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7화 마지막 (40) >
-지금 도착하신 것 같아요. 정하얀 님. 현장은 길드마스터에게 맡기시고 쉬시는 게 어떨까요?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으니까….
-아… 으응….
-부길드마스터한테도 인사 드리셔야죠.
-응. 마, 마법도 리필해야 되니까. 잠, 잠깐만 기다려. 소라야.
-네. 천천히 오세요. 저도 잠깐….
차라리 정하얀 쪽이 상황이 더 좋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현성이 얘는 어떻게 해?’
안치실로 들어간 이후에 이쪽을 내려다보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하지만 시신에 이상 따위는 없다. 애초에 부패하지 않게 처리를 하기도 했고, 사실 그런 마법적인 처리 없이도 육체가 쉽게 부패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온기가 돌지는 않았지만 경직되어 있거나 딱딱해 보이지 않는다. 피부도 말랑말랑해 보이기도 했고… 여러 가지 마법이 계속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김현성과 박덕구가 온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했는지 몇 차례 마법을 덧씌우는 모습.
여러 가지 저주와 마법을 캐스팅한 이후에는 조용히 내 뺨을 쓰다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살짝 둘러본 이후에는 은근슬쩍 입을 맞추는 중, 괜스레 히죽거리고 있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평소처럼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건강하자너….
이걸 건강하다고 표현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지만 긴급하게 투여한 진정제가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에 내가 불안해하던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네. 소라 언니. 길드마스터께서는 지금 상황을 전달받고 계신 중입니다.
-그래?
-네. 피해 상황을 집계하고 있는 중이지만 사실상 피해 자체는 없던 거나 마찬가지라… 길드 창고나 다른 곳에 피해가 없는 것을 보면 적들이 부길드마스터를 노리고 있다 판단해도 될 것 같습니다.
-최악이네… 아마 곧 정하얀 님이 나오실 거야. 길드마스터께 안치실 상황 보고드리고 집계가 끝나면 따로 연락해 줘.
-네. 소라 언니.
-소, 소라야? 나, 나왔어.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박리안 씨.
-네?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리안 씨.
-아… 네… 네… 소라 씨….
-볼일은 전부 끝나셨나요? 정하얀 님?
-으… 으응… 방금… 걔였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박리안 씨에게 피해 상황에 대해 전해 들어서요. 그럼 갈까요?
확실한 진정제가 있으니 멘탈적으로 건강해진 게 맞다.
마치 살얼음판을 건너가거나 외줄 타기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한소라가 단단히 붙들어 주고 있는 중, 정하얀이 이전과 같은 사고를 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상관없으리라.
물론 일이 어떻게 꼬일지 모르고, 정하얀의 존재 자체만으로 위험요소가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방심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의미가 있자너.’
애초 내가 죽었을 때도 커다란 사고가 없었다는 걸 떠올려 보면 정하얀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확률을 희박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쪽은 김현성 쪽이 맞다.
‘…….’
연결되어 있는 회귀자 사용설명서에서 계속해서 위험 신호를 보내는 중, 김현성의 멘탈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경고를 울리고 있는 것이다.
조혜진이 한소라 룰을 수행해 줄 수 있다면 땡큐겠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굳어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박덕구, 황정연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표정이 심각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거, 아무래도 형님을 노리고 있는 게 확실한 모양이요.
-그렇습니까.
-나야 왜 형님을 노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시설에 피해가 없다는 게 수상하기도 하고… 거 정연 씨가… 그러는데 지금 형님이 가치가 있을 거라고 합디다. 커다란 신성력을 담았던 몸이니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지만 정말로 이런 미친 상황이…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니까. 어떤 미친놈들이 이딴 짓거리를… 할 생각을 한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거 아니요.
-…….
-심문을 해봐도 도통 드러나는 게 없고 아마 건너 건너 의뢰를 받은 것 같은데….
황정연히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블랙마켓 쪽일 가능성도 있어요.
-블랙마켓 말입니까?
-네. 길드마스터. 침입한 이들 중 하나를 본 적 있는 것 같거든요. 제 기억력이 확실하다면 아마 공화국 쪽에 있었던 블랙마켓이었을 거예요. 제대로 한번 조사를 해봐야 하겠지만….
-블랙마켓에서 굳이 형님 몸을 노릴 이유가 있는 거요?
-그게…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아마 이들이 노리는 게 금전적인 이득이나 부길드마스터 안에 깃들어 있는 힘이라면 암… 암… 암시장 말고는 거래할 수 있는… 수단이 없을 테니까요.
김현성의 눈치를 보고 있다. 당연히 김현성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억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 사실 얘가 세상에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것도 이해가 가기도 했다.
‘진짜 인간 불신 생기겠다. 진짜로. 이러면 우리 현성이가, 시바, 누굴 믿을 수 있겠냐고. 세상이 너무했네. 세상이 너무했어.’
단언하건대 이런 상황이 조금만 더 지속된다면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구할 가치 따위는 없었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기 싫은 짐을 억지로 들어가며 대륙을 구한 영웅, 애초 자신의 의지로 대륙을 구원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고, 가장 소중한 사람의 부탁과 염원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이 구한 대륙이, 자신이 구한 인류가 그 소중한 사람의 시신을 아이템 따위의 성과로 취급하거나, 암시장에서 거래할 생각을 하고 있으니….
놈이 느낄 배신감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허탈함에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지.
고작 이런 사람들을 지키려고 빛의 아들이 희생되어야 했던 건가. 이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기영 씨가 죽어야 했던 건가.
고작 이런 놈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야 했던 건지, 정말로 이게 맞는 건지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힘이 빠져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억누르면서도 대륙의 악의와 인간들에 대해 지독한 환멸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니요?
-그것도 한번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아무래도 확률은 희박하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대륙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길드마스터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
-블랙마켓이나 암시장 쪽의 단독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조직적으로 훈련되어 있는 이들이기도 하고… 대형길드가 대도시 차원으로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겠네요. 아마 내일 하얀 씨가 제대로 된 조사를 하면 성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빠르게 결론을 내리기 힘들어요. 아무래도 조심스러워 져야겠죠. 대륙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니까요. 저도 내일 하얀 씨와 함께 조사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네.
-형씨….
-현 시간부로 길드의 보안 등급을 조정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럴 줄 알고 있었다니까. 그럼….
-네. 전시상태나 다름이 없다고 판단해 주시면 됩니다. 허가를 받지 않는 이들은 모두 침입자로 가정하겠습니다. 누가 됐든 간에 즉시 사살할 수 있도록 길드원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블랙마켓에 대한 조사는… 창렬 씨에게… 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있을 회의실에서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거, 알겠소.
-그리고… 감사합니다.
-…….
-…….
-거, 감사할 게 뭐가 있겠소. 형님을 지키고 싶은 건 형씨뿐만이 아닌데… 결정적으로 안치실 앞쪽을 막은 건 누님이었으니까. 사실 나는 한 게 없다고 봐야지. 아무튼 기운 내라니까. 괜히 자책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니요. 형씨가 항상 형님을 지킬 수는 없으니까 우리라도 힘을 내야지.
-네.
-아무튼 간에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니까. 나도 오늘은 뒤처리를 해야 하니까. 거, 형씨 말처럼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는 거로….
-네.
김현성이 정신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덕구 녀석이 김현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는 것이 눈에 보였다.
차라리 시원하게 화를 냈다면 저런 위로를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현재 김현성이 보여주고 있는 반응 자체가 위험해 보인다.
-하… 하하….
박덕구와 황정연이 사라진 이후에는 땅바닥을 바라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는 중.
-하… 하….
눈에 눈물조차 고이지 않는다. 멍한 동공이 두드러진다.
길드 직원과 길드원들이 사태를 수습하는 있는 와중에도 녀석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
‘시한폭탄 터지기 직전이잖어….’
둠현성처럼 다혈질적으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히 분노를 쌓고 있는 것만 같다.
원래 대놓고 화를 내는 것보다 저런 종류가 더 무섭다는 걸 떠올려 보니 송 빌런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어디까지 갈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첫 시도 때 확실하게 했어야 했는데.’
물론 녀석들이 허투루 준비하고 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꽤나 중요자원을 투자한 느낌이기도 했고 규모 자체가 크기도 했으니까.
일반적인 대형길드를 상대로 한 작전이었다면 충분히 들어 먹힐 만한 여지가 있는 작전이었다. 길드 내 이인자라고 할 수 있는 조혜진도 없었고, 최종 보스 김현성 마저 자리를 비운 상태가 아니었던가.
송 빌런이 파악하지 못한 요인은 파란 길드가 일반적인 대형길드가 아니었다는 것, 이미 벽을 뛰어넘은 마법사에게 직군의 상성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상정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최소한 하얀이가 희라 누나랑 맞짱 뜰 수 있다는 것만 알았어도 이런 무리수를 던지지는 않았을 거야.’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으며 대형 마법을 난사하던 모습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거지 뭐.
애초 대륙에서 벽을 넘은 마법사가 정하얀 하나뿐이니 놈들의 정보가 부족했던 것도 이해가 가기도 했지만 이 새끼들이 찔러보자는 느낌으로 던진 공 때문에 파란 던전의 공략이 한층 더 어려워졌다.
아마 내일부터 많은 부분이 변하지 않을까.
내 시신에 걸려 있는 정하얀의 마법도 마법이지만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보안 등급을 발령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김현성이 어떤 선택을 할지 걱정되는 거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아마 녀석이 정말로 인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져 요상한 선택지에 발을 들인다면 이기영의 시신 탈취 계획은 미국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너무 아까운데.’
아직 완전히 잡은 주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올라갈 희망이 보이는 주식인 만큼 손에서 놓아버리기가 쉽지가 않다.
라파엘 때와 비슷한 것 같은 느낌. 옆에서 벨리알이 약을 팔고 있으니 나도 이 판단이 틀린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응원 좀 해줘야 할 것 같자너.’
-기영 씨…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제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시신의 앞에서 주저앉은 모습을 보니 내가 다 가슴이 아프다.
‘우리 현성이 많이 힘들자너. 빨리 행복해져야 되는데… 세상이 현성이를 힘들게 한다. 진짜… 세상이 힘들게 해.’
-기영 씨가 뭘 지키고 싶어 하는 건지, 도대체 어떤 걸 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하… 하하…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기영 씨… 기영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륙은… 인간은 깨끗하지 않습니다. 지킬 가치가… 없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게 기영 씨의 희생을 부정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제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떤 것에 기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신 차려야 되자너. 영웅이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자너.’
김현성이 내 목소리를 기대하고 있는 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야 뻔했다.
본래 진정한 빛이라는 건….
아무리 힘들고 의심이 차오르는 순간에도.
인간 찬가를 부르짖게 마련이었으니까.
“모든 인간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노을빛의 검사여.”