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5화 마지막 (38) >
“즐겁지 않은가.”
“안 즐거울 리가 있겠습니까.”
“생은 너무나도 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야깃거리가 필요한 것이지.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그대의 작품은 너무나도 뛰어나구나. 요 며칠간 나를 즐겁게 한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표현하고 싶을 정도야. 어떤가? 와인이라도 한잔하는 것이.”
“감사히 들겠습니다. 벨리알 님.”
“아주 완벽하게 타락시킨 것 같더군.”
“원래부터 문제가 있는 놈이었으니까요.”
“그것을 끌어올리는 것이 재능이다. 어둠을 완벽하게 등질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어둠을 끄집어내는 일, 속 안에 숨겨두고 어두운 욕망을 자극하는 일, 우리 악마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대의 간교하고 역겨운 혓바닥은 어둠을 간질이는 재주가 있어. 아주 조그마한 틈을 좀 쑤시고 들어가 그것을 자극하는 재능이 있다 이 말이다.”
“본래 밝으면 밝을수록 어둠을 잘 간질이는 법입니다.”
“…….”
“…….”
“지금껏….”
“…….”
“지금껏 많은 쓰레기들을 봐왔지만 정말로 놀랍군. 그대는 놀라운 사람이야. 할 말을 잃을 정도이지 않은가. 하핫.”
‘벨 이사.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진정 빛나기 때문에 가장 어두운 부분을 끄집어낼 수 있는 거겠지요. 푸하헤헤헤헷!”
“역겨운 인간! 아니, 역겨운 악마로군! 하하하하핫!”
그 많고 많은 악마 중에 내 영혼과 마력에 반응한 게 벨리알인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할 텐가.”
“글쎄요. 아직 확실하게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멋진 무대를 준비해 주고 싶은데. 사실 여러 가지로 변수가 많아서요.”
“으흠… 그런가. 변수라… 그래. 변수….”
벨리알에게 적의를 보이는 은색의 빛을 손바닥으로 쳐낸 이후에 다시금 와인을 홀짝였다.
“뒤를 생각하고 있군.”
“네. 뭐 완벽하진 않지만 비슷합니다.”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수긍하고 있는 듯한 느낌.
기왕 사용하기 시작한 거 제대로 쓰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손이 가기는 했으니 퍼즐로서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제법 쓸 만한 패가 만들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감정적으로는 퍼즐이고 뭐고 녀석을 단매에 쳐 죽이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역할을 부여하는 게 맞다.
생각보다 많이 뜯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악마 계약자.’
아니, 아니, 악마 그 자체.
조금 무리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마냥 무시하기가 어렵다.
‘진짜 엄청 당겨올 수 있을 것 같자너.’
지혜 누나가 이쪽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일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루시퍼의 눈을 피함이기도 하지만 성과를 모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루시퍼와의 계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녀 행동의 당위성이 더욱더 두드러진다.
‘신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물론 그녀가 모으고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양분이지만 그것 역시 포인트로 환산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간단한 답을 도출해 낼 수도 있다.
나도 그녀와 같은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신성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
‘보험.’
신성은 보험이다. 혹시 모를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려 줄 수 있는 보험. 송수경이 보여준 빌런으로서의 가능성이 괜스레 눈에 밟힌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
“혹시 현세에 있는 제 시신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제게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겁니까?”
“그대에게 다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금 현세로 돌아갔을 때 역시. 커다란 문제는 없겠지. 심장 같은 경우에는… 글쎄… 너무 오래 떼어놓는다면 변수가 생길 수도 있지만 어차피 다시 가져올 것이 아닌가. 보잘것없는 필멸자의 육체로 되돌아간다고 한들, 그대의 격은 변하지 않아.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적절한 예가 있지 않은가. 저 반짝이는 벌레들만 봐도….”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눈에 보이는 것은 튕겨 나간 은색 빛을 위로하고 있는 파란색과 갈색. 다시금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은색 벌레를 말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당연히 벨리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육체는….”
“육신은 육신일 뿐이지. 그대가 현세로 내려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육신의 소생이 아니라 지불해야 할 값이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한데….”
“네?”
“아니… 아니다.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군. 하… 하하하핫!”
‘벨이사 눈치 너무 빨라.’
지금까지로도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앞으로 더 재미있어질 것 같다고 기대하고 있는 듯한 눈빛, 녀석은 제발 내가 계획을 진행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멋지군. 멋져. 너무나도 멋지지 않은가!”
‘나도 멋진 계획 같기는 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머릿속에 스토리텔링이 딱딱 그려지자너?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 현상을 주도한 악마. 대륙의 모든 인간을 기만하고 기존의 빛을 부정한 기만자, 빛을 타락시키기 위해 자신마저 속인 악당.
송수경.
악마마저 한 수 접어줄 정도의 대악마가 빛의 아들의 눈을 빼앗고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린다.
그 정도는 돼야 대륙인들이 개연성을 느끼고 공포에 떨어주지. 우리 지혜 누나도 그 틈에 슬그머니 합류해주면 좋고 말이다.
이 누나가 만약 지금 생떼를 부리고 있는 거라면 자기 대신 모든 걸 떠안고 죽어줄 희생양을 하나 만들어 놓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도 있으니까.
어쩌면 송 빌런에 대해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보다 정보에 민감한 사람이니 내가 작업 치고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을 수도 있어.’
결과적으로 꽤나 많은 양의 포인트를 모을 수 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 어쩌면 27군단 사태 때와 비슷할 정도로 신성이 벌릴 수도 있지 않을까.
김현성과 빛의 아들들이 놈에게 돌을 집어 던지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고….
“무엇을 준비하면 되는 것인가. 하하하핫!”
‘벨 이사 너무 신났자너.’
“리무르아를 불러오지.”
“아니, 굳이 지금은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민하는 것인가. 멋진 복수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멋진 이야기가 아닌가. 성과가 필요한 그대에게 주어진 최선의 선택지를 어째서 주저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27군단 소환사태 당시에 나와 베니고어가 얻었던 신성을 상회할 수도 있다. 아니, 그 이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많은 것을 투자했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우리 쪽에서 투자할 것이 없어. 숫자놀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굳이 환산해 보면….”
‘벨 이사 너무 신났어.’
솔직히 얼마를 얻을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굳이 저렇게 자료를 꺼내는 이유는 이쪽을 설득시키기 위함이겠지. 오랜만에 찾아온 유희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 저렇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다.
빛의 아들을 타락시켰을 때도 저런 표정이었을까. 그때는 인간형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대로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아마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 같다.
“지금의 그대라면 어느 정도일지 감이 오겠지.”
‘감은 와요.’
“주저하고 있는 이유가. 현세의 육신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 때문인가.”
글쎄.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생리적으로 꺼림칙하다는 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별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정도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정도라면 눈이 문제겠습니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예산을 전부 채울 수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베니고어 님이나 저에게도 떨어지는 게 어마어마할 테니… 노을빛의 신도 수지맞겠네요.”
‘그거 다 내 거자너. 사실상 전부 다 내 거자너.’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맞다. 결정적인 상황에 쓸 수 있는 보험도 물론이거니와 대륙의 복구, 업데이트까지 끝마칠 수 있지 않을까.
“기다리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인가.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것을 원하고 있군.”
“그렇지도 않습니다. 자그마치 그 정도인데 조금 기다리는 게 문제겠습니까.”
슬그머니 와인을 들이켜며 목을 축인다.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는지 아까부터 벨리알이 틀어놓은 고풍스러운 음악이 들려온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벨리알 역시 나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중, 화면 속에 들어선 것은 레인저들이었다.
대륙 최상위권이라는 생각이 드는 암살자가 한 명, 나머지도 모조리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레인저. 그림자에 녹아들다시피 해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내가 봐도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오직 침투 임무만을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된 이들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미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거쳤을 것이다. 수신호마저 최소화하며 파란 길드의 안쪽에 들어서고 있는 놈들, 나 역시 이 새끼들이 뭔가 해낼 거라고 믿고 싶기는 했지만 당연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길드에서는 녀석들이 침입한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파란 길드가 호구로 보여?’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김미영 팀장, 조혜진은 회의를 진행하는 도중, 밤새도록 이어지는 회의에 피곤해하는 모습들이 시야에 비친다. 일반 길드 직원으로 녀석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오늘 당직 누구야?’
하늘에서부터 레인저들 사이로 떨어진 인형이 쌍검을 뽑아 드는 것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박리안이구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적 레인저들은 순식간에 흩어지는 중.
앗 하는 사이에 두 명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간다.
나름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녀석이 단검을 찔러 넣었지만 허리를 뒤로 젖히며 공격을 피해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로 녀석도 두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가며 아웃. 자결하지 못하게 조치를 한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몸이 녹아내리는 녀석을 보며 표정을 구기는 박리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저주.’
전투 불능이 되었을 시에 몸이 녹아내리는 저주를 임무 시작 전 걸어놓은 모양이다.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는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 곧바로 다시 한번 검을 꺼내 든 채로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박리안 혼자서도 정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침입자들의 목적은 전투를 진행하거나 길드원들을 암살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시신을 운반하는 것, 첫 트라이 이외에는 기회가 거의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인지, 다른 입구에서도 끊임없이 레인저들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이 보인다.
길드 하우스 하나를 점거하기 위해 파견한 것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전력, 파란 길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놈들이 이 정도의 인원을 투입할 이유가 되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많기는 많아. 준비도 잘했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몇 놈이 나가떨어지는 중, 방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유아영은 갑옷도 걸칠 시간이 없었는지 망치만 든 채로 전투에 참가했지만….
‘쟤는 못 잡지.’
레인저들은 유아영과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숫자가 조금 많다고 한들, 높은 내구를 지닌 탱커와 드잡이질을 하고 싶어 하는 암살자는 없다.
벌써 이곳저곳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는 도중, 사실 전투 자체는 너무 일방적이라 코멘트를 할 수 없지만 대륙 최정상으로 구성된 레인저답게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에 도착하는 것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그래. 문제는 여기서부터지.
-당, 당, 당… 당신들 누, 누구야….
-…….
-누, 누, 누, 누군데? 누구… 냐고.
정하얀이 손톱을 깨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