 있다.’
라거나.
‘그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따위의 미끼. 수행 사제들이라고 해도 거절하기 쉬운 유혹은 아니다.
베니고어의 옆에 설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영혼을 내놓을 신도들이 한 트럭으로 나타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순교고 그게 바로 신을 위한 희생이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성기사단이나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이단심문관들, 자신들이 죽으면 베니고어의 곁에서 쉴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신념.
광기와 다를 바 없는 일부 종교적 신념은 인간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기도 하고 확고하게 만들기도 한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욕망은 그만큼 무섭다.
‘이 새끼한테도 예외는 아니야.’
지하 밑바닥까지 추락한 와중에 눈에 비치는 작은 불빛, 그곳에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놈은 여전히 합리화하는 중이다.
자신에게 말을 건 게 악마가 아니라는 합리화,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노을빛의 신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는 합리화, 모든 것은 신을 위해서고 그를 위해서라는 합리화.
그를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합리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멍청한 질문이군. 그대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과 함께 걷고자 하는 것은 그대뿐만이 아니니까.”
‘네가 안 해도 다른 새끼가 할 거야.’
-…….
‘노을빛 신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굳이 네가 아니어도 돼.’
-제가….
‘나는 급할 게 없어. 급한 건 너야.’
-저는….
‘이번에도 뺏길 거야? 탐나지? 시바 탐나자너. 다 알어. 탐 나자너어.’
“내 손을 잡거라. 필멸자여.”
-…….
“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이제는 기도까지 드리고 있다. 눈물을 왜 흘리는지는 모르고 있지만 놈이 엄청난 내적갈등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신이시여….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실. 놈의 표정을 확인하니, 굳이 다음 말을 내뱉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녀석의 안에 숨어 있는 악마는 놈에게 손을 뻗었고.
놈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붙잡았다.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
-…….
“빛의 아들의 눈과 심장.”
-…….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빛의 아들의 눈과 심장이야.”
내가 입을 열면서도 히죽히죽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설정 한번 죽이네. 진짜.’
고전적인 클리셰였지만 본래 왕도는 패배하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