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6화 마지막 (39) >
왠지 던전 마스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시바….’
지금 침입한 레인저들이 던전을 공략하러 온 모험가들이라고 상상해 보자 정말로 이곳이 던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아마 신화 등급 정도는 됐겠지.’
파란 길드 하우스를 던전으로 규정한다면 당연히 신화 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그 이상의 등급을 받아도 별 무리가 없을 거라고 여겨졌다.
길드원들 모두가 대륙에 내로라하는 모험가였으니까.
파란의 원년 멤버들이 워낙 비현실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들어온 이들이 저평가받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김창렬이나 유아영 역시 대륙 최상위권 모험가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심지어 생 신입인 알프스 역시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모험가로 성장했다. 지금 암살자들을 쥐 잡듯이 잡고 있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물론 진짜는 신입 길드원들이 아니다. 신화 등급의 던전으로 규정을 내리려면 네임드 역시 그에 걸맞은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1층 보스는 박덕구가 적당하지 않을까.
‘시간 내에 쓰러뜨리지 못하면 동료를 불러오는 기믹이 잘 어울릴 것 같자너.’
김예리와 안기모가 함께 등장하는 거지.
아니나 다를까 셋이 몰려다니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안 그래도 쓰러뜨리기 힘든 박덕구의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안기모와 아예 없다시피 한 대미지를 책임지는 김예리.
웬만한 파티, 아니, 클랜이나 길드 단위로 몰려와도 저 셋을 뚫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적으로 친해 몰려다니는 것과는 별개로 쟤네들이 뭉쳤을 때의 시너지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 되는 부분을 보완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없이 맞춰본 호흡의 퀄리티 자체가 남다르다는 거다.
‘2층 보스는….’
자리에는 없지만 2층의 보스는 역시 조혜진이 아닐까 싶다. 규격 외라고 부르기에는 보여준 업적이나 임팩트가 아쉽기는 했지만 조혜진 역시 벽을 넘은 인간 중 하나. 틀림없이 초월자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영물과 템빨까지 갖춰진 조혜진을 붙잡을 수 있는 이들은 대륙 안에서도 손가락에 안에 꼽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생각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울 거야.’
괜히 기마병이라는 병과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달릴 수 있는 환경만 마련된다면 갑옷이고 방패고 나발이고 모조리 말발굽과 몸통박치기에 부서져 나가게 될 것이다.
최종 보스는 말이 필요 없는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이고…. 사실 얘는… 애초에 설명 자체가 필요 없으니 논외….
이처럼 파란 던전이 실존한다면 이런저런 이유로 명성을 날렸을 것이다.
공략 불가 판정은 물론이거니와 국가, 아니, 대륙 단위로 공략에 부딪치기 위해 돈과 인력 좀 쑤셔 넣었겠지. 지금 놈들이 하는 짓이 그렇다.
하지만 이 던전이 정말로 악명을 날리게 된 계기는 히든 보스의 등장 존재 때문이지 않을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광경처럼 말이다.
‘너무 무섭자너.’
연금 공방에 침입하거나 페이크 네임드 한소라를 마주쳤을 때, 혹은 빛의 아들의 시신 안치실을 침입했을 때만 만날 수 있는 히든 보스.
‘진짜 무섭자너….’
내가 모험가의 입장이었어도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 히든 보스.
정하얀이라는 던전 보스에 대해 침입자들이 알고 있었다면 애초에 파란 길드 하우스 던전에 발을 들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공략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거 아니지?’
과장하지 않고 말하건대 정하얀의 존재는 모든 침입자에게 재앙이나 다름이 없다.
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던전의 보물을 털러 온 녀석들을 바라보는 우리 히든 보스의 얼굴이 오늘따라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
잠시 후 본인들에게 닥쳐올 불운을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의 표정에서 뜻밖의 여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 제정신 아니네….’
히든 보스를 만난 것 치고는 여유 있는 얼굴, 물론 어째서 놈들이 저딴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정하얀은… 그녀는 마법사였으니까.
‘병신들.’
아무리 초월적인 마력이나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녀의 근본은 마법사였으니까.
일반적인 마법사가 암살자 집단과 마주쳤을 때 자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니 놈들 역시 비슷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거겠지.
수준 높은 암살자들 사이에서 한낱 마법사가 뭘 할 수 없을 거라고,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하얀의 물음에 시선을 교환하는 꼴은 가관, 죽이지 않고 제압하자는 사인을 보내는 놈들이 잘못된 선택지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 시야에 비쳤다. 기어코 그녀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정하얀의 뒤를 잡은 암살자의 표정에 의심 따위는 없다. 정하얀을 그대로 제압하고 파란 던전의 공략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물론 놈의 그런 표정에 의문이 들어서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녀석의 단검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붙들린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무언가에 저항하려 하고 있었지만, 저항할 수 있을 리 만무, 단검을 든 손을 시작으로 몸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시바….’
-아… 아아아….
‘으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애초에 비명을 지르지 않게 훈련되어 있는 놈들이 저런 비명을 지른다는 것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길드 하우스가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지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침입자분들의 얼굴이 긴장이 감돌기 시작, 내가 다 공포를 느낄 정도로 처절하게 들리는 울음소리였으니 쟤네들이 느낄 감정이야 오죽할까.
-누, 누, 누구냐고… 말했, 했잖아.
앞에서 뛰어들던 한 놈은 역시 땅바닥으로 처박힌다.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악!
어떻게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몸이 기괴하게 비틀리고 있다. 뼈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는 것은 물론 자꾸만 빠직 빠드득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몸에서 흘러나온다.
인간이 작은 공으로 변신하고 있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죽, 죽이면 안 되는구나… 살, 살, 살려서 머리를 열어봐야지.
심지어 작은 공으로 변신한 놈이 어떻게 살아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단언하건대 저 머리를 열어본다는 표현은 허투루 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인지한 침입자들이 정하얀을 죽일 작정으로 달려들고 있었지만 애초에 그녀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리 던전의 히든 보스는, 시바,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어떻게 묘사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저 안에서 보여지고 있는 광경이 비현실적이다.
웬만한 공포영화나 고어 영화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참상이 안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
나름 비위가 좋다고 생각했었지만 저걸 계속 보고 있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핏물이 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마치 지옥도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아아아아아악!
-아… 으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살, 살려줘! 살… 살려줘! 살려줘어!
-아아아아아아아악!
-우웨에엑… 우웨에에에엑… 제발… 제바알….
‘시바….’
-아아아악! 살려… 살려….
-당, 당신들 오빠를 노리고 온 사람들이지. 그, 그렇지.
-아으아아… 아아아….
-오, 오빠를 가, 가져가려고 온, 온, 온 거잖아. 그, 그렇잖아. 그렇잖아!
-아으윽… 아아악!!
-내, 내가 뺏, 뺏길 것 같아? 뺏… 뺏길 것 같냐구우… 절, 절대로 안 뺏길 건데. 절대로 안 뺏길 건데?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생각한 것보다 쌓인 게 많았던 모양, 열이 점점 오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침 명분이 필요했단 것일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었을 테고 개인적으로도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겠지.
마법의 신이 돼 하늘로 올라간다는 귀여운 계획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었지만, 진행 자체가 더디기도 했고,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이쪽과 만날 수 없다는 게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새끼들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손속이 너무 잔인하다. 정하얀도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 언제나 그렇듯 계속해서 과대망상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니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절대로… 안 뺏길 건데… 내 건데… 내 거야. 정, 정체가 뭐지? 왜, 왜 뺏으려고 하는 거야? 도대체 왜? 왜 그러는 거냐구.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거야. 왜! 왜!
손맛을 느끼고 싶었는지 단검을 빼 드는 모습, 애초 얘가 왜 단검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위, 위험해. 위험하다구우… 위험한 상황이라구….
‘뭐가 위험해. 하나도 안 위험해. 네가 제일 위험해.’
-누, 누, 누가 노리고 있는 거야! 누구냐고! 누가… 왜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 거냐구… 왜 자꾸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거야… 끄윽… 불안하단 말이야. 너무 불안해. 안 그래도 힘든데… 너무 불안하단 말이야.
‘뭐가 그렇게 불안해. 하지 마. 불안해하지 마. 한소라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안 달려와?’
24시간 감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한소라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거 태업이자너. 그 연봉 받고 태업하면 안 되지. 이러라고 고연봉 준 게 아닌데.’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는지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함께 작업하는 도중 갑자기 정하얀이 모습을 감췄을 때 얼마나 당황했을까.
큰일이 나도 제대로 큰일이 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제발… 제발… 신이시여. 신이시여.
흑마법사이면서도 신을 찾는 모습이 이해가 안 되기는 했지만 그만큼 그녀가 절박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지 않을까.
아마 타임 어택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야 자신이 막아줄 수 있지만 완전히 정신을 놓게 될 정하얀은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왜, 나, 나, 나를 괴롭히는 거냐구!
그 와중에도 정하얀의 정신이 실시간으로 갈려 나가는 중, 타이밍 좋게 한소라가 달려오고 있는 게 보인다.
-정하얀 님! 정하얀 님! 어디 계세요!
-…….
-정하얀 님!
-소, 소라야? 흐으윽….
-정하얀 님!
-소라야아….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주변 풍경을 보고 꺼림칙한 표정을 보내오기는 했지만 일단은 정하얀을 발견했다는 게 기쁜 것만 같다.
-소라야아….
-네. 저 여기 있어요. 여기 있어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한소라를 꽉 껴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 오빠를 빼앗아 가려고 하나 봐. 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아직… 그대로 계시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진정하셔야죠.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니까. 정하얀 님 혼자 계신 것도 아니고… 저도 있고 다른 길드원들도 있으니까요.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해 볼게요. 여기 그대로 계세요. 제가 다른 길드원들이랑 연락해 볼 테니까요.
-으응….
-지금 거의 정리됐다는 것 같아요. 길… 길드 마스터에게도 연락이 간 것 같네요.
-현, 현, 현성이 오빠도?
-네. 길드 마스터도 급하게 이쪽으로 오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박덕구 님도 오시나 봐요. 아무도 일도 안 일어날 거예요. 지금 거의 다 정리된 것 같아요. 리안이가….
-리안이?
-아… 네. 리안이가 아니라… 박리안 씨가 지금 생포한 암살자들을 심문하고 있다고 연락이 왔네요. 어디에서 부길드마스터님을 노린 건지, 어째서 파란 길드에 침입한 건지 결과가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정하얀 님은 부길드마스터한테 인사드리고 조금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샤워도 하시고요… 네? 따뜻한 탕 안에 들어가서 몸 좀 녹이시고….
-여, 여, 여기 있을래.
-아. 네. 그럼 길드마스터가 올 때까지만 여기 있을까요?
-으응….
-갑자기 사라지셔서 깜짝 놀랐어요. 괜찮으신 거 맞으시죠?
-으… 응… 괜찮아. 이, 이 이제 괜찮아졌어. 아… 쟤네들 머리 열어봐야 하는데.
-조금만 쉬고 해요. 내일 해도 되고요.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오늘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그럼 소, 소라도 내일 같이 열어볼까?
-아… 네….
‘이거 아마 불가능할 것 같아.’
말 그대로.
기왕이면 벨리알의 장단에 맞춰주고 싶고, 나도 크게 한탕 해보고 싶었지만….
‘가능한 계획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능할 것 같지가 않은데요?”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김현성이 길드 하우스로 돌아오고 있었다.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
마치 세상에게 배신당한 듯한 얼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